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우리는 ‘만일’이라는 가정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그 일을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하며 과거의 사건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상상해볼 때가 있습니다.
이런 ‘만일’을 전제로 만들어진 영화들도 있습니다. ‘만일 히틀러가 전쟁에서 이겼더라면’이라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미국이 독일의 식민지가 된 상황을 그린 영화도 있습니다. 끔찍한 가정이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인간에게 더욱 끔찍한 가정은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입니다. 이를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1. 슬픔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v.11
첫 번째로 슬픔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아주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 중 상당 부분은 사랑하는 대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녀를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 평생 함께한 배우자를 떠나보내는 마음, 그 슬픔과 고통을 본문의 마리아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슬픔은 사실 믿음이 없어서 벌어진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전부터 여러 번 제자들에게 앞으로 될 일을 예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22절 말씀을 보시면
눅 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미리 말씀을 하셨고, 말씀대로 일이 벌어졌는데 왜 제자들과 마리아는 슬픔과 고통에 사로잡혔나요? 사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해도, 내 생각의 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라면 듣고 다 잊어버립니다. 어떤 일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실제 상황이 일어나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이전에 들었던 얘기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눈앞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들의 손으로 장사를 지냈습니다. 시체는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상식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픔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 영원한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슬픔을 가져오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 땅의 유한함과 이 땅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부활에 대한 소망은 이 땅의 고난을 이겨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살다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일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면 마음이 찢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 땅에서는 누군가는 먼저, 누군가는 나중에 갈 수도 있지만, 우리가 영원히 슬프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집착하고, 욕심내고, 욕망을 이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이 전부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주어질 것이고, 그 증거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강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 15장 17절과 18절에서 바울은 또한 이렇게 얘기합니다.
고전 15:17-18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분명 기독교의 본질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십자가 되게 만드는 그 중요성은 십자가 이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해결하고 죽으셨는데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바울의 고백대로 믿음도 헛되고 소망도 불확실할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이 믿음이 있었다면 깊은 슬픔 가운데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여자들이 먼저 왔다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달려가 알렸지만 제자들은 빈 무덤을 본 다음에 다시 가버렸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만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는 이유, 다른 사람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마가복음 16장 9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막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베드로는 원래 고기 잡는 직업도 있었고 열심도 특심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세례 요한을 따라다니며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를 열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다릅니다. 여기서 일곱 귀신이란 귀신이 일곱 마리라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완벽하게 사로잡힌 상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상태,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절망 가운데 빠진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마리아는 비로소 살게 된 것입니다. 영적 어두움에 깊이 사로잡힌 사람, 매일죽음을 생각하고, 아니 스스로 죽을 수도 없어서 귀신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야 했던 고통에 빠진 이에게 예수님은 완전한 구원이며 완전한 은혜였을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성경이 그저 옛날에 귀신에 사로잡혔던 한 미친 여자 이야기를 쓴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에는 신기하게 여자 이름들이 대부분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이 마리아들은 바로 우리들을 대변하는 존재입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마라'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마라’는 ‘쓴, 고통스러운’이란 뜻입니다. 광야에서 아주 쓴 샘물을 만났을 때 그것을 ‘마라의 샘물’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 둘을 잃어버리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누구보다 큰 고통과 아픔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가 구약에서 ‘미리암’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고 그것을 헬라어로 바꾼 이름이 마리아입니다. 성경은 왜 이 이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죄가 가져온 인생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입니다.
