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제가 20대 때 어느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된다’며 ‘이렇게 예배하면 하나님이 특별한 축복을 주신다’라는 열정적인 설교였는데 당시 종교적 자극을 원하던 저는 예배에 목숨을 걸라는 표현이 정말 매력적으로 들렸습니다. 예배에 목숨을 건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아마 열심을 다해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들을 때도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설교가 전형적인 율법적이며 기복적인 설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들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그 은혜에 반응하기를 요구하는데 종교는 항상 우리에게 행위를 요구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헌신과 노력으로 신의 복을 얻어내는 데 초점이 맞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특별한 행위를 한다고 더 많은 복을 주시거나 우리가 목숨을 바치는 헌신을 한다고 해서 남과 다른 은혜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은혜라는 말 자체가 ‘받을 자격이 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호의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로 무엇을 받았다면 그것은 이미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가 목숨을 건다고 해서 그 예배가 온전한 예배가 될까요?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무엇보다 최고의 존재로 우리가 여기며 그분에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본질 안에서 하나님만 최고로 높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해 오셔야 하고 하나님의 개입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열매를 맺게 될 때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언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언제 하나님만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을까요?
1.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될 때입니다. vv.32-34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만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될 때입니다. 32절 말씀입니다.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이 블레셋의 왕과 언약을 맺은 일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단순히 개개인의 약속이 아니라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이나 자기의 신하와 사이에서 일어나는 공식적인 계약입니다. 아브라함은 블레셋의 신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왕과 왕 사이의 언약인 것입니다. 바로 앞의 내용을 보면 이것은 왕과 왕 사이의 평화 협정입니다.
서로 공격하지 말고 속이지 말고 서로의 땅과 통치를 인정하자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지금 왕인가요? 아들 한 명 있는 한 가족의 가장에 불과한데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던 블레셋의 왕이 찾아와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그 이유를 아비멜렉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22절입니다.
[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세상 사람이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신은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없고, 하나님이 도우시는 아브라함은 우리와 같은 수준이야. 너희가 우리를 공격하면 하나님이라는 신이 우리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강력한 분이니까 언약을 맺어서 평화를 지키자’라고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이자 떠돌이로 살고 있었는데, 그 땅에서 수백 년째 나라를 이루고 살던 블레셋 왕이 아브라함을 그 땅의 왕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래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7절을 보시면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에 왔음에도 땅 한 평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 보니까 그 땅을 다스리던 블레셋의 왕이 ‘이곳이 너의 땅이고 너의 통치권이 있으니 우리와 언약을 맺어서 서로 침범하지 말자’고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처음 들어온 것이 75살이고 지금은 아마 120세쯤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때니까 최소 40년에서 50년이 흘렀습니다. 약속이 도대체 이루어질까?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까? 수많은 생각을 했을 아브라함은 드디어 하나님이 수십 년 간 그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이루셨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 특별한 행동을 합니다. 33절 상반절입니다.
[33a]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
에셀 나무는 1년 내내 잎이 푸른 상록수로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광야에 이 나무를 심는 이유는 에셀 나무의 뿌리가 30, 40m 땅속을 파고들면서 깊숙한 곳에 있는 물을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에셀 나무를 심은 이유는 33절 하반절의 내용 때문입니다.
[33b] …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에 기념나무를 심었습니다. ‘영원’이라는 히브리어 ‘올람’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반복해서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단순히 오래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을 맺고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17장 7절을 보시면
창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 열심을 행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수십 년 후에 그 흔적을 본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 눈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블레셋이 있고 가나안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몇 십 년이 지나고 보니 그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땅 주인으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아브라함은 약속이 이루어짐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땅과 함께 자손에 대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자손인가요? 바다의 모래보다도 많은 자손입니다. 손으로 모래를 한웅큼 쥐면 약 100만 알 정도의 모래가 잡힙니다. 그런데 그 모래보다도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래 같은 자손을 보았나요? 약속의 흔적을 보았습니다. 한 명.
그런데 아브라함은 ‘한 명’도 낳을 수 없던 몸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생산이 불가능한 나이가 될 100세까지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100세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산 능력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생명이 탄생됨을 보여주신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데 한 4~50년이 흐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훨씬 더 거대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주시고 셀 수 없는 자손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무엇이 주어졌나요? 남들의 인정과 이삭 한 명만 주어진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에 대한 아주 작은 흔적이 주어졌지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가질 만한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우리 믿음도 그렇습니다. 교회에 10년 20년 다녀도 믿음이 잘 생기지 않다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신 이후에야 서서히 믿음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보기까지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제가 20대에 왜 그렇게 예배에 목숨을 걸어서 은혜 받기를 원했나요? 남과 다른 놀라운 능력을 당장 받기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시각에서 약속을 주시고 인도해 나가십니다. 우리의 발버둥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앞당길 수 있나요?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는데 아브라함의 개입과 노력이 도움이 되었나요? 아브라함은 계속 실패했습니다. 약속을 주셨으면 끝까지 버텼어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무엇을 했나요? 창세기 12장 10절입니다.
