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지난 주에는 예배가 하나님을 가장 가치 있는 대상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즉 영적 예배의 본질은 죄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우리 존재 자체를 하나님께 헌신하며 세상의 영향력을 멀리해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순종해 나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예배이며 이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죄의 영향력과 세상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자기중심적 속성을 가지게 되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고 나의 유익을 취하려고 하니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쉽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 가르치시고자 예수님은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누구보다 열렬한 예배자였습니다. 그가 무엇을 예배했는지 18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남편이 6명이나 되는 여인이 어떻게 예배자일까요? 예배는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한 간절한 의존과 사랑을 말합니다. 즉 이 여인의 예배의 대상은 남자였습니다. 아마 남자에게서 사랑, 인정, 재물, 안정 등을 기대하며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 원함이 너무 강렬하다 보니 결혼을 다섯 번이나 하고 여섯 번째 남자랑 살면서 기대를 놓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2천 년 전 사건입니다. 현대에도 평균적이지 않은 일이, 결혼관이 훨씬 엄격했던 고대에서는 더욱 받아들여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현대에서 이 여인과 가장 비슷한 사람을 찾자면 8번 결혼하고 8번 이혼한 미국의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일 것입니다. 테일러는 20세기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 꼽힐 정도로 미모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이 여인을 얻고자 애썼을까요?
18살에 힐튼 호텔 상속자와 올린 첫 번째 결혼이 2년도 되지 않아 끝난 이후 몇 년마다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습니다. 누군가가 잦은 이혼에 대해 물어봤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 필요로 했던 것은 그런 보석들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단 그것뿐이었습니다.’
부자, 가수, 배우, 정치인 등 많은 남자들은 보석으로 테일러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겠지만 결국 진실한 사랑을 준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60살이 넘어서 마지막 결혼을 돈 한 푼 없는 20살 연하 건설 노동자와 했지만 이것 역시 이혼으로 끝났습니다.
수가 성 여인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왜 이렇게 많이 결혼했을까요? 누구보다 강렬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만족시켜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는데 그것을 얻을 능력이 있었으니까 결혼을 많이 한 것입니다.
아마 수가 성 여인도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한 명이 떠나가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끌린 남자가 계속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갈망이 큰 사람일수록 내면은 불안정하고 분노가 많습니다.
갈망이 적은 사람은 별로 화가 나지 않습니다. 음식에 대한 기호가 탁월하지 않은 사람은 매 끼니 같은 음식을 먹어도 괜찮고, 맛이 없는 음식을 먹어도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데 미식가들 혹은 감각이 예민하고 욕망이 큰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큰 만족을 찾길 원하기 때문에 만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수가 성 여인도 갈망이 커서 남자를 골랐는데 영혼의 갈망이 채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외모는 아름답다 해도 내면이 불안정하고 불만족으로 인해 분노가 가득한 사람은 짜증과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기 마련입니다. 결국 남자들이 오래 견디지 못하고 떠나간 것입니다.
우리도 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의 영혼을 채워줄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예배자들입니다. 나이나 상황, 기질에 따라 예배의 대상이 계속 바뀝니다. 사람, 인정, 칭찬, 행복, 돈, 쾌락 등을 예배하고, 그에 대한 갈망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고통이 커지게 됩니다.
다섯 번 결혼하고 이혼하는 것이 쉬웠을까요? 인생의 고통을 점수화한 ‘스트레스 지수’ 표에 의하면 가장 고통스러운 일 3등은 배우자와의 별거, 2등은 이혼, 그리고 1위는 배우자와의 사별이라고 합니다. 즉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친밀한 관계의 단절이라는 것입니다.
이 수가 성 여인은 인생에서 엄청나게 큰 고통을 다섯 번 경험한 것입니다. 내적 갈망이 큰 사람들은 그 대가로 고통을 견뎌내야만 합니다.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은 그를 이용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돈만 쫓는 사람은 건강과 가족을 잃을 위험, 적은 돈으로 큰 돈을 번다는 사기에 휘말릴 위험, 남을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자신을 실패자로 생각할 위험 등에 노출됩니다. 쾌락을 예배하며 마약에 손을 대는 것도 건강과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수가성 여인이 드린 예배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잘못된 대상을 예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만족하도록 만드시지 않았다는 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자 눈에 보이는 것만 의존하고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만나 ‘너는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여태까지 갈망했는가’를 이야기하시자 이 여인이 예수님이 선지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예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20절입니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남편 이야기를 하다 왜 갑자기 예배 이야기를 하나요? 이 여인은 다섯 번 이혼하면서 고통하다 갈망을 해결할 종교적 방법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자기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과 여자라는 것이 장애물이 되어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져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싶은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사마리아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 여인도 그곳에서 예배를 드려봤겠지만 모조품으로는 갈망이 채워질리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여인들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방인도 다니고 장사치들도 있는 광장에 해당하는 ‘여인의 뜰’까지밖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여인은 여자로서, 이방인으로서의 한계 때문에 예배를 못 드려서 고통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21절입니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나님은 깊은 갈망을 채우고자 하는 자들을 찾아오시기에 때로는 갈망의 대가인 고통을 허용하십니다. 다양한 종류의 갈망이 인생에서 채워지지 않아 그 방향성을 하나님께 돌리고 거기서 문득 맛보는 은혜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참된 예배의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다면 참된 예배는 어떻게 드릴 수 있나요?
