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0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구약 성경에는 복을 받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을 오해해서 돈을 많이 벌고, 땅이 많이 소유하고, 원하던 일이 잘 풀리는 것을 복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저희가 사는 세상도 그것을 복이라고 하기 때문에 저희는 성경이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 알려하기 보다는 그게 복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복은 무엇일까요?
룻기가 마무리되는 4장에는 예수님을 모형하는 보아스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가 어떤 복을 얻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앞으로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을 통해 교회 공동체 가 복되게 된 이유를 살펴보며 성경의 복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교회가 복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정의로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1-2)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성문 위는 공동체 대표자들이 모여서 마을의 일들과 여러 갈등들을 율법으로 다스리는 곳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의 문제를 율법을 따라 해결하기 위해 율법의 당사자인 첫 번째 기업 무를 자를 불러 앉힌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유력한 자라고 소개가 될 정도로 돈, 능력, 명성을 가진 권력자였기 때문에 자기 혼자서 자기가 좋다고 생각되는대로 결정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자신도 율법에 순종하고, 율법대로 다스려 율법을 성취하고자 첫 번째 기업 무를 자를 불러 앉힌 것입니다. 보아스의 그런 목적은 2절에서 더 명확해집니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문제 해결의 과정과 결정에 돈이나 권력이 개입되지 않고 율법으로만 했다는 것을 확증할 증인들로 10명의 장로를 불러 앉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쭉 읽어보면 보아스는 이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모든 상황을 말하고, 장로들에 의해 적법하게 기업 무름의 책임이 옮겨지는 것이 증명되고, 이 장로들이 보아스가 기업무름을 하겠다는 선언의 증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율법에 순종하고, 율법으로 다스리는 모습이 나오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율법대로 다스리는 것을 정의로 다스린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율법, 심판, 판단으로도 번역되는데요, 율법이 정의인 이유는 하나님의 올곧고 공평하신 성품을 반영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내 생각에 이게 옳다, 저게 공평한거다, 이게 좋은거다라고 판단하지 않고 율법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재판의 판결에 있어서 좌우로 치우치지도 않고, 사회에도 정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힘이 있다고 두둔하지 말고, 뇌물에 율법을 굽히지 말고, 심지어 가난하다고 봐주지 말고 말씀에 순종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요? 사회에 정의가 없다면 그 사회는 악이 가득해지고, 악을 악이라고 하지 못하는 무법천지가 됩니다. 힘과 능력과 돈을 가진 사람의 말과 판단이 곧 법이요,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바로 왕이 보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해가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고 판단되서 그 해에 태어나는 남자애들을 다 죽이는 것,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재앙이지만 바로왕 입장에서는 정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보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시는게 정의이지만, 그렇게 종들을 풀어줘 사회적 경제적 손실이 오는 것은 정의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 무법천지에서 살면 얼마나 불안할까요? 힘과 돈과 빽이 없어서 공평한 기회를 갖지 못하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착취 당하고 죽기까지 한다면 얼마나 울분이 날까요? 하지만 올곧고 공평한 정의가 있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안전과, 평안과 만족을 갖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아스가 철저하게 정의에 순종하고 정의로 다스리는 것이 인생의 불안과 죽음의 공포에 떨던 룻과 나오미에게 보리 여섯 번으로 안식을 주겠다는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의롭지 못한 인생에서 겪는 고난, 불안, 우울, 분노로부터 참된 평화와 안식은 하나님께서 정의로 다스려주시고, 그 정의에 순종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방법으로 정의를 이루려고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도 성경의 정의에 버금가는 정의의 기준들이 있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뜯어보면 정의롭지 않아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의의 기준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자율운전 자동차가 운전자를 지키기 위해 행인을 쳐야 될까요, 행인을 지키기 위해 운전자를 낭떨어지게 떨어뜨려야 할까요? 빈부격차가 심해지더라도 경제발전에 집중해야 하는 걸까요, 경제발전에 저해가 되더라도 분배를 추구해야 하는 걸까요? 어떤게 정의인가요?
