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주일에 와서 1시간을 집중해서 찬양하고 말씀 듣는 것도 물론 집중을 요하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번 시리즈에서 배우는 예배는 매순간 하나님이 중요한 분이시라고 반응하는 영적 태도를 말합니다. 가장 중요하신 하나님께 모든 관심과 집중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물들이 무엇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무엇이 예배를 방해하나요?
1. 우상 숭배적 풍조입니다. vv.5-6a
첫 번째로 무엇이 예배를 방해하나요? 우상 숭배적 풍조입니다. 5절 말씀입니다.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라함이 밧단 아람에서 출발해서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이 무엇인가요? 6절 상반절입니다.
[6a]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가나안 땅에 여러 가지가 있었을 텐데 딱 한 가지 묘사하는 것이 모레 상수리나무입니다. 세겜은 가나안의 중심지이니, 지금으로 말하면 외국에 있던 사람이 한국의 서울에 와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어떤 것을 봤는데 그것이 모레 상수리나무였던 것입니다.
모레는 ‘선생님, 지도자’라는 뜻으로 상수리나무가 그들의 선생님이었던 것입니다. 고대에는 마을 중심에서 큰 나무들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큰 나무에 성황당 혹은 서낭당이라고 이름붙이고 색깔 줄을 매놓고 거기다 절하고 굿을 했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오래된 나무는 신목, 즉 신의 나무로 여겨졌고 그 나무에서 자신의 미래를 점치거나 예언을 받는 일이 흔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장 중심 되는 도시에서 처음 만난 것이 신목, 즉 모레 상수리나무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사람들의 우상 숭배적 경향이 그들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행한 우상숭배와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력을 미쳤는지가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계속 보여집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시스템은 영적으로는 우상숭배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만 들어봐도 그들의 중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나면 가장 많이 하는 얘기는 돈, 자식, 건강 얘기입니다. 물론 우리도 이 얘기들을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돈은 고대나 지금이나 나를 풍요롭게 만들 가장 중요한 우상입니다. 어느 매체에서나 경제 관련 이야기들은 가장 중요하고 개인뿐 아니라 나라의 대표를 뽑는 선택도 좌우합니다. 그래서 총선을 앞두고 후보들은 앞을 다투어 서민들에게 무엇을 무상으로 베풀 것인지를 약속합니다.
또한 모든 부모들은 자식 이야기를 하는데 자식에 대한 관심은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입니다. 아이가 잘 되어서 아이로 인해 인정과 명예를 누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건강이 자기에 대한 관심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즉 세상의 관심의 중심에는 ‘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이곳에서 내가 더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가, 만족할 것인가에만 집중합니다. 또한 ‘남보다’ 더 행복하고 만족하기를 열망합니다. 객관적으로는 70년대보다 훨씬 잘 살게 되었지만 우리는 늘 남과 나를 비교하다 보니 행복도는 낮아졌습니다.
어느 심리학 조사가 있습니다. A회사의 연봉이 5천이고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3천을 받습니다. B회사의 연봉은 7천이고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9천을 받습니다. 객관적으로는 5천 받는 사람보다 7천 받는 사람이 행복할 것 같지만, 누가 더 만족할 것 같은지를 묻는 조사에서 사람들은 A라고 답했습니다. 7천 만 원을 받고도 9천 받는 사람들을 계속 바라보면서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종합해 보면 우상 숭배적 특질은 ‘지금 여기서 내가 남보다 더 행복하기를 끊임없이 열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우상숭배적인가요? 이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끊임없이 내가 어떻게 더 만족할까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이 되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예배자의 관심은 ‘내가 얼마나 만족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게 할 것인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4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딤후 2: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대를 예로 들어 하나님 백성의 삶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징병제에 적용할 수 없지만, 왕을 위하여 자원해서 군인이 되었다면 자원들은 평소에 좋아하던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헌신한 대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던 것을 포기하고, 좋아하지 않던 것도 기꺼이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태도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백성 삼아 주셨으니 우리가 참예배자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일순위가 되어야 하는데, 우상 숭배적 경향은 이 땅에서 행복한 일을 하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입니다.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하나님 중심적으로 산다면 관점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 땅의 삶은 마치 연극처럼 지나가버리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연극에서는 왕이 될 수도 있고, 거지, 심지어 나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연극이 끝나면 왕, 거지, 나무는 아무 의미가 없고 진짜 일상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땅의 삶을 보시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그 ‘찰나’가 60, 80, 100년으로 너무 길어지다 보니 우리가 헷갈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시간을 넘어 진짜 중요한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 따라오는 결과는 질투와 미움과 우월과 좌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남을 사랑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입니다. 남을 미워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세상의 마음으로는 절대 사랑의 관계가 이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입니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우상숭배는 ‘너가 중요해. 잘난 존재가 되어서 너를 증명해. 주변 사람들은 다 너를 위한 도구야’라고 우리를 속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끊임없이 이것과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중심에 놓는 순간 하나님 나라의 시각을 빼앗기고 예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시각을 끊임없이 유지하며 하나님 중심적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막았다 하더라도 우리 옛사람 자체가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구, 주변 사람보다 내가 얼마나 멋있는지 증명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더 예배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만 유혹을 벗어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예배를 방해하나요?