인생을 살며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으신가요. 겉으로 문제가 없다고 자랑하는 사람일수록 내면으로 더 깊은 고통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괜찮은 것처럼 행세하지만 인간이라는 본질 자체가 고통이 가져온 슬픔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들렸다고 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신이 이상한 자들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귀신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이유는, 예수님 없이는 마귀의 지배 아래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상태를 보여주시며, 예수님만이 마귀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가 되심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귀신 들림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를 반대하고, 성도를 핍박하며, 자기가 맞다고 우기는 아집 또한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권세와 예수의 빛을 거부하는 귀신 들림입니다. 돈을 사랑해서 돈 때문에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는 자들도 단순히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닌 영적 사로잡힘입니다. 게임 중독에 빠져 밥도, 학교도, 친구도, 가족도 거부하고 종일 게임을 하는 아이들도 습관성 중독에 빠진 게 아니라 영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로잡힌 상태들을 성경은 귀신 들림이라는 형태로 보여주며, 예수님만이 이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심을 보여주심으로서 예수를 만나야 해결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모두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어떤 마리아만 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예수님을 찾을까요? 예수만이 자기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깊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해결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예수를 만났기에, 예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마다 은혜를 갈구하며 엎드리는 자입니다. 이 부활절에 예수님만이 여러분을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음을 믿음으로 예수를 찬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2. 영적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vv.12-16
두 번째로 만일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적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12절과 13절 말씀입니다.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천사라고 하면 우리는 날개를 퍼덕이며 빛이 나는 존재를 떠올리고, 또한 여섯 날개로 얼굴과 발을 가리고 나는 천사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성경에서 사람에게 찾아오는 천사는 대부분 사람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의 모습을 했더라도, 이 땅에는 존재하지는 존재가 말을 건다면 알아봤어야 하지 않나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눈이 어두워진 상태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14절입니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님이 없어졌다고 울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기뻐해야 하는데 못 알아봅니다. 인간의 영적 어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찾아오십니다. 천사를 보내셨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여정 동안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많이 미쳤을까요.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그분의 도움으로 회복된 경우도 있겠고, 모르는 사람에게서 들은 한 마디 말로 전환점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겠고, 우연히 알게 된 정보로 길이 바뀌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개입과 은혜입니다.
우리의 육적인 시력은 선명합니다. 어디에 투자를 할지, 몸에 좋은 건강식품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할 말도 많고 눈이 밝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도 우리의 영적인 시력은 고도근시쯤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도 그분이 예수님인지 알아볼 수 없는 게 영적 어둠의 상태입니다. 마리아는 심지어 어떻게 착각합니까? 15절입니다.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대화를 하고도 동산 지기로 착각합니다. 왜 하필 ‘동산지기’로 착각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을까요? 구약의 다른 동산을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구약에도 동산 하나가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었죠.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으로 인해 결국 눈이 어두워졌고 그들이 바로 우리들이 조상입니다.
어떤 동산에, 동산지기인 것처럼 보이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대화를 나누는 상황을 지금 예수님과 마리아가 재연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5절입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의 유혹에 남자가 열매를 먹었더니. 3장 7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어떤 눈이 밝아졌는가 하니, 육적 눈이 밝아지고 영적 눈은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육적인 것만 보게 되니까 수치스러워졌습니다. 원래 이들은 영적 기준으로 살던 존재였습니다. 내 육체에 무엇을 걸쳤는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는 의미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고 살던 존재였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치입니다.
육신은 흙이라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시체는 값어치가 없을 뿐 아니라 냉동시키거나 화장을 해서 상하지 않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흙에다 하늘의 영광인 생명을 불어넣으셔서 인간이 하나님의 가치처럼 높아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는 영광이 사라져버리자 인간이 육신의 부끄러운 본질만 보게 되는 수치스러운 상태가 된 것입니다.
영적 눈이 어두울수록 우리는 육신만 보게 됩니다. 그러니 육신에 금칠을 하고 싶어 합니다. 가지면 자랑하고, 가지지 못하면 비교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눈이 어두워진 자들은 어떻게 눈을 뜨게 되나요? 누가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는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누가복음 24장 25절부터 27절까지 말씀입니다.