그런데 아무리 애매하더라도 그나마 그런 정의를 찾기 보다 내가 조금이라도 지위가 높거나, 능력이 좋거나, 나이가 한 살만 많아도 내가 생각하는 정의의 기준대로 결정하려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더 많이 보입니다. 자기가 상사라는 이유로 필요 이상의 업무를 지시할 뿐만 아니라 자기 비위를 맞추는 사람에게 승진 기회를 주고, 거스르는 사람은 공개적 비공개적 면박을 주고 소외 시킵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옳고 공평하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어느 사회에서나 아무리 애써도 자연스럽게 경제적 불평등은 생기기 마련인데요, 정의가 무너진 사회는 그 불평등이 당연하게 여겨져서 정의로운 상태로 회복되는 탄력성이 거의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사람들 중에는 흙수저에 대해 우월감을 갖거나, 더 좋은 기회를 갖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법정의 결과를 유리하게 만들거나, 형을 받아도 돈 주면 금새 풀려나는 것도 쉽게 여깁니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은 이게 세상의 당연한 이치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여 비교의식, 패배의식, 사회에 대한 분노를 갖지 않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정치적으로 이 정의의 문제가 해결이 될 수 있을까요? 정치인들 중에 정말 나라와 국민을 위해 정의로 다스리려는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오히려 상대의 정의롭지 못한 수치는 작은 것 하나라도 파헤쳐 욕하면서 자신의 불의로 인한 수치는 곧 썩어질 나뭇잎으로 덮으려다가 민낯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보니 한숨이 나오고, 실망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렴하게 최선을 다해 정의를 추구한다는 나라를 가보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나요? 다 좋을까요? 사람들이 게을러지거나, 마약이 성행하기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연하듯이 얻은 자유와 평등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해 방만해져서 동성애나 성전환과 같은 문화가 건강한 비판과 관점 없이 편만하게 됩니다. 이런 것이 주로 복지가 좋고 살기 좋다고 하는 나라에서부터 넘어옵니다.
결국 이것은 사회가 정의롭게 다스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의가 주어져도 그것을 따르길 거부하는 인간의 죄됨이 문제의 근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20대에 열심히 공부했던 사회복지를 포기하고 믿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무 것도 모르는 신학을 새롭게 공부하기로 선택하는데 이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행복하도록 돕고 싶은 꿈을 갖게 되면서 사회복지 정책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사회복지 정책가라는 것은 사람을 직접 돕는 사회복지사와 달리 나라의 복지정책 결정에 도움을 주는 연구자입니다. 나름 열심히 해서 좋은 교수님의 제자가 됐고, 좋은 동료들을 만나 길이 열려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신문기사를 보는데 많은 세금을 들여서 노숙자가 안전하게 쉴 수도 있고, 다시 재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시설의 센터를 만들었는데 노숙자가 오지를 않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안 올까요? 구걸해서 5천원을 벌면 술도 사먹고, 도박도 하고, 공짜로 주는 밥 먹고, 자기가 자고 싶을 때 아무데나 드러눠어서 자면 되는데 센터에서는 그걸 못하게 한다는거에요. 나라가 아무리 많은 세금을 들여 제도를 연구하고 센터를 만들어 사회 약자를 위한 정의를 추구해도, 내가 원하는대로 못하고 내가 만족하지 못하면 그건 정의가 아닌 것입니다. 저는 고민 끝에 그 동안 공부하던 것을 다 뒤로하고 새롭게 신학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사회 경제적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 땅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해도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도록 도우면 온 세상 정의가 무너지더라도 교회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 106:3 정의를 지키는...자는 복이 있도다
정의를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보아스가 정의를 지켜서 룻과 나오미에게 행복을 줬으니까 저희도 정의를 지키면 복을 받는 것일까요? 그게 안되서 세상 누구도 정의롭지 못한 것이고, 이스라엘도 복을 잃고 망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정의에 순종하시고, 정의로 다스리시나요?
예수님께서는 정의롭지 못한 저희를 대신해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이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 정의에 목숨을 바치기까지 철저하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 희생으로 저희는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되어 정의로운 에수님의 영, 성령님이 함께하셔서 저희를 다스려주시게 됐습니다. 정의로운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죄인과 절대로 함께 하실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예수님으로 의로움을 얻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저희와 함께 하시면서 어떻게 저희를 다스려주시나요? 저희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어주시나요? 아닙니다.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깨닫도록 도우신다는 것은 단순히 아, 그 말씀이 그 뜻이었구나만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살후 1:4-5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성경은 성도들이 겪는 모든 박해와 환난 가운데 말씀을 깨달음으로 인내하고 믿음을 갖고 사랑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자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하면서 공의로운 심판의 표라고 합니다. 여기서 심판이라는 단어가 정의인데요, 잘라내다라는 뜻도 함께 같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저의와 함께하시며, 환난과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 저희 정의롭지 못한 불의함을 율법의 철저한 기준으로 잘라내는 것을 성도에 대한 심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정의의 심판으로 다스리는 일이 성도들을 잘라내는 일에만 있나요? 아닙니다.
