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2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제 인생에 가장 영향을 미친 감정을 꼽는다면 아마 불안일 것입니다. 20대 초 만해도 저는 몸이 너무 약하고 피곤하고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고 긴장도 많이 해서 서른 살까지나 살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습니다. 몸이 약했던 이유는 마음이 약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불안으로 위태롭던 저는,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며 가족의 기반이 해체되자 결국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불안은 두려움에 기반을 둔 감정으로 항상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운전하다 가끔 과속을 하더라도 200km로 달리지는 않습니다. 빨리 달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 때문입니다. 이렇듯 불안은 위험한 일을 꺼리게 도와줌으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불안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불안이 과도할 때입니다. 불안은 구체적인 상황이 아니라 막연함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기의 상상이 공포가 되어 일상 생활까지 방해하게 되는 것을 불안장애라고 합니다. 불안장애는 현저한 신체의 증상들을 동반합니다. 초조하고, 두근거리고, 배가 아프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피곤함을 느끼고, 근육은 긴장되어 힘들고, 잠을 자지 못합니다.
불안장애의 일종이 공황장애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강박장애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불안의 원인과 증상은 무엇이며 이에 대한 영적인 답은 무엇인가 본문을 통해 함께 배우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1. 인생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vv.1-2
첫 번째로 인생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사람들이 안정의 기반으로 삼는 중요한 두 가지 대상인 집과 성이 나옵니다. 이 시대로 치면 가정과 국가일 것입니다. 가정이 깨진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본질에는 안정된 기반을 빼앗겼다는 감정이 있는 것으로, 울타리가 없다는 불안감이 한 사람을 파괴하고 고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국가 자체가 붕괴 된다면 안정을 지키려는 개인의 노력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나라가 망하고, 전쟁이 나고 재난을 당했을 때 개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수차례 목격했습니다. 이런 불안한 마음에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뉴스를 통해 계속 보고 있습니다. 나라의 선택이 개인의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인가요? 아무리 국가나 개인이 애써 보아도 현상을 요동케 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고, 예상치 못한 문제가 항상 생깁니다. 본문은 너희가 애써서 될 일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하나님이 가정과 국가에 개입하시지 않으면 안정과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불안은 내 능력을 뛰어 넘는 영역에 대해 개인이 너무 많은 책임감을 스스로 지고 그곳을 안정되게 만들려고 하는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즉 불안이 큰 사람은 사실 안정에 대한 욕구가 너무 큰 것입니다. 안정감을 유지하기 위해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가정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할수록 통제를 하고, 가정이 흔들리는 상황에 대해서는 불안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모든 상황에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 가정, 심지어 국가까지 모든 외적 환경에 대해 안정감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영적으로 인간은 절대 안정과 통제를 이룰 수 없습니다. 가정과 국가만 안정된다면, 다른 것들은 요동해도 괜찮은가요? 인간이 안정감을 원하는 두 번째 영역이 2절에 나옵니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잠은 평안한 사람에게 옵니다. 예민한 사람은 사소한 변화에도 잠을 설칩니다. 하나님이 잠을 주신다는 것은 평안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선 구절이 무엇입니까?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종일 수고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일찍 일어나서 늦게 잘까요?
안정감의 중요한 요소인 경제적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모두 경제적으로 안정되길 원합니다. 현대인의 큰 열망은 어쩌면 가정과 국가보다 돈인지도 모릅니다. 옛날에는 돈이 없어도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뒤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영역을 물질로 채우려고 하면 불안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불안감이 너무 크다면 어쩌면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돈을 지금보다 열배를 벌어도 불안할 수 있습니다. 돈이 아니라 인생의 주도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불안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믿지 못하여 내 기준, 내 힘으로 상황을 안정하게 만들려는 욕구가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이 되어 내 생각대로 내 인생을 만들고 싶은데 그것이 무너지면서 불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영적 불안은, 우리가 하나님이 아님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감정입니다. 불안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제가 제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제가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해 오시면 불안을 통해 오히려 영적으로 진짜 자유롭게 되는 그 은혜의 자리로 인도에 나가실 것입니다.
저는 제가 불안하고 안정감을 간절히 원하는 자인지 젊어서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가 불안하고 몸이 아픈 이유는 그냥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고 아버지가 감옥에 가시고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자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때 온몸이 마비되어 쓰러졌을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다시 돌려주세요. 가정의 안정과 돈도 주세요.’ 제가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줄 알 정도로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안정감의 우상을 섬겼던 자였습니다. 이름은 하나님이고 이름은 예수님이었지만 나에게는 안정이 너무나 중요하니까 우상에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환경이 변하지 않자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목사가 되고 유학을 갔는데 불안과 대면하는 이 훈련이 계속되었습니다. 10년 동안 극단의 상황에 몰려가며 말로는 할 수 없는 과정을 지나고 불안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경험한 것이, 내가 내 인생을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인생을 통제하고 싶은 자체가 내가 주도권을 잡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무서운 죄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저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만약 제가 계속 안정의 우상을 여전히 섬겼다면 저는 상황마다 튀어나오는 불안으로 인해 고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우상숭배가 무너지고 불안으로부터 자유해진 은혜로 인해 이제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하나님의 뜻이 옳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어떻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2. 부정적 인식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vv.3-5
두 번째로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부정적인 인식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자주 불안한 사람들은 주변의 부정적 정보를 집중적으로 받아들이는, 어쩌면 인식장애와 같은 현상을 겪습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도 불안이 큰 사람은 나쁜 일만 집중해서 봅니다.