2.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상황입니다. v.6b
두 번째로 무엇이 예배를 방해하나요?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상황입니다. 6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6b]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왔다면 무엇을 기대하나요? 땅이 정리되어 있어서 바로 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다른 사람이 이미 살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1절과 2절에서 무슨 약속을 주셨나요?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은 집 한 칸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종을 포함하여 거느린 사람들이 수백 명이고 목축을 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넓은 땅이 필요합니다. 기존 사람들에게 끼어 살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선택한 길이 창세기 12장 9절입니다.
창 12: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좋은 땅을 놔두고 남쪽으로 갔습니다. 위치적으로 조금 아래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한글의 ‘남방’은 ‘네게브’을 번역한 것으로 네게브는 ‘사막’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남쪽은 일 년에 비가 100~200ml 정도 오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량한 광야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을 피하며 이동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광야까지 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12장 10절을 보시면
창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한국 강우량이 평균 1500~1600ml이니까 100~200ml는 비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슬이 맺히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기근이 심하게 들었다는 것은 아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10년 후에 어떻게 된다는 개인적인 약속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대신 성경에는 어떤 약속들로 가득 차 있나요? ‘예수 닮은 사람 만들어주겠다. 나를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들어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겠다. 눈물도 고통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무엇을 경험하나요? 예수 닮은 모습이 나타나나요? 본인도 헷갈리고 주변 사람은 완전히 부인할 지경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다 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약속에 순종했는데 이미 남이 살고 있고, 남방으로 내려갔는데 가물고 모든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우리가 상황만 보고 자꾸 낙심하니까 하나님이 계속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느라 잊어버리면 주일에 와서 예배드리면서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번 들었다고 마음 깊이 새겨지거나 바로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듣고 자꾸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또 약속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7절을 보시면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내가 약속을 줬잖아. 지금은 그렇게 안 보여도 언젠가 이루어질 거야. 구원은 내가 이루는 거야.’ 성경은 이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예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왜 예배를 여러 차례 드렸나요? 예배하지 않으면 헷갈리기 떄문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예배하는 사람도 없고, 복 주신다는 땅은 남이 차지했고, 쫓겨나 보면 사막이고, 거기에 비라도 주시나 했는데 도저히 살 수 없는 기근이 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이 100세 때 약속의 작은 씨앗을 보여주십니다. 약속이 무엇이었나요? 큰 민족이 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씨앗을 무엇이었나요? 창세기 21장 5절입니다.
창 21: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쌍둥이를 넷쯤 낳아야 큰 민족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겨우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애썼더니 하나님이 동참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스스로 생산할 수 없는 죽은 자처럼 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이 약속이 지금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여러분 혼자 예수를 믿고 계신가요? 그러면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믿지 않는 자들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여러분이 기도를 제일 많이 하시고 믿음이 좋으신가요? 그러면 소망을 품으셔야 합니다. 남편도 자식도 믿음에서 떠나가지 않고 하나님을 참예배하는 사람들로 성장시켜 달라고 대표로 약속을 품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내가 하겠다. 기다리면서 나를 보아라’라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이미 성경에 다 써 있습니다. 놀라운 약속의 성취가 요한계시록 7장 9절부터 10절입니다.
