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년 6월 27일 주일예배 설교문 / 김대범 목사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는 대부분 책을 통해 지식을 얻거나 tv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지식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노소를 불문하고 온라인의 다양한 채널들을 통해 지식을 습득합니다. 현재 이 시대는 개성, 다양성, 자율성 등을 중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문학, 부동산, 주식, 각종 취미 활동 등 다양한 장르를 더욱 확신 있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여 지혜로운 자로 살려 애씁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에게 배운대로 살아가면 지혜로운 자로 살아갈 수 있으며, 궁극적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지혜를 무엇이라 정의하고 있나요? 지혜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라 정의합니다. 즉 세상에 말하는 지혜는 ‘이해력이 좋아 일처리 잘하는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지혜를 무엇이라 정의하고 있을까요?
‘지혜’는 히브리어 원어로 우리가 평소 들어봤을 법한 단어입니다. 주석서 가운데 ‘호크마’라는 주석서도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지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지혜를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고, 시가서를 비롯한 선지서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신약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이를 정리해 보면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이 성경이 말하는 미련한 자라 함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짧은 두 구절은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의 모습을 대조하여 보여줌으로서 상반되는 두 부류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미련한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봄으로서 우리 삶에 여전히 나타나는 미련함을 말씀 앞에 비추어 보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미련한 자의 삶에 나타나는 특징은 무엇인가요?
1. 듣는 것보다 행위가 앞섭니다. v.15
[15a]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미련한 자는 성경에서 주로 어리석은 자로 묘사되는데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들의 특징은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행위’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주로 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구약에서 아합과 같은 악한 왕이 북이스라엘의 왕들의 길로 행한다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시편과 잠언에서도 악인의 길이 사망의 길로 표현되기도 한다.) 즉, 존재 양식을 가리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가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긴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태도와 방식이 옳다고 여겨 그 길을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겨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여러 인물들 가운데 자신의 행위를 바른 줄로 여겼던 한 사람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사울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기름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왕으로 세움 받은 이후에 서서히 그의 내면에 있던 악한 본성이 드러나면서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삼상 15장에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치고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김없이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까지 그리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짐승들마저 남김없이 진멸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삼상 15:9)
사울은 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줬을 뿐만 아니라,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을 것을 남긴 것일까요? 사울은 자신의 지혜를 최대한 발휘하여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아말렉 왕을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면 실보다 득이 많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전리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큰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많은 재물을 남긴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선택에 기로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대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을 하려 애씁니다. 사실 이러한 고민을 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하려 애쓰는 행위 자체는 합리적인 태도이며, 삶에 유익한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봤을 때, 사울은 매우 합리적 판단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에 태도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요?
사울의 행위는 인간 본질 안에 깊게 뿌리 박혀 있는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려는 본질적 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 보았듯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인간의 본질적 악이 사울의 태도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3:5 말씀을 보면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하와의 눈에 선악과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 직도 했습니다. 하와가 유혹에 넘어간 궁극적 원인이 하나님과 같은 지혜를 가지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음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
하와의 마음에 하나님과 같은 지혜를 소유하여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육혹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면서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여 하나님처럼 되려는 본질적 악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울 역시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리고, 수많은 짐승들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사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이와 같이 변명합니다.