살후 1:6-7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9b]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여기서 공의로 번역된 단어가 지금까지 봐온 정의입니다. 성경에서 정의와 공의라는 두 단어가 혼용되서 쓰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도 뭐가 정의이고, 뭐가 공의인지 혼동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성도들에게는 고난과 환난을 통해 안식을 주시고, 예수님께 복종하지 않아 그 고난을 주는 세상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당한 고난을 복수하려고 이 쓸데없는 일에 악착같이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역시도 억울함과 복수에 매였있던 저희에게 안식을 줍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렇게 하나님의 정의로운 다스림으로 안식을 얻는 것을 복이라고 말했습니다.
창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일곱째 날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적 다스림으로 불의가 없는 거룩한 세상을 만드셨는데, 그 세상에 안식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도 룻에게 안식을 얻었을 때 복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룻 3: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안식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식을 얻었을 때 이렇게 교회가 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정의로 다스려주셔서 삶의 고난과 환난을 통해 불의함이 제거되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의 정의에 순종하게되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참된 평화, 만족, 안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런 복을 이미 얻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며 인생의 고난과 환난 가운데 세상의 방법으로 정의를 추구하지 마시고, 정의로 다스려주시는 하나님께 순종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가 복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2. 공의로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3-8)
사람들을 모은 보아스는 나오미의 땅을 물러줘야 하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자식이 없는 나오미가 죽게 되면 땅 무름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룻과 결혼해 자식을 낳고 땅을 물려줘서 엘리멜렉의 이름을 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기업 무를 자는 나오미의 땅을 물려주라는 말에는 그러겠다고 답했지만, 룻과 결혼해서 자식에게 그 땅을 물려줘야 한다는 말에는 이렇게 답합니다.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여기서 '손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망하다, 위태롭게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땅을 무르는 것까지는 어떻게 되겠는데, 룻과 결혼해서 그 가족들을 부양하고, 그 자손에게 땅을 물려줘버리면 가문이 망할 위기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이 사람을 보아스와 비교하며 나오미가 죽으면 땅만 가지려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성취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면 안된다는 것은 이 사람과 대칭되는 위치에 있는 나오미의 다른 며느리 오르바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오르바는 룻과 비교되는 선택을 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난받지 않고, 오히려 죽은 시아버지와 남편을 선대한 자로 여겨지며 배웅을 받습니다. 심지어 룻과 나오미에게 이런 공허함과 고통을 안겨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들마저도 죄된 선택을 했다고 명시적으로 비난받지 않고 오히려 기업무름으로 이름이 끊기지 않습니다. 성경의 이런 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요, 모든 인류의 죄의 조상이 된 아담과 하와에게도 죄와 수치를 덮을 가죽 옷이 입혀지고 구원의 약속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율법에 순종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와 수치를 가려주시는 것입니다. 보아스 역시도 이 사람이 율법에 순종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원래 율법대로라면 나오미가 그 사람 얼굴에 침을 뱉고, 신발을 벗기고, '이 사람은 형제의 기업 물러주기를 기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라고 수치를 줘야 합니다. 하지만 재판장의 판사와 같이 이 문제를 이끌어가는 보아스는 기업 무를자가 자발적으로 신발을 벗어 보아스에게 건네는 것으로 끝내며 그 수치를 가려줍니다. 당시 신발을 벗어 주는 행위는 수치스러운게 아니라 단순히 기업 무를 권한이나 소유권이 넘어갔다는 것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건 수치가 아니라 기업 무를 책임을 교환했다는 것을 확정할 뿐이라고 덧붙여 성명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의 수치가 가려진다는 사실은 1절 말씀에도 드러납니다.
