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1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3] 왕위에 있은 지 제삼년에 그의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지방의 귀족과 지방관들이 다 왕 앞에 있는지라
[4]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9]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10] 제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므후만과 비스다와 하르보나와 빅다와 아박다와 세달과 가르가스 일곱 사람을 명령하여
[11]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12]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나이가 들수록 '바람 잘 날이 없다'는 속담이 삶을 잘 표현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팍팍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년들이든, 이제 막 아이를 낳은 부부든, 사춘기 자녀를 키우는 부모든, 결혼하거나 결혼하지 않은 30대 40대 자녀를 둔 장년의 세대이든 인생에 문제들이 끊이질 않아서 평안한 날들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냥 성실하게 살아도 그런 삶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죄는 서로간의 삶을 더욱 뒤흔들어 놓아 평안을 깨뜨리게 됩니다.
에스더서는 그런 죄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완전히 파뭍혀 멸망할 위기에 처한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구원을 얻어 참된 평안을 얻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1장에서는 죄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과 그로 인해 참된 평안이 없는 세상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왜 참된 평안이 없나요?
1. 세상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에 1 [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페르시아가 있었던 인도로부터 구스까지는 아주 넓은 지역을 말합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해서 그 넓은 지역을 소유하고, 백이십칠개의 복잡한 행정 시스템으로 다스리고 있다는 말은 페르시아와 아하수에로 왕이 위대하고 영광스럽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왕은 자기의 그런 영광스러움을 자랑하고 싶어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3] 왕위에 있은 지 제삼년에 그의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4]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영화롭다는 것이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신하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지만 사실 내가 다스리는 나라가 얼마나 크고, 돈이 많고, 대단한 일들을 행했고, 지금도 행하고 있는지를 기념하고 자랑하기 위해 잔치를 연 것입니다. 그래야 그 많은 신하들이 자신을 위대하게 여겨서 복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신하들에게만 잔치를 베푼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베풀어줬습니다.
[5] ...왕이 또 도성 수산에 있는 귀천간의 백성을 위하여 왕궁 후원 뜰에서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새 [6]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 [7] 금 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호화롭게 인테리어 된 왕궁에서 최고급 술이 여러가지 모양의 금 잔에 무한리필로 제공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금 잔이 여러가지 모양이라는 것은요, 그걸 가져온 여러 나라의 왕궁과 신전을 정복해서 내 권세 아래 있다는겁니다. 다 자랑이죠. 그런데 여기서 이 잔치를 위해 특별히 술을 마시는 법을 만들었다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8] 마시는 것도 법도가 있어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이는 왕이 모든 궁내 관리에게 명령하여 각 사람이 마음대로 하게 함이더라
법은요, 사람들이 마음대로 하면 갈등이 생기니까 그걸 예방하고 해결하기 위해 제한선을 그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대로 하라는 법 같지 않은 법을 왜 만들었을까요? 이것은 자기가 얼마나 관대한지 자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페르시아가 초기에는 정복한 민족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폈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시기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과 성벽까지 재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페르시아와 최후의 결전을 치루는 스파르타라는 나라의 마지막 남은 300명의 용사들이 싸우는 영화가 있는데요, 거기에 이 아하수에로 왕이 등장해서 '나는 관대하다'라고 했던 대사가 유행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관대하면서 127개 행정구역을 질서 있게 다스리고, 이런 거대한 잔치가 착착 진행되려면 강한 통제력이 있어야 하거든요. 결국 백성들을 위한 잔치 역시도 다 자기 권세를 자랑해서 온 백성들이 자기 앞에 더 납작 엎드리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왕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직도 더 있었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예쁜 왕비였습니다. 