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4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4] 에스더가 이르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 하니
[5] 왕이 이르되 에스더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가니라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분들 중에서도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일들이 잘 풀리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섭리해 주실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의 가장 좋은 때에 구원과 심판을 이루시기 위해 개입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구원과 심판이란 단순히 믿는 사람과 불신자를 갈라 천국과 지옥으로 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삶 속에서 말씀을 통해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고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저희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심판은 죄를 잘라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거든요. 성경은 그 과정을 징계, 양육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그렇게 죄가 잘려나가 거룩하게 되서 온전한 데까지 믿음이 성장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는 동전의 양면처럼 구원과 심판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과 심판은 명상이나 수련 같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조금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저희를 잘 아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구원과 심판의 섭리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에스더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기다리는 자의 삶이 어떠한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자의 삶은 어떠한가요?
1. 내 생각에 좋은 때를 내려놓는 삶입니다.(1-8)
오늘 본문 앞부분에서는 하만으로 인해 하나님 백성들이 전멸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믿음 좋은 에스더조차 “지금 왕 앞에 나가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현실 앞에 고민했습니다. 모르드개도 기도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벽에 부딪혔을 때 마음이 무너지셨던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지금 딱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인데요, 모르드개가 기도를 한지 삼일째가 됐을 때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1절입니다.
[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그런데 성경에서 숫자 3은 삼위 하나님의 온전한 연합을 통한 개입을 의미합니다. 사랑으로 가득하신 삼위 하나님이 연합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렇게 아름답고 경이로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라는 놀라운 존재를 창조하시고, 그 크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반역한 저희를 용서하시고, 게다가 더 이상 눈물과 질병과 죽음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는 선한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도망쳤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만에 나온 것과, 죽은 나사로가 3일만에 살아난 것과, 저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 3일만에 부활하신 일 모두 삼위 하나님이 연합하여 개입하신 선한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와 고난과 죽음이라는 받아들이기 힘든 인생 가운데 삼위 하나님이 가장 적절한 때에 개입해 주셔서 단순히 육적 생명 뿐 아니라 영적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3일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3일은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좋아보이는데요, 저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 위해 저희가 원하는 때와 방법을 완전히 내려놓는 기도를 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에스더 역시도, '내가 왕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 지금 나아가면 아무 것도 못하고 그냥 죽는다'라는 자기 생각과 때를 내려놓기 위해 자기도 기도하고, 기도를 부탁했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에스더가 그 때를 기다리자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2절입니다
[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자신의 체면보다 에스더를 사랑하는 마음을 먼저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삶을 돌아보시면 아, 그 때 하나님이 개입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거야. 이렇게 믿음이 성장하지 않았을거야. 라고 생각되시는 순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도대체 왜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허락하시는지, 왜 도움을 주시지 않으시는지, 그냥 다 포기하고,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럽고 두렵고, 초조하고 마음이 무너지는 시간들이셨을 것입니다. 아마 지금 그런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의 섭리의 때를 기다리는 3일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에게 그 기간은 3일 일지, 3개월 일지, 3년 일지, 30년 일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 시간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는 나의 옛사람과 싸우는 믿음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람 탓이 아닌거에요. 하나님이 가장 좋은 때에 모든 것을 합력하셔서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은 교회를 몇 년만 다닌 분들이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그걸 기다리지 못하는 나로 인해 괴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니까.. 이렇게 왕이 에스더를 자기 앞에 나아오게 한 것도 큰 은혜인데요, 에스더가 아무 말도 안했는데 소원을 다 들어주겠다고까지 합니다. 3절입니다.
