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성도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이 땅에서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직접 뵙고 예배드릴 때일 것입니다. 천상의 예배는 아마도 이 땅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기쁨보다 큰 기쁨, 이 땅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만족보다 큰 만족의 영광스러운 순간일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 땅에서 예배를 많이 드리며 연습해야 하나요?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드릴 예배를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게 될 영광스러운 날,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드릴 예배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상의 예배에 참여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되나요?
천상의 예배에 참여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1.하나님과 예수님의 구원하심만을 찬양합니다. vv.9-14
첫 번째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구원하심만을 찬양합니다. 9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9a]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
‘이 일’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서 만 이천 명씩 뽑아 14만 4천 명이라는 숫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4절입니다.
[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14만 4천 명을 자신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이단이 바로 신천지입니다. 너무 포교를 잘 한 나머지 총 교인수가 14만 4천 명이 넘자 자체적으로 매년 시험을 보아서 가장 헌신된 14만 4천만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숫자는 상징입니다. 12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12×12로 144를 만들고, 거기에 1,000을 곱한 것은 하나님 백성들이 완전하게 모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전체가 아닌 1만 2천 명씩 뽑아낸 것일까요?
구약에서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소수 인원을 착출해 특별한 전쟁을 치를 때 이 숫자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백성은 이 땅에서 전쟁하는 자들, 하나님 나라의 영적 싸움을 싸우는 자들임을 보여주기 위해 14만 4천 명이 등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이 땅에서의 영적 싸움입니다. 우리는 어떤 싸움을 싸워야 하나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이 땅에서 영적 싸움을 싸웁니다. 이 세상과, 마귀와, 죄와, 무엇보다 옛 사람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욕심과 싸웁니다. 사실 외부가 아닌 우리 내면에 적이 있기 때문에 이 싸움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이 싸움을 잘 마친 자들이 천상의 예배에 참여합니다. 9절 하반절입니다.
[9b] …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단순히 ‘많은’ 사람이 아닌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양하게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것임을 보여주며, 이들이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무리인 것도 구약의 약속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들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하늘나라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흰 옷을 입음으로 정결하게 된 자들임을 보여주고 있고 또 종려가지를 들고 있음으로 승리와 영원한 생명의 상징을 보여줍니다. 즉 완전히 승리와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엇을 찬양하나요? 10절 말씀입니다.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구원이 우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달려 있다고 고백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 이 땅에서 우리는 영적 싸움을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 내면 안에 있는 옛사람과의 싸움, 거대한 세상과의 싸움, 강력한 영적 권세를 가진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어찌 해 볼 수 있는 싸움이 아닙니다. 마귀가 죄과 사망과 욕심으로 공격하기 시작하면 어떤 사람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을 지나며, 내 힘과 노력으로는 절대 승리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죄악과 마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천국에서 바로 그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11절과 12절에 보면 천사들도 이 찬양에 동참함을 알 수 있습니다.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하늘의 수많은 천사들이 동시에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다니 얼마나 장엄한 장면일까요? 그러나 이 천사들의 찬양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성도들의 찬양이 더 의미 있고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천사들은 무서운 죄의식을 경험하지도 못했고, 어둠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늘 하나님 곁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스럽고 능력이 많고 위대하심을 알아서 마치 거울이 반사하듯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인생을 통해 경험하며 그 은혜를 고백합니다. 우리 인생에 찾아오신 그 하나님으로 인한 감동, 경험, 그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군요’라고 고백할 때에는 그 안에는 개개인의 인생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장로 중 하나가 요한에게 물어봅니다. 13절과 14절 상반절입니다.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a]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
수사학적 질문입니다. 본인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마치 답을 구하는 것처럼 운을 띄우는 것입니다. 상대가 모르겠다는 답을 하도록 유도해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질문인지 우리에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기법입니다. 14절 하반절에서 장로가 무엇이라 답하나요?