그래서 술기운이 올라 오니까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10] 제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일곱 사람을 명령하여 [11]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그런데 왜 왕비 한 명을 부르는데 내시 일곱명에게 명령을 할까요? 예쁜 왕비 잠깐 자랑하는데 많은 인력, 물품, 돈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왕은 왕후의 관을 씌워 오라고 명령 했는데요, 그것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왕후로서의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왕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술에 취해서 여태 자랑하던 술잔 같은 쇳덩이나 대리석 돌맹이 같은 물건과 왕후가 다를 바가 없는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디테일한 모습 하나하나가 모두 왕이 자기 영광을 추구 하고 자랑하며 남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엄청난 돈, 시간,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고, 모든 주변 사람들을 그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 왕후가요, 이렇게나 자기 영광을 추구하며 남을 복종시키려는 왕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12]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왕후는 왜 그랬을까요? 여러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지만 본문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9]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이 왕후도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영역 안에서 왕과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 영광을 추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 미모와, 왕이 준 고급 왕관과, 화려한 옷, 비싸고 구하기 힘든 화장품, 광대한 나라의 이곳 저곳에서 가져온 진귀한 음식들 같은걸 자랑하는 것이죠. 똑같은 세상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며 높이고 싶은 왕후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왕의 노리개 취급을 받고 싶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왕명을 거절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왕이 분노가 불 붙는듯 했다고 하는데요, 왕의 말을 전해 들은 왕후도 분노와 짜증을 냈을 수 있구요, 왕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가까운 하녀들 앞에서 슬퍼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똑같은 사람들끼리 충돌해서 분노가 일면서 서로 평안과 기쁨이 사라졌구요, 아마 두 사람 때문에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평안까지도 모두 깨졌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모두들 왕과 왕후의 기색을 살피면서 몸조심 하느라구요. 결국 나의 평안, 부부간의 평안, 가족의 평안, 교회와 직장의 평안이 깨지며 분노와 우울에 휩싸이는 이유는 죄인들 서로가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중에 상대방을 도구로 사용하고 서로의 존엄성에 상처를 내고, 내 말에 복종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갈등의 중심에 있는 이 영광이란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요즘 영광이라는 말 잘 안쓰잖아요. 요즘 말로 쉽게 표현하면, 중요하고 가치가 있어서 소유하고 싶은 대상이나 어떤 업적을 말합니다. 구약성경 히브리어 원어로 이 영광이 무거워서 가치가 있다는 의미거든요.
100원짜리 한 개는 가치가 없고 중요하지 않아서 땅에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을 때가 있지만, 100원짜리 동전 100만개는 1억원이니까, 무겁고 가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중요하다라는 한자어도 무거울 중, 필요 요가 사용됩니다. 그 대상이 내 인생에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여기니까 소유하고 싶고, 그런 업적을 쌓고 싶어하는 거에요. 그러면 내가 소유하게 된 그 대상이나 업적으로 인해 내가 가치있고 중요하게 여겨지니까 그걸 자랑하면서 기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가치 있는 대상을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영어로 뭐라고 할까요? 워쉽입니다. 그래서 예배자의 삶이란 그 대상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거야, 너무 가치 있어서 나에게 꼭 필요한거야 라고 여기며 추구하는 삶인거에요.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한다고 할 때 추구의 한자어가 뒤따를 추, 구할 구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없다고 해도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관을 뒤따라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배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게 좋고 나쁜지를 판단하는 가치관이 없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렇다면 요즘 사람들은 어떤 것을 가치 있다고 여기며 추구할까요? 수천년 전의 이 왕과 왕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돈과 명예입니다. 그리고 인스타나 페이스북에 올려서 자랑할만한 독특하고 맛있고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먹거리들을 끝임없이 찾아다니고,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남들과는 다른 비싸고 독특한 재료와 소품들로 인테리어된 집이나 카페나 호텔. 그게 오늘 나온 왕궁이죠. 나를 빛나게 해줄 여러가지 모양의 명품 옷과 핸드백. 전자제품과 명품 시계와 자동차. 그리고 그걸 기념하고 자랑할 수 있는 모임이나 sns.
