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성도에게 가장 큰 축복은 성령 충만일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다스리시는 상태입니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 예수님과 우리가 완벽하게 하나 되어 동행하다, 인간이 죄악에 영향 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가는 상태이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마치 에너지가 가득 채워져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의 자아가 완전히 하나님에게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게 되는 완전한 복종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구원을 이루신 목적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부터 23절입니다.
마 1:21-23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죄에 매인 자들은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자기 욕망대로 다른 사람들을 도구화하며 하나님을 우상으로 대하는 본질적 죄악 때문에 자유와 안식을 누릴 수 없고 파멸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충만한 상태’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목적인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주어지는 놀라운 복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이 죄인이고 예수가 필요하다고 인정한다면 여러분 안에 성령이 확실히 내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충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신다 해도 우리를 로봇처럼 다루시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데 왜 나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까?’ 고민하기도 하고 또 단번에 변하고자 오래 금식하거나 산 기도를 하거나 은혜가 많다는 집회에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단번에’ 성령 충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사실 삶의 전 과정을 통해 자아가 부서지고 하나님을 받아들여 오랜 기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 받을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성령 충만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령 충만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권능과 믿음과 지혜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vv.8-10
첫 번째로 권능과 믿음과 지혜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성경에서 누군가가 성령 충만하다고 여러 차례 반복하고 강조한 경우는 스데반이 유일합니다. 8절은 특히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다고 하는데 ‘은혜’도 사실 성령을 대체한 표현입니다. 성령은 스데반이 착해서, 열심이 있어서, 탁월해서 등의 이유가 아닌 은혜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에게 임한 성령 충만은 권능으로 드러났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성령이 충만했고 그것이 어떻게 드러났는지 설명하는데 6장 3절을 보시면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
택함을 받은 일곱 집사의 기준은 성령 충만, 지혜 충만이었습니다. 성령 충만은 내적이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적으로 영적으로 충만하게 될 때의 결과로 이 사람이 성령 충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결과가 지혜인 것입니다. 또한 6장 5절입니다.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
믿음 또한 충만합니다. 즉 스데반은 내적인 성령이 충만하여, 겉으로 지혜와 권능과 믿음의 영향력이 다양하게 나타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지혜와 권능과 믿음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 스데반에게 성령 충만으로 인한 다양한 영향력을 허락하셨을까요?
그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목적에 해당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내면이 죄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다양한 능력이 주어지면 대부분 그것을 자기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자들에게 성령 충만을 허락하셔서 그것이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다양한 영향력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하십니다. 특별히 권능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8절입니다.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권능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영적 권세를 발휘하는 권능입니다. 이런 종류의 권능은 교회가 처음 부흥하기 시작할 때,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과 대치할 때,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성령의 결과입니다.
한국에 복음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는 영적 권능을 경험했습니다. 지금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기에 이런 권능을 쉽게 볼 수 없습니다.
지금도 복음이 처음 전파되는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이런 기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전통적인 불교 국가인 네팔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을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10년째 낫지 않던 병이 낫자 주변을 전도해서 산꼭대기에서도 교회가 시작된 것을 보았습니다. 네팔 정부가 당황해서 법을 제정하고 교회에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지만 열기가 불길처럼 번지고 있어서 막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성령 충만으로 권능을 허락하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성령 충만으로 믿음을 허락하실 때는 언제인가요? 5절을 보시면
[5] …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기초입니다. 왜 우리가 세상에 유혹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나요?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매일 세상의 영향력에 요동하다 하나님 나라가 희미해져 버리기에 일상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기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이 시간에라도 나와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면 그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람의 가장 기본은 무엇일까요? 본인이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 또한 노력의 영역이 아닌, 성령 충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데반에게 주어진 것은 성령 충만으로 인한 지혜였습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하나님 나라는 기적을 통해 확장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혜의 말씀으로 확장됩니다. 생명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들을 때 사람들의 생각이 변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배우자나 자녀를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람은 말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준비시키시고 전하는 사람에게도 성령 충만으로 인한 지혜를 전하도록 역사하셔야만 변화가 나타나는데 바로 스데반에게 그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무지한 자들, 보이는 것에 매여 살아가던 자들이 성령으로 눈이 열려 하나님을 예배하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며 죽음 이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가요!