창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
너무 힘드니까 떠났습니다. 제가 탈북자 고등학교에서 섬길 때도 보면 선생님들이 처음에는 사명감에 불타서 오십니다. 그런데 학교 시설은 열악하고 아이들은 학업에 관심이 없어서 대부분은 자고, 깨어 있으면 딴 짓 하는 무관심 속에 선생님들이 길게 버티질 못하십니다. 북한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탈북 아이들을 따뜻하게 케어해주고 통일한국에 기여하겠다는 열정에 비해 현실에서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니 묵묵하게 버텨 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여명학교 교장, 교감 선생님, 그리고 10년 20년째 계신 선생님들을 더 존경하게 됐습니다. 어둡고 막막한 현실 가운데 꾸준히 계신 것이 대단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기다렸나요? 그가 했던 노력이라고는 첩을 들여 이스마엘을 낳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6장 16절입니다.
창 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86세이지만 지금의 86세는 아닙니다. 175세를 산 아브라함의 전체 인생에서는 절반 정도 산 셈이니까 평균 연령 86세인 현재로 치면 40대 초반에 자식을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길이었나요?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주신 약속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 약속을 늘 방해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결과로 구약 내내 이스라엘 백성이 괴롭힘을 당했고 그것이 현재 중동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아랍까지 이어집니다. 지금도 이슬람은 이스마엘이 정통 장자이고 이삭은 반역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이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다른 기적이 개입되어야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 같다는 우리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수십 년 뒤에 약속이 어떻게 결론 맺어질지를 볼 수 없기에 불안해합니다.
저도 2, 30대를 지나며 하나님께 많은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들을 받고 제가 했던 대부분의 반응은 불안, 두려움, 울음이었습니다.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기도할 때, 예배할 때 반복적으로 받은 약속들은 이것이었습니다.
종교에 매어 오랫동안 하나님을 오해했던 저처럼 어둠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인해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게 될 일에 하나님이 저를 사용하실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저도 종교의 폐해로 너무 고통했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더 헌신하면 하나님이 특별하게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2,30대가 모두 저의 욕심과 결부된 종교 때문에 벌어졌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알게 되고, 자유를 얻게 되었더니, 하나님이 저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종교가 아니라 복음의 길로 돌아오게 하는 데 사용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제 현실은 어땠나요? 늘 어둡고 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힘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고자 할 때 교회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돈과 힘으로 거대해진 몸집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그것은 세상의 길, 가인의 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십자가의 길로 걸어야 한다’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기에 새로운 세대가 나타날 때 새 포도주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북한과 아무 관련 없던 저에게 ‘내가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섬길 목적으로 너를 불렀다’고 말씀 해주셨습니다. 사실 저희 아버지께서 남북을 통일하라는 마음을 담아 하나 일, 이을 승, 일승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남북통일이 너무 원대하고 저와 멀어 보여서 늘 불신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약속,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여줄’ 약속도 주셨습니다. 제가 이것들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통해 복음을 드러내 주세요.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자리에 설 수 있게 해주세요. 통일 한국을 섬기고 준비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해주세요.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를 하다가, 이 목적을 위해서는 아브라함처럼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땅’은 바로 ‘교회’입니다. 저 혼자 허공에다 복음을 외칠 수는 없고 교회 안에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받은 지 20년이 지났는데 교회는커녕 혼자 지하실에 사는 제 모습에 절망하다가 하나님이 개척하라고 부르셔서 10년 전에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약속이 열매를 맺겠다는 희망을 가득 담아 교회에 다섯 가지 비전을 적어 넣었습니다.
하늘사랑교회의 비전은 그저 아무 좋은 말이 아닌, 제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주셨던 약속입니다. 복음 위에 견고하게 선 교회,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역하는 교회, 새로운 세대를 세우는 교회, 통일 한국을 준비하는 교회,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보이는 교회. 하나님은 오래 전에 약속을 주셨고 지난 10년간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보여주셨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요즘 시리즈 설교를 하면서 이전을 돌아보게 되는데 이전에 비해서 제 믿음이 더 견고해진 것을 느낍니다. 교회 시작할 때만 해도 두려움이 있었는데 10년이 지나고 나니 하나님의 약속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성장하시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능력에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겉으로는 신실하셨지만 내면에는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가득하셨던 분이 시간이 지나고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이제는 복음이 자연스럽게 삶의 중심이 되고 여러분 이야기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을 보며 여러분이 새로운 세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만 새로운 세대가 아니라 나이 드신 분들도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입니다. 물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도 있습니다. 교회가 북한을 위해 어떤 섬김을 할 수 있을까요? 아직 모르지만 몰라서 매주 기도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우리가 합당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10주년에 몇 년 만에 페북에 글을 썼더니 미국에 있던 한 목사님께서 나무를 하나 보내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아브라함의 에셀 나무와 같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나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10년간 많은 일을 행하셨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도 이제 이루어지겠구나 믿을 수 있다면 견고해진 것입니다.