SNS는요 세상의 영광스러운 것을 소유해서 얼마나 기쁜지를 자랑하기 위해 모이는 이 시대의 잔치이자 예배당입니다. 그 자랑을 하려고 모든 돈, 시간, 에너지를 사용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도구화 하는거에요. 아하수에로 왕은 잔치를 6개월 열었는데요, SNS는 밤낮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 이 잔치가 끝나질 않을까요? 온 세상 사람들이 거기 올라오는걸 다 영광스럽다고 여기니까, 지구 한쪽이 밤이 되서 잠들면 반대편에 해가 뜨면 사람들이 또 올리는거에요. 잠도 안자고 올리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나도 그걸 추구하고 누리지 않으면 잘 살지 못하는 것 같고, 똑똑하지 못하다고 생각되고, 앉은 자리에서 거지가 된다고 생각되고 뒤쳐지니까 계속 하다 중독되는거에요. 요즘 미국에선 그 중독이 너무 심해서 고등학생 때까지 스마트폰을 금지하고 문자와 통화만 가능한 휴대전화를 쓰게 해서 인터넷 접속 시기를 늦춰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세상 영광을 추구하면 갈등이 생기고 평안이 깨지나요? 세상이 영광스럽다고 하는 것들은 한정적이라서 그걸 소유하면 내가 높아지고 남보다 나를 특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진 사람이 특별히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특별하지 않은 사람, 그러니까 별 것 아닌 무능력하고 가치 없는 사람이 되버립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걸 더 가지고 누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밟고, 빼앗아야 하고, 밟히고 빼앗긴 사람은 박탈감,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게 심해지면 전쟁을 통해 죽여서라도 뺏으려 하니까 평안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요즘 공부 잘해서 돈 많이 벌고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 좋은 것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느라 서로 밟고 경쟁하고 비교하면서 교만함과 박탈감이 학생과 청년들 세대에 만연해 있다고 합니다. 이 다음세대가 그동안 삶에서 보고 배운바에 의하면 일주일에 하루도 교회에서 시간 보내기가 아깝고, 하루에 몇 분 큐티하고 찬양할 시간이 아까운거에요. 세상이 더 중요하고 가치있다고 여기는 대상에 돈, 시간, 에너지를 써야되기 때문입니다.
그거 다음세대 탓하면 안됩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환경 속에서 자라서 그래요. 윗 세대나 아랫 세대나 똑같은 죄인인데요, 윗 세대가 만들어 놓은 환경과, 어떤 것이 가치 있는 것인지를 선택해나가는 삶의 과정이 보여지는 가운데 더 강력한 영향을 받은거에요. 그리고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자란 아이들이 끼리 또 모여서 증폭이 되구요.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떤 환경과 가치관을 심어주느냐에 따라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그래서 미국도 국가 차원에서 어른들이 아이들 인터넷을 제한하는 환경을 구성해주려는거에요.
