갈멜산에서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시고, 엘리야가 수백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진멸한 사건은 아주 유명합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엄청나게 많은 대적들 앞에서 때에 맞춰 불이 떨어지길 기도 한다는 것은 보통 큰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 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기 선지자들이 진멸된 사실을 알게 된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자 놀랍게도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하신 곳에서 도망을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달라고까지 하며 믿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4b]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성경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믿음의 주인공이자 기도하는대로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것이 바로 저희들의 모습입니다.
저희는 똑똑하고 겸손했던 니고데모도 이해하지 못했던 다시 태어나는 기적을 경험했고,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이라는 일반 사람들은 믿지 못하는 것을 믿는 엄청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하고 십수년 동안 숱한 말씀을 듣고 기도의 시간을 갖고, 봉사를 해왔어도 순간의 위기에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 저희들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믿음이 흔들리는 엘리야에게 먼저 다가오십니다. 그럼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의 믿음이 흔들릴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무엇을 하시는지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믿음이 흔들릴 때 어떻게 하시나요?
1. 언약을 기억하게하십니다.(1-8)
[5a]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이세벨로부터 도망가며 나를 그냥 죽여달라던 엘리야가 잠이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잠이들었다는 표현은 육체적 죽음이나 영적 죽음의 상태를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영적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3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3a]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하는 위기가 닥치자 엘리야가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는 우상을 붙드는 모습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한 것도 정말 죽고싶어서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했는데 왜 내 생명을 위태롭게 하냐고 불평불만이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붙들고, 위기 앞에서 기도가 아닌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사람을 보고, 잠이 들었다, 영적으로 죽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요나 역시도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도망을 갔고, 폭풍이라는 위기 가운데 기도하지 않고 잠이 들었죠.
폭풍에 배가 깨지는 상황 속에서는 졸려서 잘 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떄문에 폭풍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영적으로 죽어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런 요나는 폭풍에 배가 깨지면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할 배 아래층에서 잠드는 모습을 보여줬는데요,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 잠이 들었습니다.
보통 로뎀나무가 지치고 힘든 엘리야에게 쉴 곳을 주고 보호해 주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뎀나무, 이름이 예뻐서 그런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로뎀나무는 대싸리 나무라고 하는데 크기가 작고 싸리 빗자루같이 생겨서 잎사귀도 별로 없고, 그림자도 거의 없어서 광야의 땡볕이 그냥 내리쬐여 쉴 곳이 못됩니다.
그리고 이 로뎀나무 가지는 그렇게 싸리 빗자루처럼 마르고 가늘게 생겨서 불이 잘 붙고 화력이 강하기 때문에 땔감으로 많이 사용됐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서는 멸망의 로뎀나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로뎀나무에 붙은 강한 불 같은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로뎀나무 아래 잠든 엘리야의 모습은 영적으로 죽은 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모습을 통해 저희의 믿음이 흔들릴 때의 상태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단순히 예배에 잘 안나가고, 기도해본지 오래되고, 말씀이 잘 안들리고, 교회 사람들이 싫은 그런 피상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을 흔들리게 만든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관계 상처로 인해 하나님의 뜻대로 반응하지 못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영적으로 죽어서 하나님의 강력한 진노 아래 들어가게 됐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저희들은 예수님께서 그 진노를 십자가에서 대신 다 받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진노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저희 안에 내주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영적으로도 죽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죽지는 않지만 생명의 충만함,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있지 못한 것입니다. 진노 아래 있지는 않지만 우리를 대신해 진노를 받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비참한 일인가요. 참 생명을 얻었음에도 언젠가 먼지처럼 없어질 이 육의 일들로 인해 성령 충만을 잃고, 모든 삶의 원동력인 예수님의 사랑을 외면하다니요.
그런데 이게 믿음이 흔들리는 자의 본질이라고 로뎀나무 밑에 잠든 엘리야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저희들에게 예수님을 주시기까지 한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오래 참으시며 먼저 다가와주십니다.
[5b]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천사를 보내셔서 떡과 물로 엘리야를 먹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한 번에 일어서질 못합니다.
