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기적에 대해 일반적으로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기적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도 기적을 경험하길 원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서 그것이 가짜라고 말합니다. 이 두 반응 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기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모든 기적들이 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은 아닙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과 10절입니다.
살후 2:9-10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을 속이기 위해 마귀도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행하기도 하기에 분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성전 앞 앉은뱅이의 기적은 진짜 하나님이 보이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그가 불쌍해서 기적으로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기적을 보고 나에게도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낙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적은 거짓이거나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기적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셈입니다. 본문에는 기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특정한 무리가 등장하는데 이들을 통해 사람들이 왜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이 세상에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첫 번째로 이 세상에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절과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사도들의 가르침 중 이들이 특별히 싫어한 것은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의 내용보다 왜 이것을 반대했을까요? 이를 반대한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은 사실 모두 사두개인입니다. 사두개인 안에 제사장 무리가 있고 그 안에 또 성전 맡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두개인’은 구약에서 성전을 맡았던 제사장 ‘사독’이라는 이름에서 나왔습니다. 이들은 열심히 헌신하여 성전을 책임지고 자손대대로 그 직을 세습했습니다. 유대 사회는 종교 사회였고 성전은 나라의 중심이었습니다. 즉 성전이 이스라엘의 경제와 권력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1년에 세 번씩 성전에 와서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성전세를 냈습니다. 당시 로마 동전에는 로마 황제의 초상이 새겨 있어서 유대인들은 동전을 우상숭배의 도구로 여겼습니다. 일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용했지만 하나님께는 사람 얼굴이 들어가지 않은 동전을 드려야 한다고 결정해서, 다른 도시 두로의 동전을 썼습니다.
일상에서는 로마 동전을, 성전에서는 두로 동전을 내야 하자 환전상이 생겼는데 이 환전상들은 중간에서 엄청난 환전 수수료를 받았고 사두개인들은 성전의 뜰을 개방해서 자리를 임대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환전상들은 경쟁이 붙어 또 높은 수수료를 내고 성전 뜰을 차지했습니다.
남자들은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려야 했고 죄를 지으면 비둘기나 양도 바쳐야 했습니다. 집에서 아무리 흠이 없는 동물을 골라 와도 검사하는 사두개인이 퇴짜를 놓으면 바칠 수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두개인들이 운영하는 목장에서 나온 짐승만을 통과시켜 줌으로써 이들은 이중으로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 통치자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이들은 돈을 통해 영향력을 확장하는 현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정치권력은 없었지만 종교 사회의 수장이었고 높은 수수료로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니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이 천국이기에, 당시 유대인들과는 달리, 메시아를 기대하지도 않고 부활이 없다는 신학까지 만들어냈습니다.
이 사두개인들이 권력을 빼앗겼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160년에서 200년 사이에 북쪽의 시리아가 강성해지면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이집트에 원정을 갔습니다. 이집트가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자 로마가 엄청난 병력을 보내 에피파네스에게 모욕을 줍니다.
로마의 장군이 안티오쿠스 주위에 원을 그린 뒤, 원에서 나올 때까지 철군할지 로마와 싸울지를 결정하라고 하자, 일단 철수하겠다고 하고 원을 나왔지만, 너무 분노한 나머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을 침략해 황폐화시켰습니다. 성전에다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돼지 피를 뿌리고, 유대인 제사장들을 죽이고, 제우스 신상을 세운 뒤 제우스만 숭배하라는 법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 일어난 것이 마카비 일가입니다. 제사장 마카비의 일곱 아들 중 특히 유다 마카비가 그리스인 제사장을 때려죽이고 마카비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전쟁 끝에 사두개인들이 권력과 성전을 되찾았고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되돌려준 유다 마카비를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지금 권력을 누리는 것이 메시아가 준 축복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죽었다 살아나신 예수가 메시아이며, 병자가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라고 선포하자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가장 헌신된 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종교심은 하나님을 가장 반대하는 영향력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사두개인과 같은 영향력이 옛 사람을 통해 강력하게 영향을 미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린 자들은 사소한 일에서도 하나님의 개입을 알아봅니다.
