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계 21:3-4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누구도 울지 않는 밤’이라는 단편소설집이 있습니다. 누구도 울지 않는다고 제목을 붙여놨지만, 열 편의 단편은 사람들이 얼마나 비극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그리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고통으로 인한 슬픔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역설적인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주 울고 슬픔을 표현하면서 부정적 감정들을 해결해 나갑니다. 그러나 세상은 슬픔을 과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들기에 어른들은 우는 법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힘들고 아픈데 울지 못하면 내면에 부정적 에너지가 쌓여 결국 그 사람을 파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슬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슬픔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1. 천국 소망을 붙들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계 21:3-4
첫 번째로 천국 소망을 붙들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3절, 4절을 읽겠습니다.
계 21:3-4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시록 21장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기 전에 세상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요? 눈물과 애통과 곡하는 것이며 그 원인은 아픈 것이나 사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반드시 아픔을 경험할 뿐 아니라 본인 혹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결국 슬픔은 인간이 가장 열망하는 근원적 욕망이 좌절될 때 찾아옵니다. 지난 주에는 욕망이 좌절될 때 사람은 분노를 느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분노와 슬픔이 같은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슬픔은 분노보다 더욱 근원적이고 깊은 욕망의 좌절로 말미암습니다.
예를 들어 약속 시간을 맞추려고 하는데 차가 막혀서 시간을 못 지키게 될 때 우리는 슬픔보다는 화가 납니다. 그런데 차가 막혀서 면접을 놓쳐 취업을 못하게 되었다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단순한 분노가 아닌 깊은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슬픔은 당연하고 기본적인 열망이 회복될 수 없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가장 깊은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상실로 인한 슬픔입니다. 애인과 헤어지고 많이 슬퍼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회복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죽음입니다. 시간과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다 유한하기에,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마다 우리는 깊은 상실감을 느낍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야 하고, 성취하고 싶은 것이 좌절될 때, 회복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또한 슬픔을 경험합니다. 대학에 낙방했을 때, 취업에 실패했을 때, 혹은 원하는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또한 깊은 슬픔을 경험합니다.
슬픔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슬픔을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일시적이고 자극적인 쾌락, 관계, 음식, 영상들을 통해, 내면에 출렁이는 슬픔의 파도를 다루지 않는다면 장기적인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또 다른 반응은 무기력에 빠지는 것입니다. 슬픔이 너무 커서 존재가 마비되어 아무 일에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해야 될 일을 하지 못하고 침잠되어 갑니다.
성도에게도 이런 슬픔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통곡이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왜 개입하시지 않나요? 왜 슬픔에서 우리를 빨리 건져주시지 않나요? 우리 믿음이나 헌신이 부족한가요?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은 자신의 상태를 계시록 1장 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계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쓸 때 약 95세였습니다. 밧모는 죄수들에게 바윗돌을 캐는 노동을 시키던 혹독한 노역장이었습니다. 2천 년 전에 90세 넘은 노인이 채석장에서 노동을 하며 ‘환난’으로 인해 고통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으로 무엇을 얻게 되었나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육적 존재로 태어나 육적 존재로 살아갑니다. 처음부터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하나님과 관계 맺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게 만들어졌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서 처음엔 희미하던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육적 영향력이 너무 강력합니다. 눈으로 보고, 이 땅에서 누리고 즐기는 육적 삶이 너무나 강력하게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쫓아다니면서 힘들게 하시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약점과 다양한 상황을 통해 자연스럽게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만히 앉아있고, 교회만 다녔는데 하나님을 점점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고난은 물론 힘들지만, 이 고난을 지나면서 육에 매인 우리의 눈은 하나님을 향해 열리게 됩니다. 우리의 육은 처음에는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원하지 않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건강 식품을 좋아하는 아이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원하는 것만 먹어서는 몸이 아프며, 쓰더라도 몸에 좋은 것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태어나기를 육적인 것을 좋아하도록 태어났고 그렇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고난으로 영적인 눈이 열리면, 육적인 것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 속에서 영적인 것을 발견했다지만, 상실과 좌절은 어떻게 하나요? 바로 그래서 하나님의 큰 약속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3] …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여기서 뭔가를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이 우리 보호자가 되시는 것이 가장 큰 회복이며 약속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은 고통이지만 결국 인간의 사랑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늘 양가 감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물론 그 나라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이 땅과 같지 않아서, 남편과 아내와 독점적 관계로 사는 것이 아니고, 천사와 같이 모두와 완전하고 온전한 관계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회복이며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직도 육적 차원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 슬픔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을 통해 육신이 약해져야만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고난을 통해 슬픔을 경험하더라도 이것으로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슬픔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2. 옛 자아의 죽음의 과정으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마 5:4
두 번째로 슬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옛 자아의 죽음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입니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사람들은 본문의 한 두 구절만 임의로 떼어 좋아하기도 하지만 팔복은 서로 연결된 것입니다. ‘애통하다’는 슬픔을 표현하는 성경의 단어 가운데 가장 강력한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벌에 쏘였다고 애통하지 않습니다. 애통은 가장 깊은 슬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 정도의 슬픔을 표현합니다. 이런 애통이 왜 복인가요? 앞 절인 3절에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물론 좋지만 이것은 단순한 발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하시면 하실수록 사실 죄성에 물든 우리 옛 자아는 하나님과 충돌합니다. 결혼관계에서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면 서로 바꾸고 맞춰갑니다.