물론 약속의 완성을 우리가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통일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래같은 자손이라는 약속의 흔적인 이삭 하나만 보고서도 하나님을 ‘영원하신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아브라함처럼 우리 또한 이 10주년을 지나가며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가를 믿음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이 앞으로도 하늘사랑교회를 통해 약속들을 이루어 나가실 것을 믿습니다.
언제 하나님만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을까요?
2. 가장 사랑하는 우상을 내려놓게 될 때입니다. vv.1-2
두 번째로 언제 하나님만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을까요? 가장 사랑하는 우상을 내려놓게 될 때입니다. 1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a] 그 일 후에 …
‘그 일’은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아브라함이 보게 되었을 때’입니다. 이렇게 아름답게 끝나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나요? 1절 하반절입니다.
[1b]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곳의 ‘시험’은 ‘test’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또 다른 시험은 마귀의 유혹, ‘temptation’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test는 수십 년에 걸쳐서 아브라함의 인생에 행하신 믿음의 결과가 순종으로 나타나는지 확인하시는 작업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믿는다면 어떤 반응이 나와야 정상일까요?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셔도 순종하는 게 정상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이 너무 중요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고 하나님의 뜻이 옳다고 예배한다면 아브라함처럼 순종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어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십니다. 2절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단순히 ‘네 아들’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신제사를 요구하신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아닌, 이삭을 의존하고 사랑하며 우상으로 삼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원하셨습니다.
예배가 무엇인가요? 하나님만을 최고의 대상으로 여기고 사랑하고 의지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예배에 가장 방해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은 다른 우상들입니다. 세상에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돈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그 사람이 진짜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시간과 돈을 쓰는 대상이 우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잃어버리거나 실패할까 봐 두려워하는 그것, 또 감정적으로 가장 여러분을 요동하게 만드는 것이 또한 우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상은 너무 은밀해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돈이나 사람 정도가 아니라 그 아래 있는 더욱 근본적인 경향이 있는데 그 중 일반적인 것이 쾌락과 안정입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과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 정반대인데 이들 모두 돈을 의존합니다. 한 쪽은 돈으로 쾌락을 얻고, 한 쪽은 돈으로 안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이 너무 매력적인 것입니다.
쾌락 우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돈을 쓰면서 기뻐하는 뿌리가 지금 영혼 안에 깊이 새겨진 사람입니다. 반면 안정주의자는 통장에 50억을 가지고도 커피값 몇 천원을 아까워하는 사람입니다.
쾌락과 안정 외에 또 돈과 사람을 의지하는 근원은 성공과 인정에 대한 욕구입니다. 돈으로 성공의 자리에 올라가거나 사람들에게 자기의 성공을 과시하고자 합니다. 인정의 우상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돈은 인기를 얻는 수단입니다. 끊임없이 밥을 사고 선물을 주면서 사랑받고자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얻어낼 것이 없으면 금방 버리고 떠나기에 다시 외로워지게 됩니다.
똑같은 돈과 사람이지만 개인의 근원적 우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분은 어떤 우상의 지배를 받고 계신가요? 제가 저의 안정의 우상을 설교에서 여러 번 고백한 이유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내면을 진지하게 바라보신 뒤 기도하시고 자유를 얻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우상이 지배한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쾌락의 우상에 사로잡혀 있다면 끊임없이 즐거움을 위해 나를 위해서만 돈을 쓰고 관계까지 깨트리며 절대로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자기 시간과 돈을 쓸 수 없습니다. 비참한 인생입니다.
안정의 우상에 사로잡혀 있으면 결국 혼자 남게 됩니다. 돈이나 내가 의존하는 사람이 내 미래를 보장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늘 구두쇠처럼 아껴야 하고, 사람은 통제하게 됩니다. 안정의 우상에 사로잡힌 부모의 자식들은 괴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성공의 우상에 사로잡혀 있으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원하는 성공을 얻지 못하거나 그것을 방해하는 상황이나 사람이 나타나면 분노하게 됩니다. 돈이 없는 게 고통스럽고, 성공한 사람을 보면 분노하며 비난합니다. 인정의 우상을 추구하는 인생은 남의 눈치 보다 인생이 끝납니다. 남이 나를 인정해 줄 때는 행복한데 누군가가 조언이라도 해주면 원수가 됩니다. 인생의 근원 자체가 남의 인정인데 나를 지적할 때마다 영혼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이 우상들이 우리를 지배하면 결과가 항상 파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상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아서 하나님이 가지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을 내려놓은 자리에 하나님이 무엇을 준비하셨나요? 13절입니다.
[13] …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 숫양이 누구신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가장 행복할 때는 우상에게 끌려 다닐 때가 아닙니다. 얼마나 강한 쾌락을 맛봐야 쾌락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야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얼마나 성공해야 진짜 성공일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인정해야 평생 만족과 기쁨을 얻을까요? 세상의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의지할 때 우리는 참 만족과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결론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노력했더니 하나님만 예배하는 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손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제가 예배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상을 제단 앞에 내려놓습니다. 제가 더 이상 쾌락, 안정, 성공, 인정의 우상에 매어 살지 않고 하나님만 온전히 에배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때가 되면 하나님만 예배하는 자의 열매들을 보게 하사 감사의 찬양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