아는 목사님이 한 학기 전에 유학을 가셨는데 사모님이 산달이라 같이 가지 못하고 한국에서 출산을 하고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몇 일 전에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가려고 잠시 귀국했는데 가족의 비자가 거부당했습니다. 한국의 집과 세간살이는 처분했고 미국에 짐을 보내놓은 상태라 너무 놀라서 다시 신청했더니 이번에는 목사님의 F1 비자까지 취소되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답답한 상황인데 통화를 마칠 즈음 목사님이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막으시는 걸 보니 다른 길로 인도하시려고 개입하신 것 같네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젊은 목사님의 담담한 인정이 저에게 오히려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주권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내 비자를 취소시킨 나쁜 대사에게 복수하고 싶어집니다. 내가 세워놓은 길이 막힐 때, 내가 계획한 길보다 내 인생 전체를 보시는 하나님의 길이 옳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적 눈이 열리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것을 유지하고 누리고자 몸부림치는 사두개인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사두개인처럼 욕망의 대상을 빼앗기기 싫어서 하나님이 개입해 오실 때마다 거부하고 반대하며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만드시냐고 반역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 눈이 열려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하나님이 가장 선한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고 믿었던 때가 있는데 영적 눈이 어두워지면, 눈으로 볼 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사두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적이 너무 명확했더니 사두개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나요? 16절과 17절입니다.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수십 년 동안 성전 문에서 구걸한 거지를 사두개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기적을 부인할 수 없자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좋은 일, 때로는 나쁜 일이 일어나지만 영적인 시각을 열고 보면 나쁜 일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 큰 유익과 은혜일 수 있습니다. 현실의 유익에만 초점을 맞춰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시작됐던 마음이 세상의 노예로 전락해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기도하셔야 됩니다. ‘하나님 눈을 열어주세요. 저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이 점점 어두워져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사두개인처럼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시며 통치자가 되심을 믿고 걸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세요’라고 기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왕 노릇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왕 노릇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5절과 6절 말씀입니다.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이들은 당시 유대의 최고 권력자들입니다. 동시에 대제사장의 문중입니다. 형제, 사위 등의 관계로 얽혀서 가족끼리 대제사장을 번갈아 한 것입니다. 이 이름들은 지금으로 치면 삼성가의 이름처럼 가장 부요하고 권력 있는 명문가며 큰 이름들입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자신들의 권력이 위협당할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세우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 이름으로 어떤 일이 행해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수천 명씩 모여드는 상황입니다. 이들의 관심을 7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들이 관심 있는 것은 이것이 도대체 누구의 권세, 누구의 이름에서 나오는가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바로 유대에서 왕 노릇했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근원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도 내 권력을 내려놓는 것이고 반대로 얘기하면 권력이 인생의 가장 큰 목표이자 행복인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 대제사장 무리가 그랬습니다. 성도들도 왕 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면 사두개인들이 가짜 왕으로 살아가며 권력을 유지하고자 눈 가리고 아웅하듯 예수 이름을 꺼내지 말라고 했던 태도를 가지기 너무 쉽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예수의 주권을 완전히 인정하기란 어렵습니다. 결혼해서 가장 힘든 것도 누가 왕이냐를 결정짓는 전투가 아닌가요? 그래서 결혼해서 가장 행복해지는 길은 빨리 내려놓는 것입니다. 서로 왕이 되라고 서로 섬기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성은 그렇게 할 수 없어서 힘든 것입니다. 게다 요즘의 결혼은 점점 이기적이 되어 갑니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자기 욕망을 모든 것보다 앞세우는 태도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혼하는 가장 큰 이유가 돈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 신세대들은 공동 생활비 통장을 만들어 돈을 넣고 나머지는 각자 관리한다고 합니다. 취미생활도 각자하고 투자를 각자 하니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예로 주말에 외식을 한 뒤 ‘같이 먹었으니까 생활비 통장에서 빼자’ ‘네가 가자고 했으니 네 돈으로 내라’ 혹은 ‘부모님 용돈을 생활비 통장에서 드리자’ ‘네 부모니까 네가 드려라’ 등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월급이 600, 한 사람은 300이면 얼마씩 내야 할까요? 비율에 따라 내는 게 적합할 것 같은데 생활비 통장이니까 똑같이 200만 원씩 넣자고 한다거나 해서 불만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폭발한다고 합니다. 결혼이 무엇인가요? 서로의 삶을 하나로 연합하는 과정입니다.
