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9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말씀: 에 4:1-17
[1]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2]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3]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4]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전하니 왕후가 매우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 옷을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이솝 우화 중에 해와 바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게 동화로 많이 읽혀서 유치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한 사람의 인생이나, 한 나라의 정치철학을 바꿀만한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해와 바람은 지나가던 행인의 외투를 벗기는 내기를 통해 누가 더 힘이 센지 겨룹니다. 바람은 강력한 힘으로 옷을 벗기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행인은 외투를 더욱 잡아 맸습니다. 반면에 해는 평소 하던대로 햇살을 비췄고, 행인은 그 따뜻함에 외투를 벗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삶의 여러 분야에 적용해 볼 수 있지만, 성경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 성경을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율법 지침서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구원 받았으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니까 그에 마땅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런 율법과 순종과 복에 관한 말씀들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 말씀들을 잘못 해석하면 마치 바람을 세게 불어서 외적인 압력으로 사람의 행동을 바꾸려고 하는 것과 같아집니다.
하지만 사람은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서 먼저 내면이 변화되어야 진정한 말과 행동이 변화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도, 아브라함과 다윗이 평생에 걸쳐 변화되어 간 것처럼 오랜 기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이 저희를 어거지로 변화시키시는게 아니라 저희의 자유의지와 상황을 고려하시고, 인내하시며 변화시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저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러브레터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는 율법들은요,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이 죄악된 삶이고, 어떤 삶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인가를 보여주고, 저희 능력으로는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복음적 신앙생활의 방향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에스더의 아버지이자 백성들의 지도자로 등장하는 모르드개를 통해 저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신가요?
1. 죽을듯이 애통해 하십니다.(1-4)
오늘 본문의 앞에서는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고, 하만은 모르드개 뿐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을 진멸하는 조서를 전국에 반포했습니다. 이런 하만은 영적 존재인 마귀를 모형하는데요, 그래서 이 상황은 마귀가 성도들을 육적으로 죽이는 것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이려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마귀는 성도들이 마귀를 섬기도록 유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삶이라고 위협해서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자처럼 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위기를 당한 백성들의 모습은, 순교 위기에 있는 성도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신앙생활의 유혹과 위협이 가득한 저희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을까요? 모르드개가 좀 유드리 있게, 절하는 척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꽉 막힌 보수 신앙을 유지하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유다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있을 때부터 모르드개와 같은 신앙을 갖지 않았고, 마귀를 섬겼기 때문에 마귀의 안마당까지 유배를 오게 되서 진멸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마귀의 가치관을 따라 사는 죄인들은 페르시아에 포로로 끌려온 백성들처럼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곳까지 영혼이 끌려가고 포로처럼 매여서 교회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약의 그림 언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이 당장 구원해 주셔야할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는 인생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대로 도와주시지 않으실 때 섭섭해하고 원망하기도 하는데요,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시고, 하나님 앞에 저희가 어떤 죄인인지에 대해 성경적으로 정확한 인식을 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성전 안에 우상을 세우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한 자들이 죄로 물든 세상에 엮여서 그 마땅한 대가를 치루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모르드개가 어떤 반응을 보이나요?
[1]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었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표현하는 강력한 슬픔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런 슬픔을 보고 애통이라고 하는데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도 이들이 왜 이 곳에 잡혀왔는지 알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모르드개 같은 사람들은 이곳에 잡혀올 이유가 없는, 바벨론에 잡혀갔던 다니엘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모르드개는 그런 백성들을 위해 애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모르드개가 에스더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더는 백성들을 위해 희생하는 예수님을 모형합니다. 그러니까 모르드개는 지금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아버지이면서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등장하는 것인데요, 아버지 하나님이 그 배신자 죄인들이 스스로가 처한 상황에 애통해 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나에게 죄 지은 자에게 애통해 하는 것은 죄인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왕노릇 하는 죄인의 모형인 아하수에로 왕. 자신의 말에 불순종했던 왕후에게 애통함이 아니라 강력한 분노가 일었습니다.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모형인 하만. 자신의 말에 불순종했던 모르드개에게 애통함이 아니라 분노가 일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의 결말은 용서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그 분노를 쏟아내서 7배, 70배로 700배로 복수하는 것입니다.
지금 1장부터 4장까지는요, 아하수에로 왕과 하만의 영광, 지혜, 수치, 그로 말미암는 관계의 파괴가 나타나구요, 모르드개의 영광, 지혜, 수치, 수치로부터의 보호가 대조되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애통도 그냥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죄 지은 자에 대한 반응으로서 분노와 대조되는 감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애통도 분노와 함께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감정입니다. 누구나 나에게 죄 지은 자에 대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도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분노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나요? 관계의 파괴와 단절입니다.