[14b] …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하늘에서 하나님과 예수님만 찬양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가 그들이 무엇을 지나왔는가 하는 것과 이들이 입은 옷입니다. 이들은 큰 환란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왜 환난이 필요한가요? 큰 환란을 경험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지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반드시 환란을 당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환난은 당할 수도 있고 당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환난을 당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어떤 조건이 있나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두려움을 벗어나 환난도 평안히 지나갈 수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요동하고 두렵고 지극히 고통 받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하고 힘든데 환난을 막아주시지 않나요? 환난의 또 다른 중요한 목적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해 예수님의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경험할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세상과 짝하며 마귀가 유혹하는 대로 넘어가는 옛사람이 잘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환난이라는 헬라어 단어 ‘쓸립시스’는 탈곡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밥도 볍씨 껍질을 벗겨내야 지을 수 있습니다. 껍데기를 벗겨야 알맹이가 남습니다. 껍데기처럼 남아 있는 옛 사람을 가진 채로는 우리는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죄의 본질은 내 자신이 위대하고 크고 성공한 사람이 되어 나의 영광을 뽐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왜 성공을 열망하나요? 왜 부자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나요? 눈에 보이는 하나님 역할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인간의 본질이며, 그래서 우리도 실패하고 가난해지고 약해지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잘려 나가지 않고는 우리는 하나님만 높일 수가 없습니다. 나의 영광, 나의 능력, 나의 위대함을 뽐내고, 이것이 종교적으로까지 결부되어 자기 의가 될 때 결국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바리새인적인 태도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큰 환난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종류가 다른 환난이 닥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별로 힘들지 않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큰 환란이 되어 결국 그의 욕심을 잘라내며 하나님만 예수님만이 구원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어야 믿음으로, 의로 말미암아 흰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은 이것을 배우기 위해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다 배우셨으면 하늘에 가실 준비가 되신 것입니다. 환난을 통해 자신을 높이지 않고 하나님만 높이는 자가 되어 영광스러운 예배의 자리에서 구원하심이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만 있다고 전심으로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인생 수십 년의 어려운 상황들도 이 목적을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강도와 깊이 면에서 저를 제일 힘들게 한 것은 돈이었습니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을 때 제 인생이 흔들렸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제 인생을 책임질 물주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난이라는 것이 실제 삶에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우리 집에서 살다가 월세 15만 원짜리 지하 방에 들어가서 여러 가족들이 같이 쓰는 공동변소를 쓰는 환경 자체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돈에 대한 두려움이 삶을 파괴해가는 것이었습니다.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그 어떤 절약으로도 삶을 되찾을 수 없다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해소된 때가 제가 목사가 되고 어느 교회 부목사를 할 때였습니다. 월급이 나오니까 숨은 쉴 수 있었는데 하나님이 유학을 가라고 하시자 두려움이 다시 증폭되었습니다.
유학을 안 가려고 1년을 버텼는데 하나님이 한 학기 살 수 있을 돈을 이곳저곳에서 주시 길래 가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너무 무서워서 약속을 구했을 때 하나님이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라는 말씀을 주셨고 마침 아버지께서도 같은 말씀을 받으셔서 확신을 했습니다.
물론 결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언제, 얼만큼, 누가 줄지를 모른 채로 10년을 살았습니다. 학비나 월세 등 목돈을 내야 될 때마다 두근두근 기다릴 뿐이고, 전기가 끊긴다는 빨간 고지서를 받을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두려움으로 마비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주는 자동차 기름을 3천원 어치만 넣기도 하고, 어떤 주는 그 주에 산 야채만 먹고 통조림은 최대한 늦게 먹기로 했다가 그 다음 주에도 돈이 안 와서 통조림을 환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건 때 고통이 극심해졌습니다.
한국에 돈을 조금 놔두고 있었는데 환율이 갑자기 1,700원까지 치솟으며 타이밍을 놓친 것입니다. 미국에 돈이 다 떨어져서 얼마 안 되는 돈을 보내는데 가치가 거의 절반으로 떨어져서 월세 내고 나니 돈이 없었고 이 공포스러운 과정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사실 미국에 갈 때 돈 때문에 기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아무리 불쌍하게 기도하고 졸라도 혹은 그냥 기다려도 돈이 오는 타이밍은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을 20대 때 경험했기 때문인데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으니까 돈 때문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라기보다 금식하고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일종의 시위였습니다. 기도를 더 열심히 해도 하나님이 갑자기 돈을 주실 것 같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이 터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환난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는데 한국에서 어느 집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이전에 여러 차례 큰 금액으로 도와주셨던 분이셨습니다. 몇 개월 후까지 보너스를 모아서 몇 백을 채워 보내고 싶었는데 꼭 지금 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미리 보낸다고 하시면서 돈을 보내셔서 위기를 지나갔습니다. 이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왜인가요?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입니다. 그렇게 10년, 아버지 사업이 망한 때로부터 치면 20년을 살았습니다. 믿지 못하니까, 평안을 잃어버리니까, 두려움이 제 영혼을 지배하여 환난으로 영혼이 베이는 고통을 겪은 것입니다. 돌아보면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과정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제가 눈으로 보고 의존하던 육적인 부분이 잘라져 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이 신실하시고, 우리 필요를 아시고, 가장 적절한 때에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영혼 깊이 믿습니다. 이 고백은 입의 고백이 아니라 제 인생 수십 년, 수백 번 동안 제 믿음 없음으로 고통 했던 모든 과정의 결과입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이 놀라운 구원을 경험한 수많은 무리가 모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공급하십니다’라고 찬양하는 자리가 얼마나 큰 감동이며 영광일까요! 하나님만 찬양하는 자 만드시기 위해 우리 인생 가운데 이 환난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환난을 통해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천상의 예배에 참여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2. 밤낮 하나님을 섬깁니다. vv.15-17
두 번째로 천상의 예배에 참여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밤낮 하나님을 섬깁니다. 1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5a]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
‘보좌’는 하나님의 강력한 통치를 보여줍니다. 이 땅에서는 마귀가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시험하고 세상을 요동케 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잘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깁니다.