그러면 하나님과는 어떤가요?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우리가 바꾸고 맞추어야 합니다. 맞춘다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기성을 벗어나 사랑하는 존재가 되고, 돈을 의존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 옛자아의 선과 충돌합니다.
이 둘이 충돌하면 누가 이길까요?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존재로 우리를 변화시키기 원하십니다. 성격이 급하거나 느린 경향성 자체는 잘 변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순종하고 성장하는 것은 변해 갑니다. 즉, 하나님이 이기시기 때문에 우리의 옛 자아가 죽기 시작합니다.
죽는다고 해서 자아가 단번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자꾸 무력하게 만드십니다. 내 욕망을 이루며 이기적으로 살려고 하는 근본을 건드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성, 연약함, 우리 주변 사람들의 연약함과 환경을 사용하셔서 각자의 인생에 개입하십니다.
이 은혜의 개입을 우리는 고난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반복적으로 지나가는 옛자아의 죽음의 과정을 환난이라고도 부릅니다. 환난의 원래 뜻은 ‘탈곡기’라는 뜻입니다. 수확 후 알맹이만 남기기 위해 껍질을 벗겨내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 인생에 좋은 것만 남기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새 사람을 만들어 내셨는데, 그것이 옛사람의 껍데기 안에 갇혀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기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하며 원하는 대로 인생이 되기를 원하는 그 껍데기를 하나님이 벗겨내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잘 순종한 자만이 위로를 경험합니다.
이 위로는 ‘잘 될 거야’ 같은 근거 없는 희망이 아닙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위로하다’인 ‘파라클레오’는 ‘보혜사’라고 번역되는 ‘파라클레토스’의 동사형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옆에서 이야기하는 분이라는 뜻이니까,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위로’는 하나님이 옆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으면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들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듣고 싶은 음성이 아니어서입니다.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을 밟아주고 싶은데 하나님은 잘못한 게 없어도 잘못했다고 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안 들리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과정을 거쳐, 자아의 욕망이 깨어지고, 새 사람이 커지면 하나님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립니다. 그 음성을 듣는 것을 성경은 ‘성화되고 있다’고도 표현합니다. 이 이야기가 구약의 한 인물의 인생에 펼쳐집니다. 창세기 32장 28절입니다.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의 이름 뜻은 ‘빼앗는 자, 취하는 자, 속이는 자’로 옛사람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것이든 형의 것이든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걸 가진 사람을 어떻게든 속여서 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을 축복하셨습니다. 어떤 축복인가요?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그가 더 이상 야곱으로 살 수 없게 개입하시는 축복입니다.
야곱은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는 형을 마주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이기적인 선택을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혼자 도망가기 위해 가족을 모두 강 건너 보내고 혼자 남은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천사로 찾아오셔서 밤새 씨름을 하십니다. 옛 자아의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하나님에게도 지지 않자 하나님은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부러뜨리십니다.