[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오랫동안 에스더에게 관심도 없어서 그 믿음 좋은 에스더도 왕 앞에 나가면 죽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사랑스러워지고 갑자기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건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정도로 현실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인데요, 모르드개와 에스더와 온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이 때 소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쫌있다가 왕을 위한 잔치를 준비해 놨으니 와달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은요, 결국 왕이 그날 잔치에 왔고, 소원을 말해보라고 또 먼저 말했는데 내일도 잔치가 있는데 그 때 소원을 말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도대체 에스더는 이 절호의 기회 앞에서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오늘 당장 에스더가 소원을 말했을 경우와 내일 있을 잔치에서 말했을 경우의 결과를 비교해봐야 합니다.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오늘 잔치와 내일 잔치 사이에 왕이 잠이 안와서 역사책을 읽다가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베풀어줬던 잊혀진 은혜를 기억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에스더서가 1장과 10장, 2장과 9장 이렇게 짝 구조로 되어 있는 중에 가장 중심에 있는 짝꿍이 오늘 말씀인 5장 그리고 6장인데요, 이 두 장 내용의 딱 중심에 그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잊혀진 은혜가 기억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왕을 처음 만나기까지 모르드개가 기도하는 3일을 기다렸는데요, 그 첫 번째 만남 이후에 그 날 잔치 때 한 번 더 만나고, 그리고 세 번째 만남 때 소원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렇게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되는 때조차 내 뜻대로, 때가 원하는 때에 성급하게 행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이 섭리하실 것을 믿고 때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서 섭리가 일어나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왕의 목숨을 구한 모르드개의 잊혀졌던 은혜가 기억났고, 마귀에게 하찮게 취급받던 모르드개가 높임을 받고,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처럼 이 나라의 실세가 되서 다스리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당장 백성들이 죽을 위기를 해결하는 것 보다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에 에스더는 이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백성들이 이렇게 마귀의 소굴에 끌려와서 죽게 된 이유가 바로 영원한 심판에서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고, 그 다스림에서 벗어나 자기 뜻대로 자신과 이웃의 인생을 다스리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걸 보고 죄라고 합니다. 단순히 빨간 불에 신호등 건너고, 아무데나 쓰레기 버리는 죄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에스더가 하나님이 개입하시기 전에 소원을 말했다면 왕이 그렇게 왕비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했으니까, 백성들이 진멸되는 것은 당장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근원적인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기대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가 단순히 인생의 위기들을 잘 극복해서 잘 먹고 잘 살게,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의 때를 믿고 기다린다고 해서 무조건 십자가 가시밭 길만 걸어가는 삶만이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길을 택해 걷다보면 나에게 가장 좋고, 가장 잘 맞고, 마음이 가장 평안해지고,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되는 인생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게 꼭 사람들이 바라는 부유함이나 성공을 가지지 않더라도요. 저희는 바로 그 때, 아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구나, 하나님이 섭리하셨구나 하며, 과거부터 하나님이 개입해주신 일들이 새롭게 재해석 되고 그 가운데 잊혀졌던 하나님의 은혜가 기억나면서 이런 하나님을 내가 믿어야겠구나 하며 믿음이 조금 더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희의 죄가 심판을 받아 잘려나가고, 믿음이 성장해 구원이 완성되어가는 심판과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를 에스더처럼 잘 기다리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나 아무리 철저한 다짐와 의지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희는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있을거야 라고 말은 해도 그 순간에는 긴가민가하며 그 시간들을 고통스럽게 지나가고, 인생을 돌아보며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모습을 보고 저렇게 살아야 됩니다라고 하는게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아무 것도 못하고 모르드개와 에스더에게 모든 기대를 거는 백성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부터 그 고난과 위기 속에서도 30년 인생을 기다리셨고, 3년의 공생애를 기다리셨고, 무덤 속에서 3일을 기다리셨습니다. 바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온 우주 역사의 중심이 되는 하나님의 섭리의 때를요.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그 예수님을 믿는 저희들이 그 순간부터 인생에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육적 죽음을 피하고, 다들 사람들이 그렇게 원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셨나요? 아니면 믿음이 갑자기 온전한 데까지 성장하셔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때와 섭리를 기다리실 수 있는 에스더와 같은 신앙인이 되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잘 기다리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저희에게 에스더는 이렇게 나를 믿고 따랐는데 왜 너희는 그렇게 못하느냐!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저희 앞에 에스더와 같은 예수님을 세워주셔서 내 아들이 죽기까지 그 때를 기다려 너희를 구원했다라는 은혜를 선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 역시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해서 엉망진창이 될 뻔한 인생을 하나님이 은혜로 개입해주셔서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가장 큰 단점이 성급함이에요. 그런 일들이 너무 많아서 지금 다 말할 수는 없구요, 천천히 다 알게 되실 것입니다. 제가 설교할 때 제 인생을 단계별로 나누고 있거든요. 오늘은 아내와 만나게 된 이야기를 좀 나누고자 합니다.
