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초대교회에 은혜가 충만했고 하나님의 역사도 강력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졌더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히브리 계통의 유대인들이 있었고 다른 지역에 살다가 옮겨 온 헬라파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재산을 내놓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자 그것을 관리하는 구제가 중요한 사역이 되었습니다. 4장 34절과 35절입니다.
4:34-35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육신적 가족만을 가족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면서 남들까지 가족으로 여기며 재산을 내놓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헬라파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이사를 왔거나 언어적으로 섞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자기 상황들을 알리지 못하면서 구제에서 자꾸 빠지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과부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자가 돈 벌 수단이 전혀 없는 사회에서 과부가 된다는 것은,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비참한 처지였습니다. 교회가 도와야 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지면서 몇몇이 구제에서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 갈등으로 인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에 기초해야 하는가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본질적 기초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적 기초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돈을 누구에게 얼마만큼 분배할지 의논하고 결정하는 구제 사역 또한 사도들의 일이었습니다. 단순히 몇몇이 제외되었다는 것보다 진짜 문제는 이 일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우선순위의 문제에 봉착한 것입니다.
구제나 교제나 봉사는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 말씀 위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구제로 인해서 집중력을 놓친 것이 문제임을 깨닫게 되어 그들이 대안을 찾습니다. 3절과 4절입니다.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공동체의 사이즈에 따라 7명 정도가 필요하여 이들은 몇 가지 조건을 겁니다. 내적으로 성령이 충만하면 외적인 영향력으로 나타나기 마련인데 특별히 이들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지혜는 상황을 판단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내적으로 성령이 충만한 자들이 외적으로 상황을 살펴서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또한 남을 섬기는 사람이 남에게 지적받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역할을 해낼 수 없기에 남에게 칭찬받는다는 조건도 있습니다. 이 세 조건에 의해 일곱 사람이 세워지는 것이 5절과 6절입니다.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교회에서 사역을 맡은 분들에게 안수하여 직분을 세우는 일이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안수는 하나님의 능력이 덧입혀지기를 기도하는 것이고 권한을 위임하는 역할입니다. 세워진 일곱 집사 중 우리는 스데반과 빌립 두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도 교회에서 사역을 잘했을 텐데 성경은 모든 사람의 모든 일대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중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스데반과 빌립만 특별히 기록된 것입니다. 이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7절 말씀입니다.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교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사도행전 전체가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세상 가운데 확장되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사람이 많아지고 사역이 많아지면서 본질을 잠깐 잃어버렸다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원래 목적을 되찾았습니다.
이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합니다. 이들은 사도행전 내내 교회를 핍박했던 사두개인 무리입니다. 자기 이익과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를 핍박하던 반대파들이 그리스도의 도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생긴 문제를 사도들은 어떻게 해결했나요? 행정직을 세우고 자신들은 교회의 본질에 집중함으로 교회가 원래 세워진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만의 일이 아니었고, 기독교가 전파되던 지역마다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었습니다.
100여 년 전 한국에서 언더우드 선교사가 처음 복음을 전파할 때, 관심 있는 한국 사람들 몇몇을 모아 성경을 가르친 것을 ‘경전을 배우는 모임’인 ‘사경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배우다가 20세기 초에 중국 선교사였던 네비우스가 외국인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들이 한국인을 가르쳐야 한다고 자치 선교를 강조하셨고 그때부터 지역마다 성경을 배우는 모임이 조직되어 사경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요즘은 부흥회와 사경회라는 단어가 혼용되고 있는데 이 둘은 다른 것입니다. 부흥회는 주로 영적 체험과 은사를 통해 청중을 부흥케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한참 뒤에 보급된 것이고, 한국 교회 초기 신자가 별로 없던 때 시작된 사경회는 순수하게 성경을 배우는 모임으로 보름 내지 한 달 정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워낙 적고 사경회 하는 곳이 멀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짐을 짊어지고 와서 노숙하고 밥을 해먹으면서 성경을 배웠습니다. 새벽에 말씀을 배우고 오전에 성경 강의를 듣고 오후에 성경 나눔을 하고 나면 흩어서 노방전도를 하기를 일주일에서 한달씩 반복한 것입니다.
종일 말씀을 배우고 은혜를 받고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는 일들이 계속되면서 기독교가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당시 선교사님들이 본국에 보냈던 선교 편지에 보면 한국에서 시작된 사경회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본국에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한국인들은 며칠씩 걸어서 사경회에 참석하는데 웬만한 어려움은 거뜬히 견뎌내고 있으며, 250명에서 많을 때는 1천 명씩 모여 열흘에서 열나흘 동안 성경을 배웁니다.”