즉 하나님은 힘의 근원을 파괴해버리시고 너는 속이는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기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애통하여 자아가 힘을 잃어버리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상태를 성경은 ‘온유’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입니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는 원래 야생마, 야생소가 멍에를 매고 시간이 지나 주인의 말을 잘 듣게 된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천방지축이던 말이 주인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이 온유입니다. 내가 사랑하던 가치를 내려놓는 고통을 통해 우리는 애통하며 온유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온유한 자에게는 땅이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5장 6절부터 어떤 땅이 주어지나요? 공의가 없고,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분쟁과 갈등이 많은 땅에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뜻을 따라 섬길 때 그 안에 빛이 임하며 생명이 흘러가게 됩니다. 온유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 다스리는 곳에는 고통과 아픔만이 있습니다.
고통으로 인한 슬픔이 제 인생에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슬프고 애통했던 때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던 2년이었습니다. 물론 유학 중에도 힘들었지만 그 때는, 귀국하면 보상이 주어지리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빙은 커녕 집도 없어서 친한 목사님 교회의 지하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잠시 있다 옮길 줄 알고 옷가지만 챙겨서 갔는데 그때부터 지하의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물리적 공간이 문제가 아닌 존재 목적이 사라진 시간이었습니다.
점점 불안해지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저처럼 힘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얘기해보니 아내는 오히려 매일 새벽기도를 나가며 은혜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저는 새벽기도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집 앞으로 교인들이 지나다니셔서 울지도 못해서 안양천을 걸으며 고개를 숙이고 울었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울었을까요? 너무 큰 좌절을 경험해서입니다. 내가 원한 목표가 있었는데 남의 교회 지하실에서 살면서 길거리에서 눈물을 흘리는 무능. 성경을 왜 봐야 되는지, 뭐라고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방황하는 기간이 2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췌장암에 걸리셨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목회를 성공하기 원하는 제 열망만큼이나 어머니의 열망이 크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어머니의 우상이었는데 제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상태로 사니까 어머니가 아프셨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수술을 앞둔 수요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7백 여 명이 들어가는 본당의 맨 뒷 줄에 앉아, 예배후 불을 끄고 개인기도를 시작하는데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왜 고통스럽고 죽을 것 같은지 생각을 해보니 어머니가 아프신 것도 있지만, 나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게 된 것, 목회도 실패하고, 지하실에 살다 끝날 인생이 억울하고 슬펐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하나님을 위해 목회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북한도 구원하고 한국 교회도 구원하리라는 열망이 있었는데 울다 울다 보니 결국 나를 위해서 성공을 꿈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아무 생각도 없고 내가 잘나고 멋지게 해내서 어머니께도 증명해드리고 나 자신한테도 내가 열심히 살고 기도 많이 해서 성공했으니까 나는 괜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저의 마음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저를 위해 목회하려고 했군요.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목회를 막으셨군요. 그럼 포기하겠습니다.’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하실로 보내셨다면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언제든 벗어나기를 바라며 2년을 냉장고 없이 살고 있었는데, 그 기도회가 끝나고 제일 먼저 냉장고를 샀습니다. 하나님이 살라고 하신 곳에 살겠다는 저의 결단의 징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되지 않아 하나님이 개척하라고 사인을 주셨습니다.
사인만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심하게 통곡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교인들께서 돈을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를 주셨는지 수술비, 병원비를 내고도 남아서 개척 시작하며 필요한 집기들도 살 수 있었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어머니의 수술과 회복 과정에 제가 여러 번 더 울며 어머니와 의존되어 있던 영적 고리들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슬프긴 했지만 그로 인해 제 인생이 파괴되거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축복은 제가 열망하던 목회적 성공이라는 자아의 열망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제가 기대했던 성공의 기준에 의하면 지금의 저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가 감당할 수도 없고 제 옷도 아닌, 화려하고 멋있는 거인이 되기를 꿈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거짓을 내려놓고, 제가 감당할 수 있고 저에게 맞는 옷을 주기 원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사랑교회였습니다. 제가 아마 그 때 애통하며 옛사람을 내려놓지 못했으면 아마 개척 이후에도 저는 교회가 커지기를 바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불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9년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슬픔의 능력이고 통곡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인생에도 여러분이 꿈꾸고 열망하던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열망했던 그 어떤 것보다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