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혹은 자식에 대해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비현실적인 기대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 기대대로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특히 이런 기대감은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어떤 다른 나라 사람보다 높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자신과 자식에 대해 높은 비현실적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지난 수십 년간 전쟁과 경제 성장 등 너무나 큰 변화를 겪으며 갑자기 부자가 되거나 성공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한국의 체면문화 때문입니다. 체면은 ‘사람들 눈에 보이는 나’가 중요하고 특히 남들 눈에 창피하지 않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래서 옷을 입고, 물건을 사는 사소하고 큰 모든 일에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결정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성공’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평가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성공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기준인 중산층의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30평 이상의 자기 소유의 아파트, 월급 월 500만원 이상, 중형 이상의 자동차, 1억원 이상의 현금이나 예금, 연 1회 이상의 해외여행. 위 조건들은 다 물질적 가치, 남들이 평가할 수 있는 수치입니다.
다른 예로, 프랑스 사람들의 성공의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개 이상의 외국어, 스포츠, 악기, 자신만의 요리, 사회적 문제에 대해 분노하거나 공감할 지성, 약자를 돕는 봉사 활동. 어떠신가요?
저도 개인적으로 한국의 평가기준으로 보면 수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만 프랑스의 기준이라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 기준을 만족시켰다고 해서 수치가 평생 전혀 없고 영광만 있는 삶을 살게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수치와 참된 영광을 가르치고 있는데 성도들도 세상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가진다고 영광스러워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수치를 벗어나 영광을 얻을 수 있나요?
영광을 얻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광을 얻기 위한 방법은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31절 말씀입니다.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예수님은 바로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발을 씻어주신 뒤 ‘내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영광이라면 사람들이 경탄할 만한 놀라운 일을 하셨어야 하지 않나요? 발을 씻기신 것이 영광을 받았다니요? 바로 이것이 우리와 예수님의 깊은 차이입니다. 먼저 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 기준의 영광은 멋진 것, 아름다운 것, 성공한 것이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영광은 인간은 보여줄 수 없는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이 진짜 누구신지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부터 하나님이 영광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장 3절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
영광은 한 본질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힘이 다 드러나는 것이 영광입니다. 눈으로 볼 때는 예수님이 초라하셨지만 그 분 안에는 하나님의 모습이 다 담겨 있었으며, 또한 예수님이 사랑하실 때 인간은 보일 수 없는 하나님이 사랑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것은 영광스러운 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입니다.
요일 4:16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이다’라는 표현은 성경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지만 ‘하나님은 공의이다’라는 표현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과 동일시한 속성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만이 하나님의 본질이시며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인간의 사랑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도 모두 조건적이고 한시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모습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시면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모습을 닮았나요? 창조할 수 있는 능력? 시공간을 다스리는 능력? 아닙니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란 바로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죄와 관계없이 관계적 존재로 만드셔서 관계 안에서 충만함과 행복을 누리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처럼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바로 아담이 하와를 보았을 때의 반응에 있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내 존재 가운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그 존재가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 아니어도 그 존재를 최고로 높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있어야만 남편은 아내를 죽기까지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을 잃어버리고 상대를 이용해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이 죄입니다. 관계적 존재로 만들어진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자 무엇이 찾아왔나요? 창세기 3장 7절입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지 하나님의 영광도 떠나버렸습니다. 하나님이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그 자체가 영광스러웠습니다. 자신을 치장할 필요가 없이 본질 자체가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가면 입고 싶은 옷을 각자 고르지 않고 모두 세마포 흰 옷을 입습니다. 우리에게서 영광이 뿜어져 나올 것이며 흰 옷 만이, 그 영광을 가리지 않고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무화과 이파리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가리려는 영적 수치감에 시달렸습니다. 지금도 학벌, 외모, 화장, 돈, 성공으로 자신의 영광을 뽐내려고 합니다. 얼마나 성공해야 진정한 성공일까요? 일류 대학을 가도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많고, 넓은 집에 살아도 나보다 넓은 집에 사는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낙심하고 좌절할 일이 많은가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짜 영광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의 기준으로는 별 볼 일 없는 분이셨습니다. 출생도, 삶의 환경도, 외모도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보내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가를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을 세상적으로 영광스럽지 않는 모습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예수님이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도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이 보여주어 인간이 원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지어졌음을 세상에 보여주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십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영광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지만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기란 당연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집중할 일은 다른 기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영광스럽다고 하신 것, 예수님의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하나님이 ‘넌 영광스러운 존재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우리 안에 커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33절입니다.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예수님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군병들에게 잡혀 가시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유언처럼 남기고 싶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으니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영광스럽게 살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담아 제자들을 ‘작은 자들아’라고 부르십니다. 한글 번역에는 묻어나지 않지만 이것은 엄마가 ‘얘기야’라고 부르는 헬라어 ‘테크노’입니다. 제자들을 아기처럼 바라보시며 사랑을 담아, ‘인간이 가장 영광스러울 수 있는 비밀을 너희에게 가르쳐주겠다’고 말씀하시며 34절의 계명을 주십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내려가서 사랑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상대를 높이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누구만 할 수 있나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떠난 다음에 이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죄인은 이 이기적 사랑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연인 간에도, 부모의 사랑도, 그 어떤 세상의 사랑도 다 퇴색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자에게 이 이기적 사랑을 뚫고 참 사랑을 증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랑이 나타날 때 우리는 영광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1등 했다고, 성공했다고 영광이 아닙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게 성령의 힘으로 문득 사랑을 보일 때, 그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을 제자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다시 보겠습니다.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이렇듯 최고의 존재로 높인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식을 최고의 존재로 높이고, 교회에서 서로를 조건 없이 최고로 높이고, 일터에서 동료들을 최고로 높이는 것, 이것이 영광입니다.
이런 영광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아무리 명품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포장해도 그것은 수치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받아들여야 우리도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수치스러운 모습에서 벗어나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나요. 39절입니다.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스승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존재가 제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날 때 예수님도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또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심으로 가장 멋진 영광을 얻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