또한 평양에서 선교하신 블레어 선교사는 이렇게 쓰셨습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듯 한국 교인들은 그때만 되면 모든 일상생활을 접어두고 오직 성경 공부와 기도에만 전념합니다. 이같이 성경 공부에만 전념한 결과 교회 전체가 하나 되어 사랑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부흥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만큼은 미국도 한국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사경회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사경회로, 평양 대부흥 운동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교회에 모여 성경 공부를 하던 중에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사람들이 회개하며 영적 대각성이 일어났고 평양에서 시작된 영향력이 만주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인구 2천만 중 예수 믿는 사람이 10만이 안 될 정도로 미약했던 기독교가 이 부흥 운동을 통해 부흥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한국에 100만 명이 구원받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포부로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담임 목사님께서 1909년 100만인 구령 운동을 시작하셨고 그때부터 20년 동안 열린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만 129만 명 정도라고 합니다.
교회가 술과 싸움과 노름에 빠져 있던 사람들 마음을 바꾸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자 일제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일제가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 첫 번째로 한 일이 105인 사건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당시 총독인 데라우찌를 암살하려 했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기소했는데, 기소된 105명 중 92명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 민족 지도자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약 1%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기독교가 민족의 미래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목사님들은 아이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많은 학교를 세우셨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신식 학교들은 기독교적 믿음을 가진 분들이 땅을 팔고 재산을 팔아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며 그곳에서 역차책에 나오는 신채호, 안창호 등이 배출되었습니다.
일본은 점점 심하게 탄압하다 1929년을 기점으로는 더 이상 사경회를 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몇 주씩 모일 수 없자 짧게 기도 중심으로 모이던 모임이 한국교회 부흥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가들은 한국교회가 어떻게 급속하게 부흥을 이루고 사회가 발전하며 사람들의 인식이 개선되었는가를 모두 말씀 사경회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경제만 발전했다고 한국이 잘 살 수 있었을까요? 선교사님들이 학교들을 세우고 민족 지도자들이 양산된 기독교의 기초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것입니다. 사도행전 본문에서 본 ‘말씀 중심의 신앙’이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도 그대로 재현된 것입니다.
교회만이 아닙니다. 개인의 신앙도 그러합니다. 하나님 백성 안에 말씀이 사라지면 모든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성도들이 긴 설교를 힘들어 할 뿐 아니라 심지어 목사님들도 설교를 길게 하기 힘들어 하십니다. 물론 길다고 다 좋은 설교는 아니지만 성경이 무슨 의미인지, 하나님은 누구신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배우고 마음에 심는 데에 쏟는 시간이 일주일에 설교 30분뿐이라면 여기에 만족하셔서는 안 될 일입니다.
피아노를 한 번에 24시간 쳤다고 피아노를 잘 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매일 30분씩 1년을 연습한다면 결과는 달라질 것입니다. 말씀도 그렇습니다. 30분 설교 들었다고 신앙이 불타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일상에서 밥을 먹듯 말씀이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하고, 교회에 와서는 여러분들이 방향성을 공동체적으로 돌아보고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영향력은 우리를 말씀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설교 듣기 힘든 이유도 여러분이 평소에 논리가 필요 없는 자극적인 영상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더욱 심각합니다. 영상 없이 설교를 듣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큰 교회들은 주일학교 교역자를 모집할 때 동영상 편집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그렇게 선발된 교역자들은 일주일 내 영상을 편집합니다.
아이들이 힘들어한다고 동영상으로 대체하기 시작하면 말씀의 중요성이 약화되고 개인의 신앙은 점점 무뎌지고 무너지게 됩니다. 말씀을 듣는 시간이 주일예배 한 번이라면 여러분은 인공호흡기로 생존하는 수준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더욱 풍성한 은혜에 거하기를 기도하십시오.
제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했던 때는 항상 말씀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공부에 대한 불안이 너무 커져서 하루 세 번 한장씩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 뒤 어느 날 말씀이 개인적으로 은혜가 된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본문이 시편 42편 5절 말씀이었습니다.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 내 불안을 알고 계시는구나, 내가 엉뚱한 데에 신뢰를 두어서 불안하구나,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겠다는 깨달음과 함께 영혼에 불이 난 듯 한 감동과 위로를 받은 날이었습니다. 이 구절이 너무 은혜가 되어서 밤에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교 후에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하고 독서실 다녀온 후에 새벽 한두시쯤 몸이 녹초가 된 상태에서 하던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를 시작한 지 또 몇 달 뒤 하나님이 저를 안아주시는 것 같은 느낌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때도 시험과 점수와 입시 때문에 불안하고 기복적이던 어린 아이에 불과한 저를 하나님이 아신다는 감동에 밤마다 울기를 일 년이나 지속했습니다.
이 은혜가 바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던 해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후 제 인생에서 말씀이 부흥될 때마다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나요? 기적은 일시적이고 나중에는 어렴풋해집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 기억과 함께 말씀의 은혜가 박혀 있습니다. 30년이 흘렀는데도 시편 42편을 읽을 때마다 그날이 기억납니다.
영적 부흥에는 항상 말씀이 선제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 우리는 말씀을 계속 접해야 합니다. 신랑 예수님을 기다리듯 일상에서 말씀을 가까이하며 사랑할 때 하나님이 반드시 찾아오시고 새로운 은혜를 더하시며 남은 인생을 힘 있게 붙드실 것이며 하늘사랑교회 또한 말씀의 기반 위에 서 있을 때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의 기초 위에 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