“사울이 이르되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삼상 15:15)
사울의 매우 당당한 모습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짐승들을 남긴 이유에 대해 마치 자신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일이라 이야기합니다. 사실 사울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 땅에서 영예를 얻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나름 순수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성공이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 믿으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순수한 동기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그 일의 결과가 원하는 결실을 맺지 못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할 수 있지만, 만일 내 안에 불편한 감정 또는 분노의 감정이 일어난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수한 동기가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래에는 주변에서 20여일 이상 금식하거나 작정 기도 하시는 분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과거에는 믿음이 좋다는 분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고자 했던 일이 좌절되었을 때 40일 작정 기도나, 40일 금식 기도를 통해 목숨 걸고 하나님을 설복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졌던 분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날이 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는 장면을 통해 그러한 열심을 강조하며 그렇게 열심히 구하면 결국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간증하며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시던 분들의 모습들을 기억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으로 대놓고 우상 숭배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미명하에 은연중에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말씀에 귀기울기보다 나의 선악의 기준에 따라 옳다 여기는 일에 행동이 앞서고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사무엘은 변명하는 사울을 향해 이야기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여기서 ‘순종’은 히브리 원어 ‘쉐마’로 경청의 의미이므로, ‘순종’과 ‘듣는 것’은 둘 다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태도를 의미하고, ‘제사’와 ‘숫양의 기름’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를 의미하므로 오늘날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앞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다보면 때로 아이들의 지혜를 보며 감탄하는 일도 많지만, 아이들의 어리숙한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상황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며칠 전에 막둥이 노엘이가 아내가 요리하는 걸 지켜보면서 자기 스스로 계란 프라이 요리를 해보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말을 제법 잘하게 된 노엘이는 엄마를 도와주고 싶어서라는 명분을 앞세워 상당히 설득력 있게 고집을 부렸습니다. 아내는 인내심을 가지고 노엘이에게 그 일이 불가능한 이유를 열심히 설명했지만 노엘이는 고집을 꺾지 않고 아내를 졸라댔습니다. 아내가 보지 않는 틈에 노엘이가 의자를 가져다가 놓고는 그 위에 올라서서 계란 하나를 프라이팬에 깨는 순간 계란 껍데기가 알맹이와 함께 프라이팬으로 떨어졌고, 노엘이는 뜨겁게 달궈지고 있는 프라이팬에 손을 넣어 껍데기를 꺼내려는데 손을 살짝 데이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을 미련한 자의 모습에 비유하는 것이 미안하지만 노엘이의 모습을 보며 오늘의 설교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엄마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판단하여 행동으로 옮겼던 노엘이의 모습을 보며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리한 미련한 자에게 나타나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노엘이는 나름 선한 의도를 가지고 엄마를 도우려 했지만 부모로서 노엘이에게 원하는 것은 요리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부모의 품안에서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기 이전에 부모의 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 대해 이와 같은 마음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행위 결과(업적)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다고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이룬 업적을 통해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실 것이라는 착각으로 인해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내 기준에 선하다 여겨지는 것을 하나님도 기뻐하시리라는 생각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영적 귀머거리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15b]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권고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지혜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태도로 살아갈 때 미련한 자가 아닌, 지혜로운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원합니다.
미련한 자의 삶에 나타나는 특징은 무엇인가요?
2.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분노합니다. v.16
[16a]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우리는 자신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절대 선이 깨지거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될 위기에 놓였을 때 방어기제가 발동하여 즉각적인 분노가 표출되어 나오기 마련입니다.
전반부에서 살펴보았던 인물인 사울 이야기를 이어서 해보려 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존재 가치의 근간을 왕권에 두었기 때문에 자신의 왕좌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그의 눈앞에 왕좌를 위협당하는 듯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삼상 18:6-9)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기분 좋게 귀환하는 길에 여인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습니. 사울은 자신보다 더 큰 환대와 환호를 받은 다윗으로 인해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 사울은 모든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외모와 능력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눈앞에 여인들에게 자신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사울은 다윗에 대하여 엄청난 시기와 질투의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시기 질투는 무엇에서 비롯된 감정인가요? 이 감정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는 열등감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열등감을 느낄까요? 최근 우리나라 인문학계에 유명인사가 된 법륜 스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구독자만 80만명에 육박하는 유명 유튜버이기도 합니다. 과거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라는 강연을 통해 열등감에 대한 법륜스님의 강의를 들어보았는데 제법 깊은 통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스님께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면 스님은 답을 해주었습니다. 예측 가능한 답을 가르쳐주지만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적절한 비유를 들면서 잘 설명해줍니다.