계 7:9-10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인가요? 아브라함은 이삭 하나만 보고 죽었는데 수천 년이 지났고, 수천 km 떨어져 있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배 자리에 나오게 되었고, 영적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우리 뿐 아니라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큰 무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에 아브라함과 같이 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인생의 모든 고난과 답답함이 한 번에 해결되는 영광과 기쁨을 맛보지 않을까요?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는 자꾸 잊어버리지만 주일의 예배, 매일의 일상의 예배로 기억해야 합니다. 저도 20대 때에는 기적도 경험하고 기적에 감동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을수록 기적은 없어도 말씀에 감동하고 말씀에 기뻐합니다.
저는 20대에 큰 은혜를 받아 목사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이 크게 부어주셨고 은혜 받은 구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하나님이 주셨던 말씀 중 한 구절이 기억났습니다. 이사야 35장 2절 말씀입니다.
사 35:2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소명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이 말씀을 받았을 당시 제 상황은 극히 암울하고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말씀에서 전율과 감동이 밀려와서 ‘하나님 저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감동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A4 용지에 구절과 함께 ‘세상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도 쓴 뒤 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제 삶은 광야였습니다. 햇볕도 안 들어오는 지하방 구석에서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을 래야 찾을 수 없었고 이렇게 일평생 가난하고 찌질하고 어둡게 살다 가는 것은 아닌가 불안한 날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붙여놨던 테이프가 떨어져서 종이가 바닥에 떨어져 반쯤 구석에 들어간 걸 보면서도 그냥 놔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종이를 보셨는지 다시 붙이셨는데, 떨어진 A4를 붙이신 게 아니라, 달력을잘라 붙이셔서 큰 글씨로 ‘세상은 일승이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쓰신 것입니다. 그 날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벽 전체에 도배된 구절을 보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세상이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바라며 그 집에서 이사도 가고 또 미국을 갔습니다. 어느 날 이사야를 묵상하다 처음에 그 구절을 붙였던 그 때가 생각이 나면서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벽에 그 글씨를 붙일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A4 한 장당 ‘세’ ‘상’ ‘은’ 이렇게 한 글자씩 출력해서 벽 전체에 붙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세상이 보기를 바라는 소망을 다시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제가 20대였던 10년 전보다 제 상황은 더 어두웠습니다. 사람을 피해 광야에 갔는데 비가 내리지 않는 기근이 심했던 것 같은 유학생활이었습니다. 약속을 붙였지만 제 매일의 삶은 울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아내와 울고 기도하고 울고 기도하다 눈을 들어 약속을 보면 큰 회의가 들기를 수차례 반복했습니다.
어느 날인가도 저는 마음이 우울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집을 나서서 도서관에 가는데 멀리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한 분은 저와 성경을 공부하던 목사님이셨고 옆의 분은 희고 긴 머리와 흰 수염과 흰 도포를 입은 도인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가까이 다가 와서 아는 목사님께 인사를 했더니 옆의 분은 아버님이신데 목사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처음 뵙겠다고 인사를 드리는데 그 분이 두 손으로 악수를 하면서 ‘목사님 때문에 한국이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하셨습니다. 그 인사를 듣는데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말씀해주신 것 같았습니다. 제 평생 그런 인사를 받은 것이 처음이라 엄청 힘이 났습니다. 아내한테도 얘기하고 소망을 붙들고 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더 깊은 어둠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한국에 돌아가면’이라는 소망이나 있었는데 이제는 가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애굽이었습니다. 물론 환경도 힘들었습니다. 병원에나 쓰는 간이 냉장고 하나로 4인 가족이 지내고 성도들이 주시는 김치나 반찬이 보관할 곳이 마땅찮아 시어 버리고 아이들은 친구 집에 초대를 받고도 집으로는 데려오지 못하며 거의 2년을 버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시겠다고, 한국이 나 때문에 기뻐할 거라는 약속이 무색하리만큼 너무 어둡고,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두려웠습니다. 