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멜산에서 엘리야가 기도하자 불이 떨어지고 바알 선지자들을 진멸한 사건은 아주 유명합니다. 설교로도 자주 들어보셨고, 찬양으로도 자주 불리는 스펙터클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진멸한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왕을 우상숭배로 물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알 선지자들을 진멸한 것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기적같은 이야기이지만 성도들이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애도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행한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회복시켜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상숭배에 빠진 성도들을 회복시켜주시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하는 성도를 어떻게 회복시키시나요?
1. 예배자로 부르심으로 회복시키십니다.(30-35)
[30a]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들에게 엘리야가 먼저 가까이 나아오라고 말을 합니다.
우상숭배자는 자기에게 당장 해결되어야 할 우상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부정하며 이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먼저 나아오질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는 죄인의 강력한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참한 관계적 파괴와 삶의 질서들이 무너지는 문제가 반드시 발생합니다.
하지만 죄인은 그 우상숭배로부터 생기는 문제들을 회피하기 위해 나의 우상을 건들지 않고 상황만 해결해 줄 것 같은 재물이나 힘, 나의 능력 같은 우상을 더 가까이 하는 악순환을 반복합니다.
이렇게 우상숭배로 인한 비참한 악순환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버티는 태도를 성경은 강퍅하다라고 하고, 그런 사람의 영적인 근원을 교만하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자들의 특징이기 때문에 이런 백성들을 우상숭배로부터 회복시키기 위해서 엘리야를 통해 먼저 가까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의 비참함 속에 있던 저희에게도 육신을 입으시고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저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을 도대체 보지 못하고 사는 맹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희를 회복시켜주시고자 하는 사랑 때문에 저희 눈에 보이는 육신을 입고 먼저 저희 가까이 오셔서 저희를 부르신 것입니다.
눅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죄인들인 저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먼저 저희 가까이 오셔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영광이 가득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고 저희도 가까이 나아갔다고 해서 우상숭배로부터 바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백성들이 가까이 오자 회복을 위한 행동을 합니다.
[30b]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33] ...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제물을 올리며 예배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왜 엘리야는 우상숭배를 하는 백성들을 가까이 불러놓고 예배를 준비하는 것일까요? 바로 다음 구절에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돌로 제단을 쌓으면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뜬금 없는 말 같기도 하고, 이 말씀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 이유는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전체 이야기의 의미를 이곳에 가져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속이는 자'입니다. 우상을 쫒으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 능력이었던 속임수로 하나님과 이웃을 속이며 살던 강퍅하고 교만한 사람이죠.
하나님께서는 그런 야곱을 씨름, 힘겨루기를 통해 하나님의 힘으로 야곱의 강퍅과 교만을 꺾어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어진 새 이름 이스라엘의 뜻이 '하나님이 승리하셨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강퍅과 교만을 꺾어주셨기 때문에 자기를 죽이러 오는 에서를 또 자기 힘, 속임수로 대하지 않고 다리를 절며 자기 힘이 빠진 강퍅함이 없는 모습과 교만 없는 겸손한 태도로 대함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놀라운 구원에도 야곱은 자기 우상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세상 곁으로 다시 갔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딸 디나가 세상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가 강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디나 사건은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음에도 여전히 세상 곁에서 우상을 추구하다가 세상에 욕보이고 공동체가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는 우상숭배의 비참한 결과가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야곱은 그제서야, 이 비참한 상황의 원인이 교만을 꺾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예배하지 않고 비참한 결과만을 만드는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창 35:2a, 7 [2a]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엘벧엘은 하나님의 집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우상숭배로 인한 비참한 상황을 겪고서야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집에 돌아와 하나님만을 예배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야곱을 진정한 이스라엘로 여겨주셨습니다.
창 35:10a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결국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된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상숭배의 비참함 속에 있던 자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불러 주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엘리야 앞에 가까이 나아와 있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백성들 또한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3년 반의 가뭄이라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이 가뭄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만을 예배하지 않고 여전히 우상을 버리지 못해 일어난 디나 사건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우상숭배로 인한 가뭄의 비참함으로부터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기 위해 엘리야를 통해 열두 개의 돌로 제단을 쌓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야곱의 때와 마찬가지로 이 백성들의 힘과 의지가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엘리야가 독특한 행동을 한 가지 더 합니다.
[32b]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3b]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두 세아는 넉넉잡아 20리터 물통의 양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정도 물에 젖은 제단과 제물은 하나님의 기적 같은 능력이 아니면 불이 붙질 못합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의 비참한 자리에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힘, 능력,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러주실 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네 통의 물을 세 번 부은 것입니다. 4곱하기 3, 12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온전히 통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숫자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말씀은 바로 저희의 이야기입니다. 저희는 종종 저희가 아직 내려놓지 못한 우상숭배로 인해 비참한 삶을 경험하는 야곱이자, 엘리야 앞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나에게 우상이 있다고 누군가 지적하면 강력하게 반발하고 그 대상을 미워하고 하나님 앞에 먼저 나아와 그 우상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교만하고 강퍅한 것이죠.
