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2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보면 불안한 일들이 많습니다. 코로나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렇고, 집값이 너무 가파르게 오르는 것도 그렇고, 중국과 미국이 알력싸움을 하는 것도 그렇고, 자연 재해로 인한 식량 문제도 그렇구요. 하지만 이런 사회적이고 국제적이고 자연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들이나 관계도 계속 저희 삶을 불안하게 합니다. 이런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신과나 심리학과 진료도 도움이 될 수 있고, 운동이나 여행, 취미생활도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께서는 하나님만이 참된 안식을 주실 수 있고, 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인간의 불안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런 저희의 모든 불안을 해결해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무엇인가요?
1. 희생을 통해 안식의 삶을 주시는 일입니다.(15)
오늘 말씀 앞부분에서 룻은 나오미의 기업 무름을 위해 보아스를 찾아가 청혼을 했습니다. 보아스는 결혼과 기업 무름을 해주고 싶었지만 율법에 의하면 자신보다 우선순위의 기업 무를 자의 결정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그 사람이 기업 무름과 결혼을 해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반드시 행하겠다는 약속의 표시로 보리를 여섯 번 줍니다. 15절 상반절입니다.
[15a]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그런데 보아스는 왜 여섯 번 준 것일까요? 물론, 몇 번 줄지는 보아스 마음일 수도 있겠지만, 보아스가 보리 여섯 번을 줬다는 말을 들은 나오미의 반응을 보면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입니다.
[18b]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보아스가 쉬지 않고 일을 해서 구원을 성취할 것임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가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서 6이 그 다음 수인 7과 함께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쉬지 않고 일하셔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안식의 삶을 주셨습니다. 안식의 삶이란 편안하게 쉬고 노는 안정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로 관계의 질서가 확립된 상태를 안식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안식의 삶이 참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7일째 안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으로 인해 자신들의 유한한 지혜로 판단하고 행동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노릇을 해야 더 만족스러운 안식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면서 오히려 참된 안식의 삶을 잃어버렸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런 배응망덕한 배반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안식을 회복해 주시는 새창조를 위해서 지금까지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 것이고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쉬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얻고, 율법을 받아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안식의 삶을 맛볼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새창조의 완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과정 가운데 얻어진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얻게 된 안식의 삶이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은혜를 기억하도록 6과 7로 이루어진 안식일, 안식년과 같은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율법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돌아왔던 나오미는 보리를 여섯 번 준 보아스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는 안식에 관한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안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그 안식을 주시기 위해 창세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쉬지 않고 구원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런 하나님의 그 은혜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저희는 안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기 보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원하는 안식을 얻고자 쉼 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요즘 집값이 15억, 30억, 80억, 비정상적으로 치솟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정도 되면 단순히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아서라고만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불안정한 직장과 불안정한 노후와 지금 집을 사지 않으면 앞으로 벼락거지가 된다는 불안이 이 기회에 더 흔들리지 않는 부요하고 편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과 결합된 모습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불안과 욕망의 거품이 언젠가는 터질 수 있고, 내가 이 대출을 값을 수 없을지라도 지금 사지 않으면 안된다는 불안이 가득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집값만 불안한가요. 이런 시대에 내가 괜찮은 직장을 얻을 수는 있을까. 내가 직장에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까. 내 사업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나이는 들어가는데 제대로 된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까. 이런 사회에서 자식들은 제대로 클 수 있을까. 급격한 기후변화 때문에 식량 위기가 오진 있을까? 그리고 무엇다도 죽음과 질병에 대한 불안함은 누구도 피할 수 없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태에서 분리되며 엄청난 불안함으로 울기 시작하고, 죽을 때에도 죽음과 죽음 이후의 불안에 짖눌리게 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필연적인 불안 가운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과 은혜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안식을 얻기 위해 오히려 쉼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엘리멜렉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안식의 삶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멜렉과 같은 백성들을 돌이키시고자 흉년으로 훈육하셨지만 그 때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는 것을 안식이라 여겼습니다. 흉년 없는 이방 땅에서 굶지 않고, 부요한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이방 신을 통해 풍요로운 삶을 얻는 것을 안식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죽음이었고, 남겨진 룻과 나오미는 텅 비어서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겠다는 안식을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결과가 얼마나 더 지옥 같아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 가운데 보아스는 보리 여섯 번으로 안식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고, 나오미는 그 약속의 의미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에게 어떻게 그 약속한 안식을 주나요? 15절 하반절입니다.