그렇다면 저희와 다음 세대가 추구해야 할 참된 영광이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저희가 소유하고 자랑해야 할 진짜 중요하고, 가치 있는 대상과 업적인데요, 바로 하나님과 십자가입니다. 그 존재와 성품, 행하신 일들과 업적들이 희귀하다 못해 이 세상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인데요, 이 평안이 없어서 고통가운데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해서 누구나 추구해야 합니다. 거룩과 은혜, 진리와 사랑, 의로움과 신실함, 온유와 겸손, 구원과 생명, 평안과 기쁨!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런 가치들이 너무나 중요하고 귀해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가치들을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여겨서 그걸 추구하고, 내 인생의 핵심 가치관으로 삼고, 영광스럽게 여기면요, 그것에 진심으로 순종해서 함께 행복을 누리고, 그걸 자랑하고 찬양하게 되는데요, 그걸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참된 영광은 하나님께서 무제한으로 공급해주셔서 이걸 얻기 위해 남을 밟고 빼앗고 경쟁하고 전쟁해서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걸 추구하게 되면 서로를 용납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서로를 특별한 존재라고 노래 불러줍니다. 심지어는 공짜라서 마음대로 나눠줄 수도 있어요. 듣기만 해도 전 재산과, 내 평생이라는 시간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소유하고 싶고, 여러 모임과, SNS에서 자랑하고 기뻐해야 할 것들 아닌가요? 내가 어디서 1등을 하고, 억만금을 벌게됐다고 그걸 영광스럽게 여기며 하나님께 돌리는게 아니라, 인생의 과정 가운데 그런걸 다 잃었어도 하나님을 통해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평안을 얻게 됐다고 자랑하며 그 영광을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영광스러운 가치들을 기준으로 하나님과 이웃과 관계를 맺는다면, 모든 피조물들은 더 이상 갈등과 오해와 상처 없이, 눈물과 피를 흘리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요, 여기서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엄청난 희생을 치루면서까지 소유하고 싶어하시고, 함께하다 못해 하나가 되고 싶어하시는 영광스럽게 여기는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저희, 하나님 백성들입니다. 이 세상 것들이 야~ 정말 좋다~라고 입에 달고 사는 죄인들을 위해 그 귀하고 영광스러운 독생자를 제물로 내놓으면서까지 저희를 소유하셔서, 내 보석 같은 아들이고 내 딸이다라고 세상에 드러내놓고 자랑 하시는거에요. 그래서 계시록에는 저희를 여러가지 귀하고 가치 있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예루살렘 성이라고 표현하시고, 저희를 영원한 혼인 언약 관계 속의 아내로 소유하시려는 것이에요. 그런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과 의지와 열망이라는 영광이 드러난 곳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덕분에 저희는 진짜 영광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영적 눈이 뜨이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 십자가를 기억할 때마다 세상 영광을 추구하던 자리에서 돌이켜 참된 영광을 추구해서 진정 영광스러운 왕과 왕후로 회복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큰 착각을 하게 되는데요, 세상이 영광스럽다고 여기는 것들을 나도 가지고 누리면 나의 잃어버린 인간 존엄성과 밟혀버린 자존심과 상처가 회복되서 분노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슬퍼할 일도 없어져서 평안이 찾아 와 행복해진다고 생각하는거에요. 하지만 오늘 말씀은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께서는 참된 영광이신 하나님만을 소유하셔서 참된 평안을 누리시고, 그 평안을 주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온 세상 앞에서 찬양하고 자랑하시는 참된 왕과 왕후과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에는 왜 참된 평안이 없나요?
2. 세상 지혜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13] 왕이 사례를 아는 현자들에게 묻되... [15] 왕후 와스디가 내시가 전하는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니 규례대로 하면 어떻게 처치할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한 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그래서 왕후를 처단하기 위해 지혜로운 현자들을 불렀습니다. 수치는 영광의 반댓말입니다. 그래서 수치는 가치를 잃고 저급하게 되서 부끄러워지고, 그래서 가리고 싶고, 그 수치스러움을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남에게 떠넘기고 싶은 것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어서 부끄러워 했다는 말은 문자대로 옷을 벗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서로를 바라보니까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져 그 본질이 연약해서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더라도 서로를 용납하고 존중하면서, 마치 영광스러운 옷을 덧입은 것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그 영광의 옷이 벗겨져서 상대를 평가하는 가치관이 세상처럼 저급해지니까 서로의 연약함과 수치를 용납하고 품어주지 못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또 서로를 함부로 대하면서 더욱 수치스러운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더 수치스러워지지 않게 수치를 가리려고 세상 영광을 추구해서 덧입거나 남에게 떠넘기기 위해 특별한 방법들을 찾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비싼 자동차나 시계나 가방 가지고 있으면 함부로 못대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런거에 기대서 '내가 누군데, 날 뭘로 보고?'라는 의식이 생기는거에요. 그래서 요즘은 고급 외제차를 명함이라고 여기고 산다고 해요.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그냥은 안드러나니까, 그걸로 드러내서 거래에 유리하게 하거나, 나의 연약함을 그걸로 가리는거죠.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과 단절되서 어떻게든 수치를 가릴려고 썩어질 풀들로 옷을 지어 입는 방법을 고안했죠. 그걸 가리기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를 총동원 한게 그거에요. 그래서 아하수에로 왕도 수치를 가리기 위해 지혜로운자들을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요, 오늘 말씀에는 이 현자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3] 왕이 사례를 아는 현자들에게 묻되... [14] 그 때에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지방관....
