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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하나님께서 받고 싶으신 선물, 영적 예배

    성탄예배

    롬 12:1-21

    2020년 12월 20일 주일예배 설교문

    지난 주에 제 딸 하임이가 빨간색 옷과 양말을 맞춰 입고 이모랑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저는 하임이에게 크리스마스가 뭐하는 날이길래 그렇게 옷도 맞춰입고 파티도 하느냐고 물었고, 하임이는 목사님이 그것도 모르냐며 예수님의 생일이라고 말해줬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생일이면 생일 선물은 준비 했냐고 물어봤습니다. 자기 생일에 생일 선물 받고 싶어하면서  예수님 생일에도 자기가 선물을 받으려고만 하고 맛있는거 먹고 놀이만 하면 예수님이 슬퍼하시지 않을까 하구요. 그러면서 예수님은 생일에 어떤 선물을 받고 싶어하실까?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하임이가 잠깐 생각하더니 동생하고 싸우지 않는거?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맞다고 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임이가 그런데 이건 내가 못하는거라서 선물로 드릴 수가 없잖아! 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도 맞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거야? 라고 하임이가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죄인이라 그걸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먼저 선물로 주셨으니까 예수님께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못할 때에는 회개의 기도를 하면 되잖아. 예수님은 우리의 그런 모습도 선물로 받으실꺼야'라고 답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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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하임이와의 짧은 대화를 하면서 초등부 성탄 설교로 이 내용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성탄절에 선물을 받고만 싶어하는 아이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오늘 이 성탄 예배를 인도하게 되면서 같은 본문을 하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모든 것을 주시기만 하실 것 같은 하나님께서 정말 성탄절에 선물을 받고 싶어 하실까요? 오늘 본문의 1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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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a]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

    여기서 '그러므로'는 12장의 앞부분인 1장부터 11장까지의 모든 말씀을 받는 접속사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의 핵심은 5장 17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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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바로 이방인이자 죄인인 저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은혜의 선물을 넘치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그렇게 은혜를 선물로 받은 성도들이 '그러므로' 어떤 삶을 하나님께 선물로 [드려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무엇을 선물로 드려야 할까요? 1절 하반절입니다.

     

    [1b]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로 저희를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여기서 '드린다'는 표현의 헬라어 원어는 제사 제물을 드릴 때 사용되는 단어인데요, 하나님께 선물을 드릴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마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영어 성경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Gifts, 선물로 드렸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의 이 선물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며, 그 죽음을 통해 왕 같은 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을 찬양하는 선물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저희로부터 영적 예배라는 선물을 받고자 하시는데요, 그 선물을 드릴 수 있도록 먼저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다는 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님을 통해 마음이 새로워져 변화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받게 된다면 앞으로 바울 사도가 권면하는 삶의 예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서  영적 예배를 선물로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고 싶어하시는 선물인 영적 예배란 무엇일까요?

     

    1. 겸손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3-8)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여기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은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보다 자기 자신을 더 높게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다음 구절에 이유가 나와있습니다.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입니다. 하지만 그 한 몸은 다양한 믿음의 분량과 은사를 가진 성도들의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성도들에게 다양한 믿음의 분량과 은사를 주신 이유는 서로 돌보며 교회를 한 몸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고전 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하지만 교회의 성도일지라도 여전히 죄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남이 가진 은사를 부러워 하기도 하고 내가 가진 은사가 더 우월하다며 자랑하기도 하고, 내 믿음이 너보다 크다고 깔보기도 하고 내 믿음이 약하다고 지레 움츠러 들어 교회를 멀리 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것이 교만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다른 성도와 비교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자신에게 은혜로 주어진 은사에 감사하며 섬기는데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섬기는 은사를 받은 자는 섬김으로,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는 가르침으로, 위로하는 은사를 받은 자는 위로하는 일로. 각자 다 다른 은사들을 주셔서 각자 잘하는 것이 다 다르니 주어진 은사를 따라 지체를 섬기면 됩니다. 하지만 교만은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은사들을 깔보게 만들고, 부러워하게 만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8b]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바울 사도는 성실함으로, 부지런함으로, 즐거움으로 은사를 사용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말고 각각의 은사에 집중하라고 하던 바울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교만은 신기하게도 다른 지체를 하찮게 보게 만들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최선을 다해 은사를 사용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내 믿음이 좋다, 내 은사가 최고다, 나 보다 잘난 사람은 없다라는 교만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다른 지체를 향해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그리고 즐겁게 은사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교만으로 말미암는 영적 태도를 게으르다고 말합니다.