[6b]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영적 죽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쉽게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시 또 천사를 보내 먹이십니다.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그리고 이번에는 가야할 길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일어나 그 길을 걸어갑니다. 8절입니다.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하나님께서 떡과 물로 힘을 주셔서 엘리야를 인도하신 곳은 호렙산입니다. 호렙산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과 함께 언약을 받은 언약의 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믿음이 흔들리는 엘리야를 언약의 산으로 오게 하셨을까요? 그리고 일어나지 못하던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언약의 산으로 인도하시자 일어나 걸어갈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언약만이 흔들리는 믿음을 붙잡아줄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도 아시고, 엘리야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무엇인지는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이 저희의 하나님이 되고, 저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언약은 그 사이에 어떠한 우상도 낄 수 없는 독점적인 사랑의 관계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엄청난 복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우상을 품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온전히 그 복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거하시면서 저희의 우상을 제거하시는 일을 행하셔서 그 사랑의 관계를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것이 언약의 핵심입니다.
엘리야는 사실 이 언약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그렇게 되길 원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상을 심판하고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이적 앞에서도 회개하지 않고 강력하게 마귀적 권세를 발휘하는 이세벨로 인해 깊은 절망감에 휩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자신의 우상마저 튀어나오면서 야, 이게 뭔가? 하며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깨져서 하나님을 믿질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떡과 물을 먹이시며 다시 언약을 기억하는 자리로 이끄셔서 언약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견고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과 멀어진 영적으로 죽은 모습을 보이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아직 하나님의 언약의 기반 위에 확고하게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언제 믿음이 흔들리나요? 죄악된 세상 속에서 예상치 못한 안좋은 일들에 절망하고, 죄악된 사람들과의 관계가운데 상처받아 지치고, 그 가운데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나의 죄악에 짓눌리며 허탈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말 계신거 맞나? 정말 이 세상과 나를 구원하시는거 맞나, 나도 모르게 현실 앞에서 약속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소망과 동기를 잃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언약 위에 견고하게 서있지 못하다는 근본 원인을 외면하거나 찾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이렇게 만든 상황탓, 사람탓을 하며 살아가는 삶에 젖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언약의 산으로 인도하셨듯이, 저희를 새언약의 보증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히 7:19, 22 [19b]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저희가 새언약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보증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믿으면 소망이 생겨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갔던 저희가 다시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언약을 견고하게하는 산으로 가는 힘을 떡과 물에서 얻었듯이 저희가 새언약을 견고하게 하는 힘은 떡과 물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 6:48, 50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4:14b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저희는 이제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새언약 위에 견고하게 세워져가는 길을 걸어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이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도 성도님들의 믿음을 세워드리기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담긴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고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가 한번의 떡과 물로 바로 일어서지 못했던 것처럼 저희도 말씀 좀 듣고, 기도한다고 해서 믿음이 바로 세워지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예수님을 증거하심으로 저희와 저희 자녀들을 새언약 위에 견고하게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2. 말씀만을 의지하게 하신다.(9-17)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너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엘리야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모르셔서 물어보시는 것일까요?
아담과 하와에게, 심지어는 최초의 살인을 저지른 가인에게도 다 아시면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이들이 자기 죄를 자기 입으로 스스로 고백하고 돌아오길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문에 엘리야 역시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10절입니다.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나는 유별나다. 나만 거룩하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했다, 그래서 나는 문제 없다!라는 교만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언약을 버리고, 제단을 헐고, 선지자들을 죽이고 나처럼 잘하는 사람을 죽이려 한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 남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교만 때문에 자기 죄가 보이지 않아서 회개기도도 못하고, 남의 죄는 너무 잘 보여서 중보기도를 해주질 못하니까 입에서 독이 가득한 쓴물만 쏟아지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자기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기적을 경험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난 이런 사람이야, 근데 넌 뭐야?라는 교만이 싹텃던 것이고 하나님의 질문에 그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은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의 영혼의 중심에는 반드시 이런 교만이 자리잡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당사자는 저 사람 때문에, 이런 상황 때문에라고 말하며 원인을 외부에 돌리기 쉽지만 정작 진짜 원인은 나의 교만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위기의 상황과 상처받는 관계 가운데 두려워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상처받지 말고, 말씀을 따라 그 상황 가운데 선한 일을 하실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관계 가운데 품고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엘리아처럼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보다 내 생각이 앞서니까 그걸 못받아들여서 믿음이 흔들리는거에요.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사실은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기적을 많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쉽게 교만해지고 믿음이 흔들리기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왜그럴까요? 그 기적을 행한 사람이 나이고, 그 능력이 내꺼고, 내가 그 기적 경험한 사람이라는 올무에 걸려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사실 다혈질에 두려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 세워주시고, 능력의 통로로 사용하셔서 성경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은 그걸 쉽게 내 공로로 돌리고 자랑하고 남과 비교해서 남을 까내리는거에요. 입만 열면 자기 자랑에 남 욕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꼭 병이 낫는 것 같은 기적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성도들이라도 똑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씀을 잘 알고 가르치는 은사가 있고, 누군가는 기도의 은사가 있으며, 누군가는 지식이 많고, 누군가는 섬김의 은사가 있고, 누구는 돈을 잘 버는 은사로 헌금을 많이 합니다.