눅 24:25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두 제자가 예수님과 대화하면서도 예수님이 알지 못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성경을 이야기 해 주십니다. 이것이 눈을 뜨는 과정입니다. 성경전체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이야기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한 잘난 사람, 한 못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모든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셔서 눈을 뜨게 하시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5장 30과 31절에서
눅 25:30-31a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a]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실 때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활하신 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계시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죽음을 이긴 놀라운 생명을 약속하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다면, 여러분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록되진 않았지만 마리아의 눈도 예수님이 뜨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이전에는 누구를 찾냐고 거리감 있는 것처럼 얘기하셔서 동산지기라고 착각했는데 이제는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가 그 음성을 듣고 예수님임을 알아챕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본 사람만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은 얼마나 지치고 고통스러운가요. 얼마나 허무한 거예요.
그러나 영적인 눈을 뜬다면 죽음도 사실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넓은 품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영원히 거할 곳을 마련하시고 우리를 맞으시는 그 분을 만날 기쁨의 날이 가까워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도 그가 우리 아버지와 함께 있는 곳에 내가 곧 간다는 믿음으로 슬픔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도록, 믿음을 발휘해 주어진 인생만큼을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인생이 긴 것 같지만 정말 짧습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다가 저녁이 되어 한 명 한 명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소리를 듣고 집으로 달려가듯, 때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 이름을 차례로 부르실 것입니다. 아무리 큰 모래 집을 지으며 놀았어도 버리고 달려가면 됩니다. 해가 지는데도 날 불러주는 사람과 집이 없다면 얼마나 슬플까요? 그러나 우리에겐 집이 있고 아버지가 계십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부르실 때, 흙모래집 미련 없이 버리고, 기쁘게 가면 됩니다. 그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눈을 떠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3.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vv.17-18
마지막으로 만일에 예수님이 벌어지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17절 상반절을 말씀을 보시면
[17a]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마리아가 너무 감격해서 예수님에게 달려들어서 잡으려고 했는데, 예수님의 대답이 의아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내가 떠나지 못하도록 매달려 있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들은 그 뉘앙스를 살려 Do not hold on to me!라고 번역하거나 Don’t cling to me!라고 번역합니다. 즉 나에게 매달려 있지 말라는 의미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이 또 사라지실까봐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신 이유가 17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17b]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예수님은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셔서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셔야 합니다. 이 땅에서 계실 때의 수준으로가 아니라, 온 세상을 통치하신 분으로서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이 새로운 관계를 배워야 하기 때문에 예전 것을 붙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것은 인간처럼 되셔서 죄를 해결하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온 세상의 창조주요 통치자로 군림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누가 계시나요? 히브리서12장 2절을 보시면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의 주’는 시작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시작도 완성자도 예수님이시기에 그분만을 믿으면 그분이 믿음을 완성해 주실 거라는 약속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는 세상에게 비난받고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십자가에 달리는 분이 아니라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을 만한 분’이라고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도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17절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17c]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예수님이 죄를 해결하여 부활하시기 전에 인간은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는 어쩌면 왕과 신하의 관계, 주인과 종,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불과했었지만 이제 모든 게 해결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나셨다는 것은 죄가 완전히 해결되어 우리가 더 이상 죄에 매이지 않았다는 증거이기에,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처음 만드신 모습대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5절에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유대인 아기가 어려서 아빠를 부르는 단어입니다. ‘지존하시고, 영존하시며, 무소부재하셔서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이라는 수식어로만 하나님께 접근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린아이처럼 실수하고 연약하고 부족해도 나는 너를 안아주고 품어주는 아빠처럼 너희와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한다’고 초대하십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격분한 슬픔 가운데 고통할 것이고, 어두움 가운데 장님처럼 살다 죽었을 것이고, 하나님과 친밀함을 느끼지 못한 채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고, 눈이 열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기에, 이 땅에서 힘들 때마다 그분에게 달려가 ‘아빠, 제가 아빠의 집에 갈 그 날 저를 안아주시고 제 눈물을 닦아주실 날을 소망하며 낙심하지 아니하도록 붙들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 부활의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