아내와 만나는 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가장 좋은 때에 섭리를 다 해주셨는데요, 저는 그 섭리를 보지 못하고 제 뜻대로, 제 때에 맞춰 하려다 일을 다 망칠 뻔 했는데, 하나님이 다 해주셨습니다. 저는 25살 때 중국의 연변과기대라는, 선교 목적으로 만든 대학에 한 학기 교환학생을 신청해서 갔습니다. 그 때 마침 하나님을 믿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저를 위해 기도해주던 다른 학교에서 교환학생을 온 형님이 저를 연변과기대 부설유치원 선생님들께 소개해줬습니다. 선생님들이 선교사님들이다 보니까 어린이 뿐 아니라 대학생들을 케어하는 사역을 하고 계셨는데요, 저를 부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아내가 2년 단기 선교사로 유치원에서 선생님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이미 12월이라 학기가 거의 끝나서 제가 한국에 돌아갈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에서 다닐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여러 선교사님들이 자신을 파송해 준 사랑의 교회, 온누리 교회 같은 큰 교회들을 소개해줬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아내를 알게 되서 아내가 다니던 교회도 좋다고 소개를 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태어나서 25년간 살던 동네를 떠나지 않았었는데 제가 한 학기 동안 중국에 있던 그 때 마침 저희 부모님이 아내 교회 근처로 이사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소개 받은 교회 중에 그 교회가 가장 가까워서 먼저 가봤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그 교회 역사상 가장 좋으셨던 청년부 목사님이 섬기고 계셨어서, 처음 설교 듣고 이 교회다 하고 정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제가 연변과기대에서 은혜가 너무나 커서 학교에 사정을 해서 한 학기를 더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형평성을 위해 원래는 한 학기 밖에 못가는데요, 그 때 마침 교환학생 담당 교직원 분들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제가 거기서 믿게 된 간증을 듣고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 때 새학기에 온 교환학생들도 많이 도와주고, 유치원에 가서 아이들 사진도 찍어주면서 제가 먼저 아내를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을 섬기는 모습이 딱 제 이상형이더라구요. 외모도 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찾던 딱 제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그 학기에 신앙과 성품이 정말 좋은 친구가 왔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면서 신앙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요, 그 친구가 아내를 좋아하게 됐다고 저에게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제가 말은 안했지만, 제가 아내에게 관심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일부러 저에게 허락을 받기 위해 이야기를 꺼냈던 것입니다. 그 정도로 신앙과 성품이 뛰어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가 그 친구에게 괜찮다, 내가 먼저 좋아하기 시작했지만 양보 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사자의 의사는 상관 없이 남자들끼리 그러고 있었던거에요. 그 친구는 몇 번이나 저의 의중을 확인했지만, 저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친구는 제 아내를 잘 챙겨주기 시작했구요, 저는 일부러 바쁜척 다른 곳을 섬기며 배회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학기가 끝나고 저는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고, 아내는 단기선교 기간이 한 학기가 더 남아서 중국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아내의 유치원 선교사 동료이자 동갑 친구가 저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아내가 저를 놓고 기도를 하고 있다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고. 너가 좋아하지 않냐고. 그래서 저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좋은 친구가 잘 하고 있었는데, 왜 믿은지 얼마 안되서 좌충우돌인 나를 놓고 기도를 하고 있지? 그런데 지금와서 내가 사귀자고 얘기를 하면 그 친구는 어떻게 되는거지?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 교회 청년부 목사님께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아주 자유롭고 깨어있는 목사님이셨어요. '너가 좋을대로 해. 그런데 기도는 해보고'라고 답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락방 같은 곳이 있었는데요, 그 때가 학기 끝나고 방학 때였어서, 거기에 공부한다고 며 칠 있으면서 기도를 하는데, 그냥 사귀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기만 하는거에요. 믿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기도가 뭔지도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좋아하는 마음이 드니까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보다 하고 사귀자고 고백한 것입니다. 결국 그 좋은 친구는 얼굴 보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양보한다고 다 그렇게 해놨었는데 제가 뒤통수 친 것 처럼 됐잖아요. 제가 저의 신앙의 멘토 같은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비춰보면 기도 할 때 이런 기도를 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용기 있는 자가 미녀를 얻는다고 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 절호의 기회이지만, 믿음의 동역자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제가 끝까지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원하는 생각과 뜻을 내려놓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더 좋은 자매를 허락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니면 이 자매와 만나기 위한 선한 길을 열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러질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나 그 때 마침, 그 때 마침 하나님이 다 섭리해 주셔서 끝까지 다 해주시는 분이심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그 때는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지나고 나서야 보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이 섭리하실 것을 믿고 기다렸다면, 하나님이 선한 방법으로 개입해 주셨을 것이고, 그러면 그렇게 좋은 친구를 통해 제 신앙도 더 성장하고, 더 풍성한 열매들이 맺힐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그런 친구를 쉽게 만날 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내 뜻, 내 계획, 내 때에 따라 성급하게 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데 실패하고 후회가 되는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섭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며, 하나님이 가장 좋은 때에 섭리하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기다릴 줄 아시는 성도님들로 점점 더 성장해 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자의 삶은 어떠한가요?