뉴스에서도 좋은 이야기는 잘 하지 않고 나쁜 일들만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도 성공도 경험하고 실패도 경험하겠지만 내가 실패했던 것들에 집중하여 불안을 스스로 가중시킵니다. 이것이 심화되는 것이 자녀입니다. 자녀에게서 자기나 배우자의 단점이 보이면 불안해합니다.
그 불안을 다스리려는 결과가 통제와 회피로 나타납니다. 어려서는 먹는 것, 입는 것부터 커가면서는 게임, 친구 등 모든 것을 통제하다가 자녀가 독립적인 자아로 성장하지 못하거나 관계가 깨어집니다. 반대로 회피도 문제입니다. 어느 정도 통제하다가 자녀가 심하게 반발하는 경우 두 손을 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방임하면 아이는 인생의 틀을 배우지 못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경계를 분간해야 합니다. 마약, 도박 등 선을 넘는 자들은 틀을 배우지 못한 자들로, 일정 부문 부모의 불안이 영향을 미친 결과입니다. 이 불안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본문에 나오듯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이 구절은 병행법으로, 앞뒤가 똑같은 문장입니다. ‘자식’과 ‘태의 열매’가 같고, ‘기업’과 ‘상급’이 같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는 대상이 태의 열매입니다. 태어나지도 않았고 살면서 어떤 일을 이룰지 모르는 자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기업이며 상급이라고 합니다.
멋진 성과를 내거나 공부를 잘하는 등의 조건이 없이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내지 않는 아이를 창피해 합니다. 상급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영적 의미로 주신 것입니다. 4절과 5절입니다.
[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자녀가 많으면 싸움에서 이긴다는 1차원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원수는 마귀입니다. 즉 자녀로 인해 우리가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면 자녀가 하나님의 기업으로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업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언제 수치스러울까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져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지 못할 때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마귀 앞에 떳떳하기 위해서는 돈도 명예도 학벌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역할을 자녀가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윗과 압살롬입니다.
다윗과 같은 훌륭한 왕에게 어떻게 압살롬 같이 악한 놈이 태어났을까요? 그러나 다윗이 끝까지 다윗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압살롬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사울에게 쫓긴 긴 시간보다 압살롬에게 쫓긴 짧은 시간이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식에게 죽을까봐 맨발로 도망치고, 첩들은 아들에게 강간당하고, 심지어 그 아들이 죽는 것을 보는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러나 다윗이 어떠했나요? 다윗도 왕이 되고 편안하자 욕심과 죄가 튀어나왔습니다. 사무엘상이 끝나자마자 사무엘하가 어떻게 시작하나요? 밧세바를 취해 아내로 삼고 우리야를 죽이고 주변 국가들을 잔인하게 징벌하고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세상 왕의 방식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한 달란트 되는 왕관을 뺏고 자랑하는 인간으로 변하고 있을 즈음에 압살롬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편안하던 다윗, 사울처럼 될 뻔한 다윗을, 하나님이 압살롬으로 인해 다윗이 다윗으로 머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결국 다윗이 인생을 마무리할 때 그가 원수 마귀 앞에서 수치스럽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녀가 말 잘 듣고 공부 잘하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통치할 수 없는 그 아이를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혹시 효심도 크고 공부 잘하는 자녀가 있다면 감사하시면 됩니다. 혹시 그런 아이가 아니라면, 나중에 원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셨음에 여전히 감사하시면 됩니다.
어떤 장로님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전교 1, 2등을 하자 아들에 대한 기대가 크셨는데 아들이 게임에 빠져 성적이 떨어지자 컴퓨터도 부수고 아들을 때리며 갈등이 심해졌습니다. 아들은 피시방으로 돌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또 때리고 그러기를 2년 여간 하다 어느날 아이가 문을 잠근 후 아이는 20여 년간 방에서 나오지 않으며 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그럭저럭 다니던 교회를 다니고 새벽기도도 시작하셨습니다. 누가 들을까봐 남들이 다 가고 난 뒤 울며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다 믿음이 생기셨습니다. 그래서 안수집사와 장로님이 되시며 세월이 20년이 흘렀는데 어느 날 기도하시다 내가 어떻게 기도를 하게 되었나?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었나?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아들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나를 구원하고자 하나님이 아들을 사용하셨구나’ 고백하셨습니다. 그래서 엉엉 울며 회개하고 나서 아들에게도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고 진심을 담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다음날 아침에 20년 만에 쓰레기를 치웠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아들이 조금씩 바뀌어 아버지의 작은 사업을 물려받을 정도로 사회성도 생기고, 아버지는 은퇴하시고 시골로 내려가시려는 준비 과정에서 제 설교를 듣고 본인의 얘기를 해 주신 것입니다. 장로님의 고백대로 이 아들이 이 분의 기업이며 상급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나갈 때는 저주인 것 같은 고통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볼 때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며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을 때 우리는 원수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하나님만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불안 중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므로 불안을 벗어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