현실은 약속과 전혀 달라서 기도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20년째 제 인생은 왜 이렇게 어둡죠? 20대 초반에 부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 찬란하고 멋있었는데 40 중반이 되도록 제 인생은 왜 계속 광야이죠? 그저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하나님이 개척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때 ‘이제 시작이구나’를 느끼고 교회 주보 1면에 바로 이 이사야 구절을 실었습니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라.’ 그리고 지금 교회 복도 벽에도 박아놓은 것입니다. 임의로 좋은 구절을 뽑은 것이 아닌 20여 년의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 놓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이시나요? 세상 사람들이 ‘나만 만족하고 잘 살 거야’라고 외치는 더러운 욕심과 반대되는 하나님의 찬란한 자기 희생적 사랑이 바로 영광입니다. 여러분들도 지난 10년간 설교를 들으며 그 길에 동참해 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을 짓밟아서라도 나의 즐거움을 고집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셨나요? 계속해서 헌금을 늘려오셨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교인수가 10배쯤 늘은 것은 아닙니다. 유학 가고, 결혼하고, 떠나고 하면서 성도수는 비슷합니다. 그런데 헌금이 매년 늘어났습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을 즐겁게 하던 돈을 내놓으며 남을 살리셨습니다. 이번 부활절 헌금이 2,200만 원이 넘게 나왔습니다. 이 금액은 교인이 500명에서 천 명 되는 큰 교회에서 나오는 헌금액수와 같은 입니다. 저희 노회에 6~700명 되는 교회의 목사님께 여쭈어보니 이번 부활절 헌금이 천 만 원이 좀 넘게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세상은 나를 위해서 살아야 되니까 남을 위해 절대 돈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아직 빚이 있지만 다른 교회를 살리기 위해 몇 천만 원씩 내놓는 게 여러분들께는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은혜입니다.
이번에 헌금을 보낸 대구의 토기장이 교회는 7년 전에 저희가 한 번 도왔던 교회입니다. 그때 저희가 크리스마스 헌금을 천 오십만 원을 보내서 창립을 도왔습니다. 7년 만에 교회가 쫓겨나고 흩어지게 되었다고 해서 기도하다 결정해서 이번 부활절 헌금을 또 보내게 되었습니다.
헌금을 받으시고 토기장이 목사님이 이렇게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에 하늘사랑교회를 통해 저희 교회가 태어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부활절에 하늘사랑교회를 통해 저희 교회가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사하고 교인들이 힘을 내어 교회를 지키고 사랑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는 모습입니다. 교회가 커진다고 더 많은 교회들을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자체 유지하는 데 돈이 많이 들어서 절기 헌금을 외부로 보내는 게 어려워집니다. 그러니까 성도들도 많이 내지 않고 평소와 비슷하게 하면서 그저 유지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금액을 헌신하시는 이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30년 전에 하나님이 주셨던 약속,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하늘사랑교회를 통해 즉,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인생 내내 네게브에 들어가는 것 같고 애굽으로 쫓겨간 것 같은 비참한 인생이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며 우리 교회만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많은 생명들이 소망 가운데 일어나는 놀라운 축복을 맛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에게도 약속을 주고 계십니다. 현실을 보면 광야이고 어둡고 답답하고, 자녀들이 예수를 안 믿고 신앙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불안함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주어져 있습니다. 끝까지 믿으셔야 됩니다. 믿었다면 예배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맞다고 선포하고, 안 믿어질수록 더 하나님 중심적으로 반응하셔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물론 당장이 아닙니다. 최소 20년, 혹은 아브라함처럼 많은 민족을 주시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다 못 보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이 땅은 잠깐이요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기에, 언젠가는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지난 10년간 저희 교회를 통해 후원했던 모든 교회의 사정을 저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가면 ‘집사님의 후원 덕분에 우리 교회가 살았습니다.’ ‘권사님 덕분에 우리 부족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고 우리의 축복일 것입니다. 하늘사랑교회가 더욱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또한 여러분이 이 일에 계속 동참하심으로 우상 숭배적 세상을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교회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