2. 낙심하지 않고 은혜를 흘려보냅니다.(9-14)
저희는 하나님이 섭리하실 때를 잘 기다리지 못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섭리하시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도 오해가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이 섭리하시면 당장 나를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고, 나를 힘들게 하던 사람들이 심판받는다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오히려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하만을 잔치에 두 번이나 초대하자 하만은 기분이 한껏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간 하만은 아내와 친구들을 불러 자신의 영광을 자랑합니다. 11절과 12절을 보겠습니다.
"[11] 자기의 큰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 [12] 또 하만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받은 자는 나밖에 없었고 내일도 왕과 함께 청함을 받았느니라"
그런데 하만이 이렇게 교만해진 이유는 나라의 반이라도 줄 수 있을 정도로 왕이 총애하는 왕비가 잔치에 두 번이나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하만의 교만이 자기자랑에서만 끝나는게 아니라 모르드개에게 더 큰 수치를 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14절입니다.
"[14]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들이 이르되,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가소서 하니, 하만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명령하여 나무를 세우니라"
오십 규빗은 아파트 7층 높이입니다. 이 고대에, 그 높이에 사람을 매단다는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극심한 수치를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 하만은 모르드개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건 단순히 모르드개만 겨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믿는 백성 전체를 수치스럽게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저희는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기 때문에, 하만이 아무리 기세등등해 보여도, "넌 이제 끝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극적인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저희를 괴롭히는 사람들, 마귀 같은 존재들이 당장 심판받지를 않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더 교만해지고 더 힘을 얻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수록 저희는 마귀와 그 마귀의 종노릇 하는 사람들 때문에 삶이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직장 상사이면 내가 회사를 그만 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학교 선후배면 내가 휴학을 해야 하나, 군대를 가야하나 생각이 들고. 결혼을 한 부부이면 매일 보는게 힘드니까 자꾸 집 밖을 나돌아 다니며 늦게 들어가게 되고, 부모자식간의 관계이면 이걸 호적에서 파버릴 수도 없고, 부모님과 평생 안보고 살 수도 없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요, 이런 마귀 같은 사람을 심판할 기회가 있었는데 에스더는 그러지 않고 오히려 이 하만에게 두 번이나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언제나 심판을 하시기 전에 회개할 기회라는 은혜를 베푸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만은 마귀를 모형하기도 하지만, 마귀에게 사로잡혀 종노릇 하는 자를 모형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심판을 오래 참으시며 은혜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도 홍수 심판이 내려지기 전까지 노아를 통해서 너희는 이제 죽었다 하시며 저주를 퍼부으셨나요? 아닙니다. 말씀을 선포하며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선포하게 했습니다. 요나 선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덩굴로 햇빛을 가려주시면서, 너가 이렇게 말라죽을 덩굴도 아끼는데, 내가 저 많은 앗수르 사람들을 아끼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시며, 결국 심판 받아 멸망할 사람들에게까지 회개할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성경의 이 이야기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심판 받을 세상에 대해 회개할 기회라는 은혜를 베푸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죄로부터 회개해 영원한 심판을 면하고, 구원 받을 수 있도록 기적과, 말씀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성찬 잔치와, 십자가 잔치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는 십자가가 어떻게 잔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 준비된 포도주를 통해서 예수님이 피를 흘려 희생하심으로 모두를 구원하는 혼인 잔치에 초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 이 교회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악한 자들이 이렇게 득세하고 정의와 공의가 무너져 가고 있는데 하나님은 즉각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저희는 그럴 때 빨리 이 죄인들 심판해서 싹 없애버려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강 같이 흐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회복된다는 말 속에는요, 하나님은 죄에 대해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그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구원하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희도 심판 받아 마땅한 마귀의 종노릇 하던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래 참으시며 회개의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구원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에스더서에서는 하나님의 이름도 나오지 않고, 이 잔치 가운데 말씀이 선포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애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더서에서는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등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의도적으로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신 것 같고, 섭리하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다 하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에스더서에는 세 가지 잔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 자연, 예술, 산업, 국가와 같은 일반은총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자기를 높이고 즐기는 잔치입니다. 이 잔치들을 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안계신 것 같습니다. 그냥 나도 세상의 권력, 재력을 가져서 저 사람들처럼 잔치를 즐기는 삶을 사는게 나은 삶인 것 처럼 보입니다.
