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인생을 살다 보면 창피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실수를 해서 수치를 느낀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지만 이것이 심한 사람은 일상에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이들은 첫 번째로 자기를 드러내기를 꺼려합니다. 혹시 자기가 한 말이 약점이 될까봐 자기를 감춥니다. 두 번째는 타인의 시선에 아주 민감합니다. 자기의 선호도에 관계없이 늘 타인 중심으로 결정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자기 기대만큼 반응해주지 않으면 그들을 쉽게 오해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이렇듯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시선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타인의 말이나 행동을 자주 오해한다면 관계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밖에서 자기의 약점을 들키지 않고자 몸부림치기 때문에 집에 오면 에너지가 고갈되어 가족에게 쉽게 화를 내고 신경질적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도대체 수치감이 무엇이길래 사람이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수치감은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되긴 합니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한 사람이 수치감이 크기 마련입니다. 수치감은 특히 유년기의 가족적 배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부모로부터 자주 지적을 당하고 칭찬을 받지 못한 아이는 자존감이 낮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자존감이 높으면 모든 수치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아도 영적으로 시작된 수치감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수치감이 아주 심각한 축에 속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또한 남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하거나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에서 자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치감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수치감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인간이 타락하게 된 뱀의 유혹이 시작되는 창세기의 장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은, 눈에 보이는 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였습니다. 뱀의 질문의 핵심이 무엇인가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로 부정적인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열매를 먹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단,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 하나만 뺀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이 마치 모든 것을 금하신 것처럼 접근한 것입니다. 그 때 2절과 3절에서 여자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말씀에 대한 부정확함입니다. 이단 역시 그러합니다. 이단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새로운 신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단이 아니라 타종교입니다. 그런데 이단은 우리와 같은 성경을 쓰면서 성경의 일부를 왜곡합니다. 지금 하와도 말씀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과 17절입니다.
2:16-17 [16] …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죽을까 하노라’라고 기억한 것입니다. 이런 모호한 반응, 진리를 왜곡하는 반응은 결국 유혹에 넘어지는 걸림돌이 됩니다. 모호한 하와에게 뱀이 어떻게 단호하게 이야기 합니까? 4절입니다.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여자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애매하게 답한 틈을 타 뱀이 ‘절대 죽지 않는다’고 하자, 이 지점에서 하와가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은 쉽게 구별해 냅니다. 이단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이 영향력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단 교주가 자신이 메시아라는 자기 확신으로 이것을 하라, 이 사람과 결혼하라, 이 정도를 바치라 라고 단호하게 얘기를 하면, 자신과 세계에 대해 불확실하고 모호한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벗어나고자 무조건 말을 듣게 됩니다. 이단들이 행하는 모습이 정확히 뱀의 패턴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 뭐라고 이야기하나요?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이 다 거짓인가요? 진리와 거짓이 섞여 있습니다. 눈이 밝아지긴 밝아집니다. 그래서 다음 절에 여자 눈이 밝아집니다. 그러나 무슨 눈이 밝아졌나요? 육적인 눈입니다. 그 대신 영적인 눈은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본질, 즉 영적 존재가 육신을 통제하여, 영이 인간을 지배하는 인생으로 살게 되어 있던 우리가, 영적 영향력이 사라지는 순간 육적인 존재만 남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선악을 스스로 분별하는 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무서운 죄악의 반응입니다. 죄는 영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져서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가장 중요한 근원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것을 말씀하셔도 인간은 육적인 눈에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좋지 않다는 결론 내리게 됩니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하고 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여자는 이미 마음이 넘어갔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이미 6절상반절에
[6a]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
이전에 늘 있던 나무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만 다른 나무들보다 가장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게 만드셨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내 욕구가 충족된다고 마음이 먼저 유혹을 받자 여자 눈에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결국 6절 하반절에서 무엇으로 연결되나요?
[6b] …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아담은 뱀과 직접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여자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암묵적 동의로 남자도 똑같이 유혹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의 행동에 제재를 가하지 않고 함께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 결과를 7절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뱀의 약속대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어떤 눈이라고 했나요? 육적인 것만 보는 눈입니다. 이전에도 인간은 벗은 채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벗은 것이 부끄럽다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나를 비추어 보아 모자르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담과 하나밖에 없는데 도대체 무엇이 부끄러운 것인가요? 이것이 바로 죄가 가져온 영적 변화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은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다른 짐승들 앞에 부끄러운 근원적 수치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 있을 때는 이런 육적 연약함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아름답고 온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몸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완벽했던 몸이 선악과를 따먹고 배가나오고 주름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몸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인간이 원래 만들어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어진, 별것 아닌 존재입니다. 별것 아닌 몸에 열심히 운동을 하여 근육을 붙이거나, 별것 아닌 몸에 화장을 하여 예뻐지는 그 정도 수준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진짜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을 갖기 위해서는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에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육체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 육체 안에 하나님의 영을 담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속성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본질은 거룩과 사랑입니다.
거룩은 영적으로 세속과 구별되는 온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거룩하지 않은 육적인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타락하여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부정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또 하나님의 관계적 속성인 사랑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인간이 영적으로는 거룩하고, 관계적으로는 사랑이 가득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여 영광스럽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아름다운 거룩과 사랑 대신 부정함과 이기심이 인간의 실체가 되어버렸습니다.
끊임없는 욕망과 이기심이 관계를 파괴하는 영향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영적 근원입니다. 우리가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서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근원 적으로 원래 인간이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이 사라지고 별것 아닌 존재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우리의 수치인 것입니다.
인간은 DNA가 생김새가 비슷한 동물과 견줄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하여서 인간만이 거룩하고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는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자체가 왜곡되어 버렸습니다. 이 수치감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강렬합니다.
물론 인정받아야 합니다. 누군가 우리를 늘 지적하고 나무란다면 우리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정에 대한 강렬한 열망의 문제는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욕망과 결부되어서 단순히 칭찬을 받고 싶은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열 사람이 칭찬해도 한 사람이 부정적인 반응을 하면 그것으로 파괴될 정도의 영향력을 미칩니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것을 자녀를 통해 이루려고 기를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학령기 아이들 수는 줄고 있는데 사교육비는 역대 최고 기록을 갱신하며 26조원 정도로 치솟았다고 합니다. 물론 공부를 좋아하고 잘하는 아이들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권리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닦달하고 관계를 파괴하며 아이들을 몰아 부치는 것은 부모의 수치감과 열등감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수치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언제 영광스러워지나요? 인간이 가장 영광스러울 수 있는 길은 하나님 모습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무엇인지는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을 보시면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의 본질은 아름답습니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영적인 가치와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는 모습이 정말 영광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나요? 그 과정은 참혹했지만 그 결과로 놀라운 하나님의 거룩이 죄를 해결 하고 그 사랑이 죄인들을 구원했습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좋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존재가 되지 못해도, 우리를 통해 거룩이 드러나 죄가 해결되고, 우리 같은 이기적인 사람을 통해 사랑이 흘러간다면 이것이 영광입니다. 이 영적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근원적 수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의 인생에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있습니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믿어도 인생이 고달픈 것은, 우리 자체의 본질로는 예수의 생명을 드러내는 것이 가치있고 영광스럽다는 사실을 인정 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깎아 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린도후서 4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환난은 제가 늘 말씀드리듯 탈곡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볍씨의 껍데기를 떨어내면 알곡이 남듯이 우리 안에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환난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환난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환난이 아니고는 우리 영혼을 지배하는 이 강렬한 영향력이 우리 안에서 잘려져 나갈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이 잘라져 나간 만큼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을 넣으시면, 거룩과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수치감을 벗어나 하나님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