왕의 기색을 살핀다는 것은 눈치를 살살 보면서 왕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방법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자기들도 왕 다음 첫 자리에 앉아서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안그러면 남보다 낮은 자리에서 남보다 영광스러운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자신의 무능력과 연약함을 가리지 못하는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야 되는거에요. 그렇잖아요. 직장에서 한 단계라도 높은 직책이 되면 내가 스스로 책임은 더 질 지언정 누구한테 책잡힐 일은 줄어들죠. 부부간에도 기싸움을 하는 이유가 뭔가요? 기싸움에서 지면 뭘 해도 책잡혀서 잡혀 살아야 되잖아요. 직장에서든 집에서든 사실 똑같은 죄인이라 똑같이 책잡힐 연약함이 있는데, 누가 더 높냐라는 지위로 그걸 무마할 수가 있는거죠.
결국 아하수에로왕이 찾는 지혜와, 이 지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세상의 지혜라는 것은요, 세상의 수준에서 영광스럽다고 여기는 것들을 얻을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 수치가 드러났을 때 그것을 숨기고, 남에게 떠넘겨서 내 영광에 피해를 줄이는 방법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찾는 지혜로운 방법이 어떤 것인지 다음 구절에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16] 므무간이 왕과 지방관 앞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했을 뿐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의 관리들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이 왕후에게 덮어 씌울 잘못을 극대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이 온 백성들에게 한 잘못일까요?
[17] ...왕후의 행위의 소문이 모든 여인들에게 전파되면 그들도 그들의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18] 오늘이라도 바사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의 행위를 듣고 왕의 모든 지방관들에게 그렇게 말하리니 멸시와 분노가 많이 일어나리이다
왕후가 왕을 멸시한게 소문이 나서 나라의 모든 여인들도 남편을 멸시한다는거에요. 왕이 먼저 왕비를 멸시한 것을 바로잡아주지 못하고, 왕이 당한 큰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 그에 걸맞는 온 세상을 싸잡아서 덮개로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돈과 권력이 있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은요? 말도 안되는 어거지를 부려서라도 내 잘못은 모르는척 덮어버리고, 옆에 있는 남편이나 아내, 가족과 동료들한테 떠넘기며 사는 것이죠. 그런데요 이 현자들은 왕이 돈과 권력이 많으니까 국가 단위로 일을 크게 만들어서 왕후에게 완벽히 뒤집어 씌워버리고 나라의 법까지 만들어버립니다.
[19]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결국 자기 때문에 이런 법까지 생긴 왕후는 얼마나 억울하고 수치스럽고 후회됐을까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세상 더럽더라도 그냥 잠깐 복종해서 노리개가 될껄. 그러면 왕보다는 밑이지만 다른 신하들 보다는 높은 곳에서 평소 누리던거 누렸을텐데. 왕의 수치가 왕후에게 완전히 뒤집어 씌워진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이렇게 답합니다.
[21] 왕과 지방관들이 그 말을 옳게 여긴지라...
그 말이 옳다, 내가 당한 큰 수치를 가리는 가림판으로 너무 좋다! 너희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역시 너희는 지혜롭도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지방관들도 이 법을 옳다고 여긴 것일까요?