법륜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열등감이 생기는 근본적 원인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열등한 감정은 현재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에 비롯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꿈꾸고 되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을 자신의 실제 모습이라 착각하면서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책 또는 자학하기 때문에 더욱 자존감이 낮아져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법륜스님이 말씀하시는 대안은 그러므로 현실 속의 실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여 자신에 대한 허황된 기대를 낮추고 즉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능력에 맞는 환경에서 자족하며 살라 이야기 합니다. 잠시였지만 순간 아주 깊이 공감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인간이 자신의 분수를 알아 스스로 욕심을 버리고 능력에 맞는 환경에서 살아가면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존재인가요? 또한 과연 우리가 스스로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절제력이 있는 존재인가요? 법륜 스님은 나름의 깊은 통찰로 열등감의 원인을 찾아 문제 해결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지만, 아마도 유교의 정통사상인 맹자의 성선설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 굳게 믿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조차 온전히 통제 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나는 매일같이 나의 악함과 불완전함을 경험합니다. 나는 매일 운전대를 잡기 전에 양보운전을 하겠노라고 다짐하지만 운전할 때마다 초보운전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최대한 스마트 폰을 멀리하여 그 시간에 설교 준비에 더욱 힘쓰거나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리라 다짐해보지만 늘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완전한 우리 자신을 믿고 의존하거나 믿을만한 다른 누군가를 의존한다면 반드시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 자신에게 자존감의 근거를 두거나 유한한 시공간 안에서 한계가 명확한 것들을 의존하며 살아갈 때, 자신을 지탱해주던 의존의 대상이 흔들리거나 사라지는 순간 불안함과 두려움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내적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인해 외적인 반응을 나타내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왕권이 하나님께로 부여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의 근간을 왕권에 두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울은 왕권을 잃어버리는 순간 자신은 무가치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대상이라 여겼던 다윗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 존재의 근간을 우리가 가진 재력과 사회적 지위 또는 하나님 외에 의존하는 어떤 대상에 두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손을 떠나는 순간 나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것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자신의 존재의 근간이 되는 의존의 대상을 위협하는 대상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사방이 막히는 고립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 마저 분노하게 됩니다. 분노는 단순히 격양된 목소리나 격분하는 모양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두려움에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미련한 자는 자신의 존재 가치의 근간을 유한한 것에 두어 그것을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당장에 분노를 표출하지만 오늘 본문 16절 하반절에서 보듯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6b]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슬기로운 자는 지혜로운 자를 의미합니다. ‘수욕’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의미하고, ‘참다’라는 단어는 ‘덮다’의 의미로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수욕을 덮는다는 의미입니다. 사울은 집요하게 다윗에게 부끄러움과 수치를 안겨주며 심지어 다윗을 수차례 죽이려 했지만, 다윗은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사울을 원망하거나 마음에 원한을 품지 않고 사울의 모든 허물을 덮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상 15장 이후에 사울이 주는 부끄러움과 수치와 능욕을 덮어 보이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미련한 자의 모습과 지혜로운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복수할 기회를 얻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그 기회를 허락하신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완벽한 기회가 찾아옵닌다. 하지만 다윗은 끝까지 사울에게 당한 수욕을 보복하지 않습니다.
“[5]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삼상 24:5,6)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에게 보복할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라 이야기하며 다윗을 부추겼지만 다윗은 사울에게 보복하지 않고 도리어 사울의 겉옷 자락을 조금 벤 것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다윗이 사울로부터 당한 수욕을 덮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다윗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하나님께 두었던 자로서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 자였습니다. 평생에 단 한순간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아온 날이 없음을 고백하는 자였기에 하나님이 기름 부어 왕을 삼은 자를 감히 해할 수 없으며 마음으로도 사울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사울에게 당한 수욕을 덮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사울이 자신에게 주었던 수욕보다 훨씬 더 큰 것임을 알았기에 사울을 용서할 수 있었고, 사울이 죽는 날까지 그에 대한 원망을 품지 않고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존재 가치의 근간을 하나님께 두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자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인 예수님의 사랑을 덧입은 자로서 우리가 당하는 수욕을 덮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당한 수욕은 다윗과 또 우리 인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사랑은 이 땅에서 당하신 수욕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기 때문에 그 모든 수욕을 다 덮으심으로 그 사랑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크고 완전한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덮으신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어 우리가 당하는 어떠한 수욕도 덮을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은 자로서 어떠한 수욕도 덮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살고 있나요?
마 18:21-35의 내용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줄까요? 일곱 번이면 충분하죠?’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시면서 빚진 자가 주인에게 탕감을 받는 비유로 답을 대신하십니다.
주인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아 만 달란트(약 20조원)를 탕감 받은 자가 자신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약 7-800만원) 빚 진자를 독촉하여 감옥에 가둡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만 달란트를 빚진 자 역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을 받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당하는 수욕을 덮기는커녕 도리어 받은 수욕을 수십 배 수백 배로 되갚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수욕을 덮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원수가 아니라,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녀, 내 부모 한 사람 조차 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값없이 받은 자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수욕을 덮으시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 비로소 수욕을 덮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 수욕을 덮지 못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분노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내가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할 수 있기를 구하여 감당할 수 없는 은혜 가운데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놀라운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삶에 여전히 나타나는 미련한 자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면 이제는 악함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존재 가치를 하나님께 두어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삶에서 흘러내는 지혜로운 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