연합의 본질은 마음이지만 실제 삶에서의 본질은 사실 경제적 연합입니다. 헌금을 하는 이유도 돈이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연합과 헌신을 보여주는 가장 큰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왕 되고자 하는 중요한 도구인 돈을 포기하기 가장 힘든 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왕노릇하려고 합니다. 부모로서 가장 왕 노릇하고 싶은 영역은 사실 자녀입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대화 내내 자녀 자랑이 이어졌습니다. 제가 알기로 학창 시절에 전혀 공부를 잘하지 못하던 친구였는데 자식 덕분에 학부모회 회장으로 바쁘게 지내고 자랑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 다른 친구가 합류했는데도 자녀 자랑을 반복하느라 정작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는 지를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부모가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잘나고 멋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인간의 무서운 죄성이 하나님 나라를 가장 반대하는 사두개인의 모습으로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의 사두개인들 나쁘네 라고 끝내면 안 됩니다. 이것이 죄의 근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부러 그 집단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두개인같은 삶을 살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할까요? 18절 말씀을 보시면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자신을 대신한 다른 권력이 나타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뜻과 내 생각과 내 주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감정적으로 싫을 수 있지만 하나님 뜻에 복종하여 그 대상을 향해 가장 선한 반응을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랑입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가르쳐야 하지만 성인이 되었다면 이제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대상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지 물어보셔야 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착하고 통제하고 마음대로 안 되면 분노하고 미워하나요?
내려놓는 것을 순종하지 못하면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관계가 계속 나빠집니다. 결혼 초반에는 맞추어가는 기간으로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10년쯤 지났다면 서로 포기하고 맞추어주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30년째도 서로 싸우고 갈고 있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요? 기적이 매일 일어나는 곳인가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뜻대로 복종하여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팠고 고통했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나의 영광이며 하나님이 나의 통치자이신 삶을 살자 기쁨과 만족을 누렸습니다. 대제사장 무리는 왜 이런 삶을 살 수 없었죠? 21절 보시면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
이들의 관심은 내 주권뿐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였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제자들의 반응은 11절과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며 통치자며 구원자며 하나님이심을 진짜 믿었더니 어떤 태도를 보이나요? 19절입니다.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사람이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는 하나님 백성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사두개인적 영향력과 마주해야 합니다. 우리는 행복하길 원하고 이름을 내기 원합니다. 그런 마음이 나타날 때마다 무슨 문제가 생길까요?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자아가 팽창된 한 사람 곁에서는 모두 고통하게 됩니다. 엄마의 자아가 확장되어서 엄마 마음대로 하면 자식들이 고통합니다. 아빠가 화내고 소리 지르면 조용하겠지만 언젠가 복수할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고 왕권을 내려놓으시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집니다. 엄마 때문에 너무 행복해 아빠가 너무 좋아. 이런 삶을 사셔야 되지 않을까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죽어서 행복한 인생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다니고 있는데 마치 사두개인처럼 3, 40년째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어야 돼, 자식들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돼, 라고 움켜쥐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사두개인의 반열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죄성을 회개하심으로 지금 임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