이런 우상숭배는 지금 당장에는 나에게 물질로, 힘으로, 명예로 유익이 되는 것 같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관계와 상황을 너무나 비참하고 냉랭하게 만들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육신을 입혀 저희 가까이 보내셨고, 가까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육신으로만 가까이 오신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오셨죠
요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예수님의 영, 성령으로 저희 안에 거하시고, 저희도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관계에서는 이처럼 가까워질 수 없는 가까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가까이 하시는 이유가 저희의 온전함을 이루시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온전하게 된다는게 무엇인가요?
요 4:23a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영과 진리,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저희 안에 거하시는 때가 되면 우상이 제거되는 온전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 하나님만의 온전한 예배자, 참된 예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강퍅하고 교만한 저희가 그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누가 저희를 예배당에 힘으로 끌고 가서도 아니고, 내 힘으로 열심을 부려서도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으로 저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한다고 하지만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충분히 베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능력으로 저희를 지금도 참된 예배의 자리로 불러주고 계십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은혜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 우상숭배의 비참함으로부터 회복하시는 기적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하는 성도를 어떻게 회복시키시나요?
2.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회복시키십니다.(35-40)
제단을 모두 수축하고 물로 충분히 적신 엘리야는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백성들을 예배의 자리로 부른 엘리야는 이제 백성들이 이 예배를 통해 우상숭배에서 돌이키게 해주시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도록 제단에 불을 내려주시길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불로 드리는 예배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우상숭배를 하던 백성들을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누가복음 12장에 그 답이 있습니다.
눅 12:49a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예수님께서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상황과 비슷하죠? 그렇다면 이 불은 어떤 불인가요?
눅 12:50a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바로 성령의 불 세례, 성령을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성령의 불을 왜 이 땅에 던지시려는 것일까요?
눅 12: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여기서 분쟁은 칼이나 총, 주먹, 심지어는 말로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 뒤에 나오는 가족들간에 분쟁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보며 시어머니가 교회 못나가게 할 때 싸워서라도 교회 나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두 아닙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과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욕망과 두려움을 만족시키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자기 도구로 이용하고 버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성령 충만한 자의 마음에는 자연스럽게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직 남아있는 옛 자아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반응하고 싶어하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그 사람을 사랑과 인내로 대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분쟁, 영적 전쟁의 본질입니다.
이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내 자아가 붙들고 있는 옛 사람과 나의 우상을 죽이는 내 안의 영적 전쟁에서 먼저 승리하고 내 안의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런 일이 성도의 삶에 반복될 때 성도는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성경은 이것을 구별되어 거룩하게 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이 성령의 불 세례를 통해 저희의 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씻겨나가는 방법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이라는 우상을 하나님 나라에서 제거하는 영적 전쟁을 위해 성령의 불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중보 기도를 마치자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불을 던져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불을 던지실 것을 모형하는 것이죠. 이 불은 먼저 물을 말려버리고 번제물과 제단을 태워버립니다.
물은 우선적으로 이 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부어졌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과 제단에 이렇게 물을 붓는 경우는 전무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이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못믿고 세상 영향력에 젖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물에 젖은 제물과 제단은 세상 영향력에 완전히 젖어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백성들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이 떨어지자 그 땅의 젖은 흙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두 돌을 적셨던 물이 모두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마른 땅과 흙은 세상의 핍박과 유혹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줍니다. 성령의 불이 세상 권세를 심판해 이스라엘을 우상으로부터 구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또 다른 사실은 젖어버렸던 제물이 태워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 이렇게 하나님께 바쳐질 희생제물이 물에 흠뻑 젖은 일이 전무하지만 후무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일입니다.
이 때에도 예수님께서 물에 흠뻑 젖으셨다가 다시 올라오셨고 그 때 비둘기 같이 성령이 내려왔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불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희생제물 되실 예수님을 모형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갈멜산에 떨어진 성령의 불은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상 권세를 심판해 백성들을 세상과 거룩히 구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제물로 태우심으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저희도 이렇게 저희에게 성령의 불을 내려주시길 노래하고, 성령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하면 뭔가 내가 능력이 대단해져서 병에도 잘 안걸리고 안좋은 일도 잘 안생기고 일들이 척척 다 잘풀리고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불은 하나님의 세상 권세를 심판하는 강력한 진노의 불이고 저희에게도 떨어졌어야 했는데 저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님께 떨어진 불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진노의 불을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희에게 그 성령의 불이 떨어지면 저희가 그토록 사랑하고 놓지 못하는 우상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대신해 불태움 받으신 예수님의 은혜가 다시금 생생하게 기억나고 감동하게 되어 불 같이 타는 마음으로 하나님만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39절입니다.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하나님 나라인 저희에게 파고들어 기생하고 있던 우상들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믿고 우상숭배로부터 회개를 하고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내 안에 자리잡은 세상 영향과 우상이 드러나고 건드려지는 것이 너무나 싫은 영역이 있지 않으신가요? 애써 합리화하며 부인하고 남의 탓만을 하고있는 삶의 모습이 있지 않으신가요?
그래서 참된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지 못하고 예배의 자리에서도 성령의 메마름으로 피상적인 예배를 드리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하지만 바로 그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의 능력으로 예배의 자리로 불러주시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우상숭배로부터 회복시켜주시고자 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불러주시는 예배의 자리에서 성령 충만함으로 나의 우상숭배를 인정하고 회개함으로 우상숭배로부터 회복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