저희도 인생을 돌아보면, 결국 관계가 단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상대방 때문에 화가 나서 더 이상 연락도 안하고 얼굴도 안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게 정말 친했던 죽마고우일지라도, 피를 나눈 혈연지간일지라도,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고백했던 배우자일지라도. 내가 낳아 키웠던 자식일지라도, 나를 낳아 주신 부모일지라도,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일지라도. 나에게 지은 죄를 용서하지 못해서 불길처럼 타오르는 분노가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요,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시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애통해 하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실 수 밖에 없으세요. 존재 자체가 거룩이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그 죄를 불태워 버리지 않고 두시면 하나님이 더러워지시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죄인이 그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고 백성의 정체성을 잃고 마귀의 노예로 매여 사는 그 비참한 상태에 대해 쌤통이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통해 하시는 것입니다. 그 애통함이 얼마나 큰지 사랑하는 딸이 위로하며 그 애통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 하는데 그 애통함이 벗겨지지 않습니다.
[4]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전하니 왕후가 매우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 옷을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굵은 베 옷은 애통함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그 베옷을 벗긴다는 것은 애통함을 벗기기 위해 위로한다는거에요. 그런데 지금 어떤 위로도 저희를 향한 하나님의 그 깊은 애통함이 벗겨지지 않는다는거에요. 에스더서는요, 저와 예전에 함께 보셨던 룻기와 마찬가지로 정말 고도의 구조를 가진 문학작품입니다.
1장 2장, 3장, 4장 그런식으로 대조될 뿐 아니라 1장과 10장, 2장과 9장, 3장과 8장... 그렇게도 대조가 되면서 같은 주제를 다차원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차원적. 마치 지금의 3D, 4D 영화처럼 과거에는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거에요. 그렇다면 4장과 대조되는 7장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궁금하시죠? 바로, 에스더에 대한 하만의 죄가 드러나고, 에스더를 겁탈하려는 듯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왕이 강력하게 분노하며 하만을 나무에 매다는 장면입니다. 결국 4장과 7장의 구조 속에서도 자기에게 죄 지은 자에 대해 분노하며 그렇게 신임하던 신하를 죽음으로 단절시켜버리는 죄인의 모습과, 하나님께 죄를 지은 백성들에 대해 애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저희도 저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기 위해서는요, 그냥 화를 꾹 참고 용서해야 되니까 하는게 아니라, 죄에 대해서는 거룩한 분노를 품지만, 죄 지은 자에 대해서는 애통한 마음을 가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그게 저희 능력으로는 되지가 않는거에요. 그래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죄인의 비참한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저희의 비참한 상태를 애통하게 여기시는데요,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저희의 비참함에 대해 애통해 하시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자녀를 먼저 보내는 아픔이 애통인데요,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시는 것에 얼마나 애통하실텐데, 그렇게 하시기까지 저희를 애통해하신다는 것은요, 저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애통한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26살 때, 처음 하나님을 믿은 다음 해에 교회를 소개 받아서 모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때입니다. 오후 예배 때였는데요, 아마 선교 헌신 예배 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때 엔드 오브 스피어라고 한국어 제목으로 창 끝이라는 기독교 영화를 5분 정도로 짧게 편집해서 보여주신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젊은 선교사님들과 그 가정이 에콰도르 정글 부족에게 선교를 갔다가 간지 얼마 안되서 남자 선교사님들이 그 부족민들에게 다 죽고, 남은 젊은 아내들과 아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떠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말미에, 그 죽은 남자 선교사님들 중 한 분의 아들이 그 부족을 찾아오게 되는데요, 그 때 그 아버지를 죽였던 부족 추장이 그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죽인 현장을 찾아가서 내가 너의 아버지를 죽인 자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죽이라고 한거에요. 이 추장도 그 때 온 마을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같이 믿게 됐거든요. 그런데 그 부족에는 아들이 부모의 원수에게 대신 복수를 하는 전통이 있었던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추장이, 그 아들이 찾아오니까 죄를 고백하며 자길 죽이라고 한거에요.
이 사실을 알게 된 그 아들이 그 분노와 복수심에 오열을 하는데요, 하지만 그 때 그 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 아버지의 생명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추장도 오열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저희를 위해 예수님을 내어주신 것이 맞지만, 죽인 자의 입장에서 보면 저희가 죽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장 입장에서는 자신이 죽인 것인데, 결과적으로 생명을 내어 준 것이라고 하는 그 은혜의 진리를 통해 그 선교사님의 마음을 알게 됐고, 또 그 선교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니까 마음이 더 고통스러운거에요. 애통한거죠.