에스더는 그런 세상의 잔치 앞에서 다른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때를 기다리며 세상에 말씀을 선포하며 회개의 기회를 주는 은혜를 흘려보내는 잔치입니다. 에스더는 어쩌면 하나님 백성을 위협하는 하만에게 똑같이 앙갚음 해주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잔치를 한 번 베풀어주자 더 기고만장해지는 하만을 보며 기가 막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에스더는 끝까지 잔치에 초대해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바보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그러하시기 때문에 내가 심판하려하지 않고, 또 낙심하지 않고 순종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잔치가 마귀와 그 잔재들까지 모두 심판 받아 모든 백성들이 구원 받았음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부림절 잔치입니다. 에스더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과 구원을 이루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저희는 은혜를 베풀어도 기고만장해지는 상대를 보며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잔치를 정리해 보면요,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높여드리고, 구원 받은 서로를 축하하고,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고된 인생을 달려가는 서로를 격려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과 심판과 구원이 완성되는 때를 함께 기다리는 이 예배가 잔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를 믿는 자들에게만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땅 끝까지 이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조성용 목사님, 신지원 사모님 선교사로 곧 나가시게 되잖아요. 세상에 잔치를 베풀러 가시는 것입니다. 저희가 갈 수 없는 땅 끝까지 잔치를 대신 베풀어 달라고 보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면 모두가 감사합니다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선교사님들을 깔보고, 모욕하고, 위협하고, 하나님과 그 말씀을 하찮게 여기고, 교회가 베푸는 선의를 이용만 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리고 이 예배는 꼭 교회 예배당이나 선교지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세상 사람들과 부대끼는 삶 속에서 나를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은혜를 흘려보내는 잔치를 베풀어줍니다. 그런데 저희가 불신자들과 세상을 향해 내 자아를 꺽으며 섬김의 자세로 이 말씀이라는 흘려보내면 그들이 감사합니다, 이제 예수님 믿고 겸손해질께요 할까요? 오히려 더욱 교만해지면서 오히려 적반하장이 되기 때문에 은혜를 베풀고 싶지 않아집니다. 특히 직장에서, 내가 크리스찬이니까, 도와주고, 용서하고, 품어주다보면 이 바보 같은 사람 이용해서 자기 몸 편하게 만들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습이 있을 때 은혜를 베풀어주고 싶나요? 아닙니다. 그 하는 짓거리를 보면 나도 똑같이 해주고 싶고, 두 세배로 갚아주고 싶어집니다. 저희는 그런 상대에게 은혜를 베풀다 보면 낙심하고 지치게 됩니다. 아니 은혜를 베풀어줘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납니다. 내가 왜? 왜 나만? 내가 이렇게 은혜를 베푸는게 의미가 있을까? 내가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낙심이 되다 보니까 은혜 받을만한 사람한테만 은혜를 베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에게만 은혜를 베푸셨으면 이 세상에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만과 같이 마귀의 종노릇 하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은혜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 앞에서 마귀는 한 없이 교만해져서 그 죄가 가득 차 최후 심판을 받게 될 것이구요, 마귀를 따르던 자들 중에는 그 은혜를 통해 회개하게 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 서로 간에도 은혜를 베풀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다 보면, 결국 하나님이 가장 좋은 때에 말씀을 통해 각자의 죄를 보게 하시고 회개하고 성장하게 하십니다. 그것 역시도 지금 하나님이 성도에게 베푸는 구원과 심판,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믿으시는 저와 여러분들께서, 낙심하지 말고 이웃과 온 세상과 땅 끝까지 은혜를 베풀고, 하나님의 때를 기도하며 기다리 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