     

    잠 26:16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놀랍게도 게으른 사람은 마음의 중심이 교만합니다. 사람을 많이 만나보신 어르신들은 이것을 경험적으로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함으로 게으른 자에게는 이런 결과가 주어집니다.

     

    잠 21:25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성경은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을 게으르다고 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안하고 세상 것을 열심히 쫒는 것을 게으르다고 합니다. 이렇게 게으름은 지체를 섬기는 하나님의 일을 싫어하게 만들고 세상의 즐거움, 쾌락, 혹은 자기를 높이는 자만을 쫓게 만듭니다. 결국 교만은 서로 믿음과 은사를 비교하고 비판하게 만들고, 은사로 섬기는 일에 게으르게 만듭니다. 이런 모습은 교회가 분열되고 깨지기 전에 나타나는 전조 증상입니다. 그래서 분열되는 교회는 나만 잘났고 너는 못났다라고 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추종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편을 갈라 서로를 욕해대다가 쪼개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갖춰야할 다양성과 하나됨이라는 모순된 가치를 함께 추구하기 위해서는 교만한 영적 태도를 버리고 겸손함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과 은사 모두 하나님께서 먼저 선물로 주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잘해서, 나만 잘나서 그 은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하나님 앞에 똑같은 죄인이고, 똑같은 자녀입니다.

     

    두 번째로는 교회 안에 믿음의 분량과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다른 믿음의 분량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서로 다른 지체를 비난하고 깔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다양성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 번째로는 그렇게 다른 믿음과 은사를 주신 이유는 한 몸으로 서로 세워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모두의 믿음이 똑같고, 모두가 모든 은사를 갖고 있다면 서로 도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다 다르고, 은사가 다 다르다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돌보고 도움을 주고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태도를 성경은 '겸손'이라고 하고 이런 과정을 함께 겪어가는 살아있는 교회를 '한 몸'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유기적인 과정을 겸손함으로 겪는 것을 영적 예배를 드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교회의 그런 모습을 선물로 받고 싶으신 것이고, 그런 모습이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때 교회는 그 겸손의 자리에서 높임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은 온 만물 앞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서로 섬기는 일은 우리 힘으로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 구약 성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로부터 증명 되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먼저 선물로 주시고, 믿음과 은사들도 함께 주셨다고 운을 떼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께서는 먼저 은혜와 믿음과 은사를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겸손함으로, 각자 받으신 믿음과 은사대로 교회를 섬기는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선물로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받고 싶으신 영적 예배란 무엇일까요?

    2. 사랑함으로 화목한 것입니다.(9-21)

     