저는 그 때 그 영상을 보고 예배당에서 막 소리를 내고 울었습니다. 사람들 많은데. 예배가 끝날 때까지 눈물이 멈추질 않는거에요. 그 때 말씀도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를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과 교회가 저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그렇게 교회와 예수님을 무시하고, 욕했는데도, 오히려 저를 위해 예수님을 내어주셨다는 하나님의 애통한 마음이 와닿았던거에요.
그 추장은 나중에 그 부족 교회의 목사가 됐습니다. 실화입니다. 죄인을 애통하게 여기며 용서한 것이 한 알의 밀알이 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비참하게 살아가던 그 추장과 부족이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오랜 기간 하나님과 분리되었다가, 이제 막 하나님과 연합한지 얼마 안됐던 저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저는 그렇게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 이 영상을 얼마전에 초등부 아이들에게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울더라구요. 근데 저는 굉장히 오랜만에 아이들이랑 같이 보는데, 와. 또 눈물이 또 나더라구요.
그런데 이건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애통함 보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죄의 비참함 가운데 있는 것을 더욱 애통해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를 향한 하나님의 죽을 듯한 애통한 마음이 영혼 가운데 새겨지셔서, 그 은혜로 저희에게 죄 지은자를 애통하게 여기며 용서하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신가요?
2. 죽기까지 사랑 하십니다.(5-17)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향해 그렇게 애통한 마음을 갖고 계신데, 어떻게 할 능력이 없어서 그저 애통해 하고만 있으시면 그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애통한 마음을 품으실 뿐 아니라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해 움직이십니다.
[7] 모르드개가 자기가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금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액수를 하닥에게 말하고 [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보여 알게 하고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이 모든 상황을 알리고 상의를 합니다. 여기서 삼위하나님께서 상의하시고 사역을 함께 하시는 모습이 엿보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저희를 창조하셨고, 죄에 빠진 저희를 애통하게 여기시고, 구원하시려는 뜻을 세우시고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겠습니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짧은 한 구절이지만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등장하면서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고 사랑하시며 함께 사역을 이루어 가시는지, 그리고 사람과 온 피조물을 얼마나 존중하고 사랑하시는지도 느껴집니다. 지금 모르드개와 에스더에게도 그 모습이 나타고 있는 것인데요, 오늘 본문 맨 마지막에서도 그 모습이 나타납니다.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왕에게 나아가 도움을 청하라고 권면했을 때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금식 기도를 부탁합다. 모르드개가 해야 할 일과 에스더가 해야할 일이 있고,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의 명령을 존중하고 그대로 행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연합을 저희와도 나누기 위해 저희를 창조하셨구요, 또한 성도들끼리도 이런 연합과 사랑을 누리는 공동체가 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저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저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져버렸고, 죄의 구렁텅이에서 이 말과 행동으로 서로를 고통스럽게 만들며 비참하게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이 지금 처한 상황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해결방법은요, 먼저 하나님과 백성들의 분리된 관계가 다시 연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4장 전체에는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된 상황을 여러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2]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굵은 베 옷은 장례식에 입는 옷이고, 죽음은 부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왕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당시 페르시아의 문화적 상황이기도 했지만, 사실 이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된 백성들의 분리됨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모르드개는 이 문제를 해결해줄 왕과도 분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도움을 청할 에스더와도 분리가 되었죠. 그런데 이 분리의 암시는 모르드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1]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에스더 역시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데 왕과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4장 전체가 분리됨으로 인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리된 하나님과의 연합이 백성들이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지금 이 죽게되었다는 급한 불만 끄고 마귀의 안마당에서 매인 채로 다시 살아간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스더를 백성들과 왕 사이의 중보자로 세우고 계신 것입니다. 그 분리된 간극 사이를 중재하고 메워주는 중보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분리된거 그냥 다시 합치시면 되시는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된 저희와 당장 함께하시며 연합하실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 죄의 대가를 치뤄 죽음을 맞이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하시며 그 분리된 간극이 메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그래서 그 예수님을 모형하는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하면서 중보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분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중보자로 인해 해결된다는 것이 에스더의 고백 말고 4장 전체에 걸친 다른 힌트가 숨어있습니다.