[20] 왕의 조서가 이 광대한 전국에 반포되면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여인들이 그들의 남편을 존경하리이다 하니라
이 조서가 전국에 반포되면 자기들도 아내들 앞에서 존경을 받으면서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모든 등장 인물들이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조서라는 것은 세상이 지혜라고 여기며 추구하는 세상을 다스리는 법, 세상의 원리를 말하는데요, 에스더서에서는 이 '조서'가 굉장히 자주 등장하고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첫번째 대지에서 봤던 마음대로 술 먹는 법처럼 이 세상의 원리는 어떤 온전한 기준이 없이 자기 소견에 옳고 좋다고 여기는대로 한다는거에요. 결국 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까 세상이 혼란스럽고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과 반대되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온전하고, 변함 없고,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법은 무엇일까요? 네, 율법, 하나님의 법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 통치의 근본 원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에스더서에서는 눈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 법과 원리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율법의 핵심 요지와 하나님의 지혜의 정점은 레위기에 담겨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레위기의 가장 중앙 부분의 제사법에 담겨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인간의 죄와 수치를 희생양에게 전가해서 저희의 죄를 덮어주시고,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저희의 엄청난 죄의 책임과 하나님이 받으신 그 부끄러움과 수치를 저희에게 떠넘기지 않으시고 하나님 본인의 이름이 수치스러워질지라도 본인에게 다 뒤집어 씌우시는거에요. 세상 원리와는 완전 반대죠. 이 제사법의 원리가 십자가에서 온전히 완성됩니다. 죄 없고 귀한 독생자를 발가벗겨서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매달아 대신 죽임으로 내 백성들의 죄를 다 용서하고, 내 백성의 수치를 덮어서 내가 다 책임지겠다!
그런데요, 그 죄와 수치를 다 가져가시니까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셨나요? 오히려 하나님이 참된 영광이심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참된 영광이면서 참된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로운 하나님의 방법만이 하나님과의 모든 적대 관계와 갈등이 종식된다는 것을 믿을 때 저희에게 참된 평안, 샬롬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도 이웃의 죄와 부족함, 실수를 용서해서 그 수치를 덮어주고, 이웃을 사랑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이구요, 그런 참된 지혜를 추구할 때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소식이 하나님의 조서인 말씀에 담겨서 온 세상에 기쁜 소식으로 반포되고 있는거에요. 그게 대조되고 있는겁니다.
세상은 세상이 좋다고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바보라고 합니다. 양보하고 배려해서 손해보면 멍청이라고 합니다. 당했는데 몇 배로 안갚아주면 쪼다라고 합니다. 그건 마치 십자가를 미련하다고 하고, 하나님을 미련하다고 멸시하는 불신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지혜의 반대가 미련입니다. 세상은 지혜로운 것과 미련한 것을 성경과 딱 반대로 생각해요. 영광스러운 것과 수치스런 것도 딱 반대로 생각하구요. 그런데 왜 자기가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이렇게 미련하게 행동할까요? 아하수에로 왕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1]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치매...
남에게 수치를 다 뒤집어 씌우고 자기 영광을 회복하니까 단기적으로는 노가 그치고 평안이 찾아온 것입니다. 결국 세상 원리를 따라 살면서 자기가 지혜롭다고 여기니까 미련함을 발견하지 못하는거에요.
그렇다면 참되고 영원한 평안는 어떻게 찾아올까요? 에스더 1장에서 평안이 없는 세상을 보고 있는데요, 맨 마지막 장에 참된 평안이 대칭적으로 나옵니다.
[10:3]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여기서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 영광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안위가 평안입니다. 이제 앞으로 보시겠지만, 에스더는 예수님을,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모형입니다. 사랑으로 양육한 딸 에스더를 백성들을 대신해 희생하는 하나님의 지혜로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될 때 백성들에게 평안이 온다는 복음이 담긴 하나님의 조서인거에요.저희가 이렇게 함께 모여서 예배 드리는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의 조서인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십자가가 진짜 영광이고,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삶이며, 이웃의 연약함을 품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임을 기억하셔서 영원하고 참된 평안, 샬롬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