[1b]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이름이 아무개로 익명 처리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율법에 불순종하는 사람이라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든, 위대한 왕 다윗이든, 그 다윗 가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유다이든 모두 이름이 공개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특별하게 나온 익명 표현은 보아스가 율법에 순종할 능력이 없는 죄인들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 수치를 가렸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율법의 엄격한 기준으로 정의롭게 다스리면서도 그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어 정의롭지 못한 백성들에게 사랑과 용서의 기준으로 다스리는 것을 공의로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제사 제도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죄를 덮어 용서해주고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올 기회를 주는데요, 죄인이 나는 죄인입니다하며 겸손하게 나아와 반복해서 제사를 드리면 그 용서는 끝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와 신이 이렇나요? 거의 전부가 신이 배부르고 만족하기 위해 제물을 받치는게 제사입니다. 그 신은 자비와 용서가 없습니다. 때가 되면 바치고, 신에게 거스르는 일이라도 있으면 사람이라도 바쳐야 됩니다. 사람들은 그 신을 만족시켜야 자신들도 만족과 풍요를 얻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기 자식도 바쳤습니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자식이 바쳐졌을까요? 죽어도 될만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됐던 사회 약자들을 바쳤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모두 없는 것이죠.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저희도 여전히 공의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가차 없는 세상이라고 말하는데요, 물론 어느 정도 용서와 기회가 있을 순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용서와 기회가 연약하고, 부족하고, 실수가 많은 저희에게 필요한 만큼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용서를 베푸는 자의 기분이나 마음 그릇의 크기에 따라 용서가 좀 더 있을 수도 있고, 아얘 없을 수도 있는게 세상인거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런 공의를 베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미리미리 아부하고, 선물도 드리고, 관계도 만들어 놓는 것인데, 그래서 그렇게 쏟아 부었는데도 공의가 베풀어져야 할 때에 안베풀어지면 잠 못이루고 이를 가는거에요. 우리 시대의 많은 가장들이 매일 밤 한숨을 쉬고, 잠을 뒤척이고 술을 마셔야 다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세상에 공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 실수하고, 한 번 경쟁에 도태되면 끝이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직장에 매여있고, 개인 사업을 합니다.
사회만 그런가요? 가정에서 부부싸움이 끝나지 않고 계속 평행선을 이어가는 것도 그 가정이 공의로 다스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서로가 단점을 보완해 주기도 하고, 작은 실수나 어이 없는 일들이 있어도 참아줍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제 한 번 만 더 그러면 너랑은 끝이다'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한 번 더 그러게 되죠. 그럼 그 가정의 평화는 깨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용서의 모든 기회를 잃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던 사람도 상대방이 자신을 계속해서 막 대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는 잘못 없어? 너도 이제 한 번만 더 그러면 끝이다.'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누가 더 잘못했는지 알 수도 없고, 용서와 사랑이 메말라 원수가 됩니다. 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감정이 실렸네요. 제가 제 가정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지 못했던 가장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용서 해줬어요. 잘 해 줬습니다. 사랑해서 만났으니까요. 하지만 연약한 인간에게 충분한 공의를 베풀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의 한계가 용서 없고, 가차 없고,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는 생지옥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무능력한 저희를 대신해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죽여서, 그 피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저희의 죄와 수치를 가리고 너희는 내 앞에 의롭다, 너희는 내 앞에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신거에요. 그것이 스바냐 2장 3절에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습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분노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입니다. 그런데 왜 그 때 공의와 겸손을 같이 구하라는 것일까요? 공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이기 때문에 그 다스림을 구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죄를 지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겸손의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함으로 공의를 구하는 자는 영원히 죄와 수치가 덮어져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믿는 교회가 지금 이순간도, 그리고 영원히 그 공의의 피로 죄와 수치가 가려지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엄청난 은혜이죠. 그래서 교회가 이런 하나님을 믿을 때 이 말씀이 성취됩니다.
암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지금까지 살펴보신 것처럼 항상 참된 정의와 공의를 지키고 행하고 다스리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과 같이 흘러서 그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바다를 이루는거에요. 저희는 남편이나 아내가 불의한 모습을 보일 때 끝 없는 공의를 베풀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불의한 저희에게 마르지 않는 공의를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한 번 더, 다시 한 번 더 용서할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 영혼의 깊은 곳에 내주하신 성령님께서 상황마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순종도록 다스려주실 때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마르지 않는 깊은 샘물처럼 정의를 흘려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이죠.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로 다스려주셔서 그것을 지키고 행할 수 있는 자들을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 106:3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정의와 공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다시 한 번 기억하시며 그 복을 누리시고, 가까운 주변에서부터 그 복을 깊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흘려보내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