이 모든 것 내꺼인가요! 내 능력인가요? 성령이 주신 것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고 저희는 통로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와 때에 따라 은사와 능력을 주시기도 하시고 안주시기도 하시는 것인데 그것을 나와 이웃의 믿음의 척도로 삼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서 믿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못하는 엘리야에게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십니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은 모두 성경에 나타나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기적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기적들 가운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거에요.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시지 않으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놀랍고 두려운 심판의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엘리야에게 잠깐의 두려움과 환희가 있었지만 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확고한 믿음이 지속될수가 없었음을 보여주는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앞에 이렇게 임하십니다.
[12b]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바람, 지진, 불이 끝나고 세미한 소리가 들립니다.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말씀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어 얼굴을 가리고 나아가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도 하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하고 같은 질문을 던지시지만 엘리야도 똑같이 대답합니다.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아까 읽었던 구절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런 이적들의 셋트를 경험하고도 흔들리는 믿음이 회복되지 못한 엘리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이적들에 비해서 대단해 보이지 않는, 아주 세미한 음성으로 악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들을 세우셔서 우상숭배를 심판하는 언약을 이루실 것이니 돌이켜 있어야할 자리로 가라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엘리야에게 있어서 기도하면 바로바로 나타나는 기적에 비해 능력이 별로 없어보이는, 결과가 너무 느리게 나타나는 것 같은 세미한 말씀입니다.
갈멜산에서 하신 것처럼 이세벨에게도 바로 불이 내리면 좋겠다고 생각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기적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우상을 제거하고 언약 위에 성도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세미해 보이는 말씀으로 엘리야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 말씀에 도망가던 길에서 돌이켜서 엘리사를 세우고, 마지막으로 맡겨진 사역을 감당한 후에 돌풍을 타고 하나님께 올라가게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시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기적이 나의 믿음을, 기적이 나의 자식의 믿음을 세워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말씀도 하시고 기적도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하나님께서 직접 베푸신 기적들로도 이스라엘과 엘리야마저도 믿음이 견고해지지 못했음을 보여주시고, 말씀으로 세우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저도 바울처럼 길을 걷다가 하나님을 강권적으로 믿게 됐고, 믿은지 몇달만에 부모님께 예수님을 전해서 믿게된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제가 엄청 대단한 사람이 될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으로부터 나오는 열정은 2년도 채 못가서 사그라들고 초라한 믿음이 벌거벗겨지듯이 폭로됐습니다. 지금은 저의 믿음이 너무 초라해서 길가다 하나님 만났다는 얘기 이럴 때 아니면 잘 안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믿음이 초라해지고 믿음이 흔들릴 때 젖병처럼 꽂고 먹었던 복음의 말씀이 저를 이렇게 세워가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믿음을 나고 자라게 하신다고 말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면 믿음이 생길 것으로 기대하기 쉽지만 성경은 믿음이 기적으로부터 난다고 하지 않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요즘 맞딱드린 이 코로나 사태는 저희가 예상하기도 힘들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입니다.
코로나는 다양한 문제들, 온전한 예배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관계적인 문제, 교회의 의사결정과 다음세대 양육의 문제, 많은 문제들을 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명확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일어나지 못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가운데 저희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면 나와 교회가 언약 위에 견고히 서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일수록 기적같은 일들을 바라기 보다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 위에 견고하게 서는 믿음을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 뿐 아니라 삶의 다양한 위기와 상처 앞에서 믿음이 흔들릴 때 새언약의 보증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씀을 붙들며 믿음이 굳게 세워져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