    [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것은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할 때 다른 유익을 얻기 위해 가식적이거나 이기적인 악을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로 뒤에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부연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악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사랑을 한다고 할지라도 악한 의도나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것은 진실성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저희는 예수님을 통해 진실성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 먼저 받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예수님을 거짓의 반대인 진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육화된 진리입니다. [그 누가]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으시고 죽으시는 방법을 통해 이 배은망덕한 죄인들을 [살릴 것]이라고 예상했을까요? [거기서 저희]는 저희를 향한 하나님의 [진실된] 사랑을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로써 저희는 형제를 진실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데요, 이 사랑 역시도 섬김과 마찬가지로 겸손의 태도를 필요로 합니다.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남을 높게 보고 나를 낮게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낮은데 처하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진실된 사랑을 하라고 권면한 바울은 왜 계속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바로 남보다 낮아진 자리에 서야지만 남의 육적 필요와 영적 필요를 먼저 발견해 함께하는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내가 남보다 잘났다고 교만한 자는 절대로 상대방을 공감할 수 없습니다. 아니, 공감을 할 생각조차도 하지 않죠.  교만한 사람의 관심은 남에게 있지 않고 나에게 있기 때문이고, 남에게 관심이 가는 때는 남의 약점을 발견해 비판하고 조롱할 때 뿐입니다. 남보다 낮은 자리에서 남을 지켜보고 기도하는 자만이 상대방이 어떤 일에 즐거워하고 있고, 어떤 일에 울고 있는지, 무엇이 지금 필요한지 관심 갖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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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어린 시절부터 착한 아이로 살아왔고, 사람들에게 언제나 잘 해줬기 때문에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해도 사랑할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교만인 것이죠. 그런데 20대 중반에 신앙을 갖고 난 후부터 이런 저의 착한 모습이 어른들에게 칭찬 받기 위한 착한 아이 컴플렉스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저를 붙들고 있던 착한아이 컴플렉스를 걷어내기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걷어진 빈 공간에 참된 사랑을이 채워지길 구하질 않는 실수를 했습니다. 결국 30대 중후반이 되던 최근에 와서야 저는 기본적인 성격의 힘으로 겉으로는 사람들과 부딪힘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지만 내 마음 안에서 진실된 마음으로 상대방을 사랑하지 못하는구나를 인식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목회자인 저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며 기쁜 일, 슬픈 일을 함께 나누고, 웃고 울며 지내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 3년 전부터 그것이 저의 1순위 기도제목이 됐습니다. 겉으로만 친한게 아니라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될 수 있기를요. 그런데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다보니 사랑은 은사처럼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맺히는 성령의 열매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진실된 사랑을 얼마나 깊이 알고 믿느냐에 따라 그 진실된 사랑은 내가 뚜껑을 꾹꾹 눌러 닫는다고 해서 넘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웃을 사랑하게 해달라는 저의 기도는 예수님을 더 잘 믿게 해달라는 기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님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제 안에 여전히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만족하고 다른 것들을 의존하는 교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교만으로부터 예수님만을 의존하는 겸손의 자리로 내려와야지만 낮은 자리에서 이웃의 필요를 돌보며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에 멈추지 않게 하십니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되로 받으면 말로 받아치고 싶고, 그러질 못하면 울분이 터져 주변의 약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나랑 잘 맞는 사람끼리만 친하면 됐고,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과만 화목하면 됐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불가능한 일 아닌가요? 가능하다면 벌써 했겠죠. 그런데 더 강한 요구도 하십니다.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머리에 숯불을 쌓는다는 것은 당시 문화적 배경 안에서 집안 아궁이의 불이 꺼진 사람이 숯불을 머리에 이고 갈 수 있도록 머리에 올려주는 선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당장 원수가 나를 죽일듯이해서 내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프고, 사실 바울 당시의 원수들은 마음만 찢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불에 태워 죽이고, 사자에 찢어 죽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원수에게 선을 베풀어 원수와도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결과를 저희에게 억지로 선물로 받으시고자 하시는 분이 아십니다.  먼저 예수님을 통해 주신 진실된 사랑은 배은망덕해 원수된 저희와 하나님의 관계를 사랑으로 화목하게 해주셨고, 그 은혜의 능력은 다시금 우리가 원수마져도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은혜의 능력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하나님께서 먼저 예수님을 통해 진실된 사랑으로 우리와 화목케 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 형제들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원수와 교회의 원수된 세상과도 화목케 되는 영적 예배를 선물로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잊지못할 큰 도움을 베풀어주신 분을 뵈러 갈 때 보통 드릴 선물을 고릅니다. 어떤 선물을 좋아하실까? 홍삼이 몸에 잘 맞으신데. 요즘 나오는 홍삼 중에 제일 좋은게 뭐야? 쇼핑백은좀 그렇고 어르신이니까 보자기에 싸갈까? 요즘 코로나로 어려우신거 같은데 우리 재정이 가능하다면 10만원 정도 용돈 넣어드리는건 어떨까? 힘들면 가족분들 드시라고 과일 한 박스도 괜찮고. 그렇게 양 손 가득 선물을 들고 방문하는게 일반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수되길 자처하는 저희에게 참된 생명인 예수님을 먼저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하나님께서 받고 싶어 하시는 선물을 두 손 가득 들고 가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받은게 내 삶에 그리 큰 도움이 안되서 선물 드리는 것도 별로인가요? 게다가 받고 싶으신 선물이 무엇이냐고 여쭤봤을 때 하나님은 '너희에게 좋은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야'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삶이 곧 저희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2020년 성탄절, 우리에게 이미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매일같이 겸손함으로 교회를 섬기고, 사랑으로 원수와 세상과도 화목해지는 선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