‘섬기다’는 구약의 ‘예배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영어로도 예배를 service라고 하는데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위해 무엇을 하시나요? 15절 하반절입니다.
[15b] …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5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들을 이미지로 가져온 것입니다. 광야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민수기 9장 15절을 보시면
민 9:15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하나님이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셔서 낮에는 구름기둥이 되어 해를 막아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이 되셔서 추위를 막아주신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장막을 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더니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16절 상반절입니다.
[16a]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
이 주림과 목마름은 육신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들은 영혼 안에 있는 끊임없는 갈망 때문에 벌어집니다. 이 갈망은 다른 말로 욕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배우라고 광야를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풍요한 사람은 영적 갈망 자체가 없습니다. 조금 갈망하다 돈으로 해결하고 능력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깊이 갈망하며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이 땅 내내 갈망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나요? 17절 상반절을 보시면
[17a]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
이 땅에서 목마른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나요? 요한복음 4장 14절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수가성 여인은 목마른 자였습니다. 영적으로 목이 말랐는데 너무 예뻐서 목마름을 남자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차라리 예쁘지 않아서 남자들이 찾지 않았으면 더 일찍 깨달았을 텐데, 능력이 있으니까 자기 능력으로 눈에 보이는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하다 여섯 번째 남자까지 도달한 다음에야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일곱 번째 남편이 되어 목마름을 영원히 해결해 줄 생명수가 되겠다고 말씀하시고, 그 여인은 그 자리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좋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그 모든 노력이 소용없음을 깨닫고 예수님만이 나의 남편이며 생명이십니라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축복이며 만족이 될 것입니다. 또 무엇을 약속하고 있나요? 16절 하반절입니다.
[16b] …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광야의 햇볕이 얼마나 뜨거울까요? 우리도 인생의 광야에서 상처와 뜨거움을 경험합니다. 사람 때문에 환경 때문에 아프고 힘들었던 일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없습니다. 하나님이 장막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17절 하반절에 더 기쁜 약속이 주어집니다.
[17b] …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눈물은 언제 흘리나요? 슬플 때,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빼앗겼을 때, 억울할 때, 화날 때, 원하는 대로 안 될 때, 그 때 우는 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모든 죄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완전한 자리에 서게 해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마다 이런 놀라운 영광과 은혜가 있다면 너무 좋을까요? 그래서 찬양집회를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늘의 예배를 맛볼 수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서라도 열심히 찬양하고 말씀 가운데 무슨 은혜가 있는지 귀를 기울이다 보면 하늘의 예배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하나님 앞에 선 것 같은 영광스러운 예배를 사모했지만 경험한 적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본문의 장면에 나온 것 같은 예배를 경험한 때가 있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부목사로 섬길 때 토요일에 대학부가 새벽 특별 찬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큰 교회라 몇 백 명의 젊은이들이 토요일 새벽에 모여, 본문으로 만든 ‘할렐루야 어린 양’ 찬양을 연습하여 불렀고, 담임목사님이 큰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예배 후 바로 교역자 회의가 있었는데 저를 제외한 일곱 명의 대학부 교역자들이 모두 제자훈련이 있어서 빠지게 되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찬양이 너무 은혜로웠다면서 대학부 교역자들 다시 한 번 불러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 혼자 일어났더니 혼자라도 부르라고 압박이 들어와서 할 수 없이 시작은 했는데 악보도 없고, 새벽 6시이고, 가사도 가물가물하고, 낭패라고 생각하자 알던 부분도 우물쭈물 얼버무리게 되자 목사님이 집어 치우라고 하며 앉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역자 회의가 끝나고 사무실에 왔는데 그때부터 부끄럽고 화가나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불참한 교역자들도 밉고, 모른다고 했는데도 굳이 시킨 목사님도 밉고, 부끄럽고 도저히 오후 사역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찬양을 출력해서 기도실에 갔습니다. 혹시 다음에 또 시키면 완벽하게 부를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찬양을 하면 요동치던 마음이 가라앉고 찬양을 멈추면 다시 그 생각이 올라와서 화가 나고 찬양을 하면 마음이 가라앉기를 한참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왜 찬양을 하지? 목사님이 시킬까봐? 부끄러워서?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너무나 사람을 의식했던 것을 회개하며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께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하나님 앞에 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주 작은 기도실이었는데 주변에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때 찬양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기쁜지 목이 터져라 몇 시간을 찬양했습니다. 제 인생 가운데 그런 감동스러운 예배를 드린 적이 별로 없어서 그 날을 잊지 못합니다. 좁은 기도실에 마치 천국이 열린 것 같으면서, 하늘에 가면 이렇게 기쁘겠구나, 이렇게 행복하겠구나.
하나님 나라에 가면 영원히 그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각자가 경험한 놀라운 구원을 하나님 앞에서 노래하게 되는 그날을 위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큰 환란을 통해 하나님과 어린 양의 구원을 경험한 여러분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날을 꿈꾸며 날마다 소망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