[5] 에스더가...하닥을 불러 명령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엇 때문인가 알아보라 하매 [6] 하닥이 대궐 문 앞 성 중 광장에 있는 모르드개에게 이르니 [9] 하닥이 돌아와 모르드개의 말을 에스더에게 알리매 [10]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전하기를 [12] 그가 에스더의 말을 모르드개에게 전하매 [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이 구절들에서 힌트를 얻으셨나요? 하닥이라고 하는 전령이 분리된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중재하며 두 존재의 사랑의 연합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모르드개가 굵은 베 옷을 입어서 왕과 에스더에게 가지 못하는 것이면 사실 그 옷 벗으면 되잖아요? 아무리 애통하고 슬퍼도, 그 옷 때문에 이 중요하고 위급한 문제를 당장 해결하지 못하는거면 그 옷이 뭐가 중요한가요?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닥이 중재자로 있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과 백성들이 분리된 것과, 아무리 전능하신 하나님이실지라도 거룩하신 본질을 무시하고 백성들 당장 함께 할 수 없다는 것과, 그래서 그 사이에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 문학적 구조와 실마리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4장은요, 이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하는 장면으로 엄청 유명한 부분인데요, 단순히 에스더가 예수님이다!라는 내용만을 말하는 부분이 아닌거에요. 에스더가 그렇게 고백하며 죽음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던것도 모르드개가 그 뜻과 계획을 나누고, 권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백성들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모르드개가, 베 옷을 끝까지 벗지 않고 죽기까지 애통해하고, 먹을 것을 끊고 죽기까지 기도하는 금식을 하고, 자기 딸 에스더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모습을 깊이 묵상해 보면요, 와, 하나님이 저희를 이렇게 죽기까지 사랑하시는구나하면서 4장 안에 가득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도 25살 때 중국의 연변과기대에서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제 몸을 완전히 감싸서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진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너무나 궁금했던게 있었어요. 아담과 하와 이후로 정말 오랜 시간, 오랜 세대 동안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그 사랑이 나에게까지 전달되었을까? 그래서 그 때부터 학교 수업을 다 뒤로 하고 도서관에 가서 한국교회사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향해 오신 하나님의 발자국을 자세하게 알고 싶어서 제일 두꺼운 책으로 골라서 읽었어요. 그 책을 읽으니까 예수님의 희생 이후로 정말 많은 선교사님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 복음이 저에게까지 오게 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때 읽었던 책이 깨알같은 글씨에, 손바닥만큼 두꺼운 책이 세 권짜리였는데요, 너무 감동적이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신학대학원에 가보니까 그 책을 집필하신 분이 한국교회사 과목 교수님이셨던거에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알려주신 분이시라서, 그 분은 저를 몰랐지만 저는 진짜 그 수업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변과기대에서 그 책을 읽는 동안에 학교 수업들은 완전히 과락되서 학점을 채우지 못해서 한국에 와서 한 학기를 다시 다녔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이 제 삶을 휘몰아쳤습니다. 정말 안타까운게, 사실 제가 그 때 중국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그래서 원어민 중국어 선생님이 저를 정말 아껴주셨어요. 그래서 집에도 초대해 주시고 맛있는 것도 해주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한국교회사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중국어 공부에 손을 놓은거에요.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정말 안타까워 하시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을 믿게 되서 그 하나님을 알고 싶어서 그런 책들을 읽느라 중국어 공부를 못하게 됐다고 솔직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생님은 정말 사랑하는 제자를 갑자기 잃은 것 같으셨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요. 그냥 중국어 회화 공부한게 아니라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자 하나하나의 유래와, 파생되는 의미를 막 파해치면서 질문하고 토론하면서 공부 했거든요. 저를 아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중국어를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것은 중국 무역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 중국이 한창 뜨고 있었을 때였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사실 돈을 사랑해서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뒤로 하고, 또 중국어 선생님의 사랑을 뒤로 할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에 푹 빠지게 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요, 여기 계신 여러분들 역시도 아담과 하와 이후로,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의 부모님들의 부모님... 정말 오랜 기간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시간 가운데 굵은 베 옷을 입고 애통해 하고 계셨던거에요.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 많은 선교사님들의 희생을 통한 사랑이 여러분들께 전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더 사랑하셔서 제가 이렇게 불신자에서 갑자기 목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 모두가 다 목사,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든 간에, 하나님은 저희와 분리되는 것에 애통해 하시고,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애통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저희 모두를 죽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알게 되실 때 저희도 에스더와 같이, 예수님과 같이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 하나님의 마음이 영혼 가운데 깊이 새겨지셔서, 그 사랑과 은혜로 매일 변화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