그런데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과 믿음과 지혜가 겉으로 나타나게 된다면 이것은 더욱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제일 놀라운 축복은 우리와 같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고, 세상의 악이 팽창하다 여러분 앞에서 그 확장을 멈추게 되고, 여러분을 통해 낙심한 자가 일어나며, 지옥으로 달려가던 자들이 여러분 덕분에 돌이키게 된다면 이것처럼 놀랍고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는 성령의 내주로 하나님 백성 된 것에 안주하지 않고 사모해야 됩니다. ‘하나님 제게도 성령 충만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세요’ 기도하셔야 합니다.
지난주에 일본 고시엔 전구 고등학교 야구선수권 대회 소식이 한국에까지 전해졌습니다. 1940년대에 시작된 한국계 고등학교인 교토 국제학교가 고시엔 전국 고교 야구 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한국 고등학교 중 야구부를 갖춘 학교가 40군데인데 비해 일본은 4천 개라고 하며 이 경기의 TV 시청률은 20%가 넘는다고 합니다.
한국인 재일교포를 대상으로 시작했던 학교라 정부에서 지원도 받지 못하다가 재정난이 심해지자 이름을 국제 학교로 바꾸고 지원도 받고 중학생도 모집하고 야구부도 만들어서 첫 해에는 0대 34로 지던 학교가 몇 년에 걸쳐서 실력이 향상되었습니다. 또한 학생들도 한류의 영향으로 지금은 한국계가 30%, 일본인이 70%라고 합니다.
작년에도 고시엔 대회에서 준결승까지 올랐다가 이번에 결승에 오른 것입니다. 저와 아무 상관 없는 경기였지만 이 결과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사실 선수들은 다 일본인이지만 한국계 학교이기에 우승하면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진다고 합니다.
9회 말까지 0대0이다가 연장까지 가서 2대1로 극적으로 이기게 되었습니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벤치에 앉아 있던 선수들이 전부 나와서 기뻐 뛰고 얼싸안는 것을 보니, 기여도가 전혀 없는 저도 한국계 학교가 4천의 경쟁을 뚫고 승리한 것이 무척 뭉클했습니다.
저보다 조금 더 감동한 사람들은 현장에 응원 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기쁜 사람은 바로 경기에 직접 뛴 선수들입니다. 땀 흘린 순간, 포기하고 싶은 순간, 경기 중 긴장된 순간, 마지막 승리의 함성까지 이들은 아마 평생 그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동참했을 때의 감동이 이런 것입니다. 그저 혼자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교회만 한 시간 다녀오고 주중에는 세상 삶을 살아도 천국에는 죄의 영향력이 없으니까 천국 가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동참한 사람들의 기쁨에는 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다스려 주셔서 죄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인생 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이루어지면 놀라운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을 사고 입고 가져도 유효기간이 짧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한 때는 성령이 임하시는 권능의 사역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오랜 시간을 걸쳐 욕망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한 이후에 하나님이 저를 통해 말씀의 은혜를 베푸신 적이 있습니다.
어느 청년부 부흥회에 가서 간사들과 식사를 하는데 어떤 자매가 찾아 왔습니다. 10년 전에 대학부 수련회에서 제 설교를 들었는데 그 때 예수님을 믿게 됐고 그때부터 예수님께 헌신하기 위해 애쓰고 있고 인생이 바뀌었기에 언제 한 번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공중에 뜰 듯이 행복했습니다.
저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좋은 영향력을 받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면 다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약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격려하고 세웠던 사람들이 많은 무리를 이루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자리를 소망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며 예수 믿어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여러분을 통해 예수를 알고 인생이 바뀐 사람들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를 사모하기를 축원드립니다.