참된 예배는 어떻게 드릴 수 있나요?
1.성령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성령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23절과 24절 말씀입니다.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전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해서 오해를 낳곤 했습니다만 개역 개정판의 ‘영과 진리’가 훨씬 좋은 번역입니다. 사실 ‘영’보다 더 정확한 번역은 ‘성령’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인가요? 예배는 하나님만을 유일한 가치의 대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인데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는 절대로 어두운 눈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믿고 의존할 수 있나요? 이것이 자연인인 우리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게 되고 그 분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열심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이 하신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하시고, 믿지 못하는 것을 믿게 하시고, 알지 못하던 대상을 알게 해주시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이끄십니다.
이젠 모든 장벽이 사라지니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자건 남자건 어린아이건 노인이건 흑인이건 백인이건 누구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유일한 경배의 대상으로 높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을 높이고 예배하는 존재들입니다. 돈을 예배하는 이유도 사실은 내가 높아지고 숭배받기 원해서입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예배의 끝에는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선악과를 따먹은 죄성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만을 예배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낮추게 됩니다. 내 감정, 내 욕망, 내 뜻이 점점 약해지게 하시고 하나님만 높임 받는 일을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과 반대되는 악령은 무슨 일을 하나요? 한 존재가 자신만 숭배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대표적인 예가 사무엘상 18장 7절과 8절에 나옵니다.
삼상 18:7-8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다윗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입니다. 사울 자신도 두려워서 용기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 소년이 골리앗을 물리쳤으니 칭찬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인데 사울 안에 순간적으로 질투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자신만이 높아지고자 했는데 다른 사람이 더 칭송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악령이 임합니다. 사무엘상 18장 10절과 11절입니다.
삼상 18:10-11 [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악령은 나쁜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임의로 임해서 나쁜 짓을 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내면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그 사람의 본질을 강력하게 드러내어 그 힘이 그를 사로잡도록 합니다. 사울은 이미 다윗을 질투하고 미워하고 있었고, 악령이 임하자 그 죄악이 사울을 사로잡아 다윗을 죽이려는 실제 행동으로까지 연결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다 유혹에 쉽게 넘어갈 가능성이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악한 마음이 많은데, 악령이 임하면 우리의 어두운 부분이 커져서 마음의 그릇을 깨뜨리면서까지 흘러나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 나밖에 없고 나에게 방해가 되는 자들을 제거하고자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단 교주들은 정말 악한 영에 사로잡혔다는 것이 너무나 확실합니다. 내면에 이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가 악한 영과 함께 죄를 키워 나가며 자신이 재림주며 성령이라고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대, 이 한국에 악한 영의 역사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만 유일하게 예배하고 계신가요? 예배가 어려울 땐 성령을 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잘 안 보입니다. 제가 자꾸 사람을 의지합니다, 돈을 의지합니다, 쾌락에 유혹됩니다, 안정을 찾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성령을 주셔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는 자리에 서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실 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만 예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어떻게 드릴 수 있나요?
2. 진리로 드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참된 예배는 어떻게 드릴 수 있나요? 진리로 드릴 수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는 요한복음 5장 39절에 나와 있습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진리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이루실 구원 전체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만 말미암고 그래서 구약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죄인을 예수로 구원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즉 위 구절에서 예수님은 ‘구약 성경 전체가 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배는 예수님만으로 드리는 것이기에 예수님이 아니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만이 길이라는 것은 우리의 열심과 종교적 헌신과 헌금은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은혜 외에 하나님께 갈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로 대표적인 예를 보여주십니다. 누가복음 18장 10절부터 14절의 비유입니다.
눅 18:10-14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대표적인 종교적 의를 가진 자는 역시 자신의 배경답게 서서 기도하며 남과 비교합니다. 자기 의는 계속 남을 의식하며 자신이 얼마나 나은지를 가늠합니다. 세리는 가슴을 치며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했는데 결과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했던 헌신, 열심, 남보다 성경 많이 읽은 것, 남보다 기도 많이 한 것 등 예배와 관련해서 자꾸 다른 사람이 생각난다면 여러분은 비진리로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로 예배하기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예수 아니고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과 16절을 보시면
히 4:14, 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것은 죄인들, 내세울 것이 없는 자들에게는 복음입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교회 오다가 가족과 싸웠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붙드는 자는 어떻게 할 수 있나요? ‘하나님 제가 죄인이라 오늘도 싸웠습니다. 그래서 제게 은혜가 필요합니다’라고 고백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 의가 있는 자들은 ‘저 인간이 나보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 왜 나한테 화를 내지’ 생각하면서 예배를 못 드립니다.
은혜가 커질수록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 빨리 나오는 법을 배우게 되고 이것이 성숙입니다. 성숙하지 못하면 자기 죄를 곱씹고, 죄를 곱씹다보면 하나님이 불편해집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여전히 부끄럽고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이 예수로 우리를 용납하심을 알기에 오늘도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성령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