[15b]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보아스는 첫 번째 기업 무를 자의 의사를 묻고 결정을 하도록 하기 위해 성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룻과 나오미도 보아스가 해주길 원해서 목숨 걸고 보아스를 찾아왔고, 보아스 자신도 해주고싶어하는데, 굳이 이렇게 융통성 없이 복잡한 일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요? 너가 하기 싫으면 내가 하겠다고 말하면 안되는걸까요? 안됩니다. 안식은 아무리 좋아보여도 내 뜻이 이루어진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 율법의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가 만족 될 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안식의 삶을 잃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자기 뜻대로 살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관계 맺기 위한 '의'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 불의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상태가 되면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할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에 의존해서 안식의 삶을 살아야 할 인간이 그렇게 못하게 되자 삶이 불안해지고 내 생각에 불안을 없애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의존하려는 쉼 없이 방황하는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안식의 땅 에덴에서 쫒겨나 살게 된 곳의 이름이 놋이라는 사실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놋은 방황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존하지 못해서 다른 무엇을 의존하려고 방황하는 상태. 이것이 죄인이 불안한 삶을 사는 근본 원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의 근원을 잘 아는 보아스는 율법의 불순종으로 잃어버린 의를 되찾아 주기 위해 율법을 완성하러 성읍에 올라 간 것입니다. 보아스는 단순히 자기가 가진 땅이나 돈만 희생하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좋아 보이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너와 내가 안식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희생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냥 구원하시면 되지 왜 굳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야 됐냐구요. 오늘 본문에 답이 있는거죠. 십자가에 못 박히시도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모든 율법의 완성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과 희생을 통해 얻으신 의를 저희에게 전가해 주신 것이죠. 그런데 이 십자가 사건만 하나님의 희생인가요? 이런 예수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불의한 백성들을 데리고 수천년간 쉬지 않고 일해오신 것. 예수님꼐서 육신을 입고 먹을 것도 제대로 못먹으시고, 잠도 제대로 못주무시면서 일하신 것.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난 앞에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신 것. 하늘에 오르신 후에도 쉬지 않고 눈물로 중보하시는 것.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 저희 안에서 구원이 완성될 떄까지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 모든 것이 저희를 위한 희생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 이렇게 희생하고 계신데 여러분들께서는 점점 더 공허하고, 불안해져가는 세상 가운데 무엇을 찾고, 두드리고, 구하고 계신가요? 혹시 세상이 말하는 안식과 세상의 지혜를 찾아 세상 사람들처럼 쉼 없이 방황하고 계시진 않으신가요? 그런 것들은 지금 당장 내 삶을 만족시켜 안식을 주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나오미와 같이 텅 빈 공허함을 몰고 오고, 인생 내내 더 자극적이고, 더 안락해 보이는 다른 무언가를 또 쫓는 쉼 없는 삶의 굴레에 갖히게 만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이 말하는 안식을 추구하느라 쉼 없이 방황하는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내려 놓으시고, 저희에게 참된 안식의 삶을 주시기 위해 큰 희생을 감당하셨고, 지금도 감당하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무엇인가요?
2. 약속을 통해 믿음의 삶을 주시는 일입니다.(16-18)
[16] 룻이 시어머니에게 가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리고
집으로 돌아온 룻은 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하는 나오미에게 보아스가 행한 일들을 다 알렸습니다. 그런데 그 일들 중에 한 가지만 따로 떼서 이야기를 합니다.
[17] 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다른 일들도 다 중요해 보이는데 그건 보아스가 행한 일들이라고 요약되어 있고, 보리 여섯 번 준 것만 따로 언급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그럴까요? 보아스가 빈 손으로 나오미에게 가지 말라고 할 때 비었다는 단어는 나오미가 했던 말에 사용된 단어였습니다.
룻 1:21a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남편과 자식을 잃고 더 이상 의존할 곳이 없었던 나오미는 자신이 텅 비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죄로 안식을 잃고 텅 빈 인간은 불안 가운데 안식을 얻을 곳 찾아 방황하며 살 수 밖에 없는데요,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주시시는 것이기 때문에 룻은 그 복된 소식, 복음을 강조해서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들은 나오미에게 이런 변화가 나타납니다.