성령 충만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사탄의 거짓된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vv.11-15
두 번째로 성령 충만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탄의 거짓된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11절 말씀에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사탄이 제일 잘 쓰는 도구는 진리와 반대되는 것들을 진짜처럼 믿게 만드는 거짓말입니다. 지금 스데반을 공격하는 배후에도 마귀가 있습니다. 사람들까지 매수해서 거짓을 말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했다면 이스라엘 종교사회에서는 바로 돌로 쳐도 되는 심각한 죄입니다. 그러자 공회가 소집됩니다. 12절입니다.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종교 재판에서 판결을 받으면 그냥 죽이면 됩니다. 13절에 거짓 증인도 세웁니다.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종교 사회에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모세를 모독하고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는 14절에서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비진리라고 100% 비진리가 아닙니다. 이단들이 하듯 진리를 살짝 꼬아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요한복음 2장 19절입니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은 성전이신 예수님의 몸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이 와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실체인 임마누엘 예수가, 지금은 허물어지지만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을 얘기하셨다고, 참 성전이 예수였다고 스데반이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살짝 비꼬아 성전을 모독했다고 합니다.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종교 재판이 벌어졌고 거짓 증인도 나왔고 무리는 점점 동요하고 있습니다. 웬만한 사람은 두려워서 벌벌 떨 상황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어떠했나요? 15절 말씀입니다.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죽음을 앞둔 상황인데 얼굴이 천사 같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신 증거입니다. 성령 충만의 결과입니다. 어떤 위협과 두려움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견고함. 세상을 살아갈 때 이것만큼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실 두려워서 다른 것을 자주 의존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짓말을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도구로 흔히 사용합니다. 한국과 비교하면 민주주의 역사가 수백년이나 된 미국에서도 거짓말은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공화당의 트럼프는 재임 시절 3만 573번의 거짓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환산하면 3분 15초마다 한 번 꼴로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번 주에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카밀라 해리슨을 선발했습니다. 민주당 여러 연사 중 한 명인 스테파니 그리샴은 도널드 트럼프의 백악관 대변인이었던 공화당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트럼프가 너무 거짓말을 시켜서 이래도 되냐고 물었더니 트럼프는 ‘당신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충분히 반복해서 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된다’고 종용했다고 합니다. 결국 양심에 찔려 사임하고 지금은 트럼프가 왜 당선되면 안 되는지 열변을 토하고 있습니다.
3분마다 거짓말하는 인간이 대통령 자리를 두고 박빙의 승부를 펼치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마귀는 이런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아예 모든 사람들이 비진리를 진리처럼 받아들이도록 속이는 데 탁월합니다. 마귀의 가장 강력한 비진리는 ‘너 빼고 다 잘 살아’입니다.
SNS와 유튜브를 보면 나 빼고 다 외국 가 있고, 호텔에서 밥 먹고, 차가 좋고, 애들은 말 잘 듣고, 다 행복해 보입니다. 이 비교 때문에 우리는 더 불행합니다. 제 개인 생각이 아닙니다.
얼마 전 미국 공공보건국장이, 미국의 미래에 가장 큰 해악은 마약이나 총기가 아닌 SNS라고 발표했습니다. 미국 청소년들 하루 평균 SNS 사용시간이 4.8시간입니다. 인격 형성이 안 된 청소년들이 매일 다섯 시간씩 남들 뭐 하나 구경하고 남처럼 되고 싶어하다가 좌절합니다.
SNS가 등장한 그 해부터 우울증이 증가하다, 지난 10년 동안 우울증이 2배로 증가했고, 청소년 자살은 3배로 증가했고 중독성 약물은 30% 증가했습니다. 공공보건국장이 아이들이 SNS 하지 못하게 법으로 규정하자고 주장합니다.
그 세계에 계속 머물면 모든 기준이 세상에 맞춰지고, 나도 그렇게 살고자 몸부림치게 되고,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는 인생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가 왜 성령 충만을 열망해야 되나요?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우리가 무엇을 해도 행복하고 더 기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이 경험하는 만족과 기쁨보다 더욱 큰 자리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노회 목사님들 10여 분 정도와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말씀도 별로 없으시고 점잖으신 목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요즘 지하철 노방전도를 다닌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평생 노방전도는 해본 적이 없는데 얼마 전부터 강권하시는 마음이 많이 들어서 아내와 상의를 하셨는데 사모님도 그 마음을 같이 느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무시하고 개중에는 화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인도 성격상 너무 어렵고 힘든데 어쩌다 한 명이 전도지를 받고 교회 가보겠다고 할 때, 또 어쩌다 한 명 다음 날 와서 이것이 무슨 말씀이냐고 조금 더 알고 싶다고 할 때, 수 백 명이 무시했던 마음을 씻기는 행복함을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이 감사를 맛보게 하시려고 자기를 보내신 것 같아서 이제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는 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에 목사님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전에 맛보지 못한 자리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거기서 맛보는 기쁨이 이전에 살아가던 일상을 뛰어넘는 큰 만족과 행복의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 인생에 찾아오셔서 성령 충만한 은혜를 허락해 주세요’라고 간구하실 때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에도 큰 행복과 만족을 경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