[18]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구원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생각이나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데요, 룻에게 앉아 있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니 보아스가 일을 성취할 때까지 좀 서 있으면 안되나요? 저 같은 경우 뭘 기다릴 때 가만있질 못해서 서서 왔다갔다 하는 편이긴 하거든요. 정신 사나우니까, 아니면 룻의 다리가 아플까봐 앉아 있으라고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룻이 앉아 있기 전까지 뭘 했나요? 이삭을 줍기 위해 남의 밭에서 사람의 정죄와 땡볕의 열기를 받으며 하루종일 걸어다녔습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열심히 했는데도 추수기간이 끝나면서 거지가 되어 구걸하거나, 굶어 죽거나, 누군가의 종이 되어 쉼이 없는 삶을 살아갈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 여인이 수치와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타작마당에 걸어 들어가 안식을 구해야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룻의 자기부인과 지혜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텅 비고 공허한 인간이 얼마나 괴롭고 위험하고 방황하는 삶을 사는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룻에게 나오미는 앉아 있으라는 한 마디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거나, 그래라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뭘 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룻도 굶어죽을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던 나오미가 이제 구원의 확신으로 말미암아 룻에게 앉아 있으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앉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방황하는 삶과 반대되는 정착하여 거주하다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됩니다. 이들은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은 상황인데도 구원이 성취될 것이라는 약속만으로도 구원의 확신을 갖고 불안과 방황의 삶을 끝내고 견고한 믿음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저희 역시도 삶을 살다보면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 그렇나요? 엘리멜렉과 같이 내가 신앙인으로써 제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을 더 사랑한다고 느낄 때, 열심이 있는 다른 사람과 비교될 때. 그런 모습에 대해 누군가가 내 신앙을 정죄할 때, 또는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경험들이 없을 때. 요즘 같은 경우, 코로나로 교회 오랫동안 안가니까 뭔가 축 처지고, 교회 안가는게 더 좋고 편하다고 느껴질 때. 그리고 어떤 때는 나는 특별히 잘못한게 없는 것 같은데 인생이 계속 꼬이고 고난이 가득해서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시지 않는 것 같을 때. 문득 이런 악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같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가 의심이 될 때. 이런 때에 구원에 대한 확신, 확고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요, 이런 상황들이 다 다른 것 같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행위와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들로 믿음을 평가할 뿐만 아니라 내가 선한 행위를 하거나 상황이 좋아보일 때에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구나! 하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 받은 성도들에이 신앙의 열매가 맺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인간은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고, 믿임이 회복되고 성장하는데는 저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인간의 행위나 상황이라는 기반에 절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나오미와 같이 구원의 약속만이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약속한다는 한 마디 말이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나요?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구원의 약속은 단순히 내가 너 구원해줄께라는 한 마디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의미의 구약과 신약, 그 성경에 들어있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어떻게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고 어떻게 완성하실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저희가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은 단순히 "사단의 머리를 밟아주겠다, 너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겠다"는 한 마디 말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을 해주신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행하시고 반드시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오미는 룻을 통해서 보아스를 처음 만난 날부터 보아스가 한 말, 행한 것들을 모두 전해들었습니다. 나오미는 전해들은 이야기를 통해 보아스가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이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신실한 통로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보아스의 약속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불안하고 방황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삶을 믿음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저희는 믿음의 삶이라고 하면 저희가 신앙적으로 뭘 열심히 하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삶의 한 측면일 뿐입니다. 여기에 계신 누구라도 신앙이 어느 순간 식어버릴 수도 있고, 욥과 같이 잘 하는 것 같아보이던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상황들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인생에 한 번이 아니라 계속 반복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 믿음의 삶을 산다는 것은 믿음의 근거를 나와 상황에 두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에 두어 불안하지 않고 방황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나오미를 보면 이런 믿음의 삶은 기계적으로 말씀을 읽게 하거나, 기복적이고 율법적인 기도 훈련을 시키거나,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시킨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사람과 상황에 믿음의 근거를 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믿음을 그 사람의 어떤 특정 행동이나 상황으로 평가하고 정죄할 수 도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께 대한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지금은 믿음이 없는 불신자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구원의 확신을 심어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약속하셨다는 복음에 구원의 확신을 둔 사람은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정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믿음의 삶을 살게하는 확신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살고 계신가요? 혹시 인간의 연약한 모습과 변하는 상황에 믿음의 근거를 둬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불안한 삶의 모습이 있으셨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삶을 누리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