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21]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한 설교에서 특별히 모세에 대해서 가장 길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유는 모세는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구약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세에게서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마치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중요하게 여기듯 유대인들은 모세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의 목적은 유대인들이 이렇게 모세를 중요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39절입니다.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위대한 모세조차 거절한 것이 유대인의 역사이기에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세는 누구인가요? 오실 예수님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예수님을 모형하나요?
모세는 어떻게 예수님을 모형하나요?
1.세상의 큰 힘을 내려놓음으로 모형합니다. vv.17-29
첫 번째로 세상의 큰 힘을 내려놓음으로 모형합니다. 20절과 21절 말씀입니다.
[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21]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당시 이집트 왕은 히브리인들이 너무 많아진 것에 두려움을 느껴 사내 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태어나자 부모는 아이를 몰래 기르다가 석달이 지나 더 이상 감출 수 없자 역청을 바른 작은 상자를 만들어 나일 강가에 띄웁니다.
마침 목욕을 하러 나왔던 바로의 딸이 그것을 발견하게 되고 양아들로 삼아 모세를 길렀습니다. 결국 히브리인인데 이집트의 왕자로 자라게 되며 왕궁에서 어떤 사람보다 탁월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고대에는 지금과 같은 보편 교육이 없었기에 특별한 교육을 받은 사람은 남과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다 특별히 말도 잘하고 행동도 탁월한 능력자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말에 능하고 행동에 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나요? 이런 세상적 준비가 된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인가 하려고 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23절과 24절을 보시면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애굽의 왕자로 살면서도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침 압제당하는 한 이스라엘 사람을 보고 자기 힘으로 그를 구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힘으로 누군가를 구원하려고 하는 것은 참 구원이 아님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25절입니다.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의 왕자로 삼으시고 강한 능력을 주신 이유가 히브리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애굽 사람을 쳐죽여서 그들을 압제로부터 구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감사하게 여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 범죄가 드러나게 되고 28절과 29절에서
[28]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모세는 도망자 신분이 되고 맙니다. 이 세상 힘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누군가에게 구원을 기대하고 착각합니다. 역사상 영웅들이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정치인이 떠오를 때마다 늘 열광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권력으로도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삶의 환경을 바꿔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노예된 자들을 하나님 백성 되게 만드는 이 놀라운 구원은 세상의 큰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모세의 이야기는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당장 세상에 개입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이 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신학을 만들어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이신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시고 세상은 만드셨지만, 그 후 세상에 개입하지 않아 무능한 하나님이시라는 입장입니다. 많은 사람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만 나만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대로 도와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편해합니다. 이는 다 하나님을 오해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나요? 시편 29편 5절부터 8절을 보시면
시 29:5-8 [5]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6]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7]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하나님의 소리가 얼마나 강력한지 수십 미터 되는 백향목이 꺾어져 버리고, 수십미터 땅속에 박혀 있는 나무가 얼마나 요동하는지 송아지처럼 펄떡펄떡 뛰게 만드십니다. 시편 29편은 하나님의 권세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개입만 하신다면 온 세상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는 구약의 하나님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능력이 많아서 원수들을 쓸어버리셨는데 신약의 예수님은 무력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본질이 같으십니다.
예수님은 본인이 구약이 이야기하던 하나님이심을 여러 차례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말로 얼마나 강한 권세를 보이셨는지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8장 24절부터 26절을 보시면
마 8:24-26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구약의 하나님이 말로 온 세상을 요동케 하셨듯이 예수님은 요동하는 바다를 말씀만으로 잠잠케 하실 수 있는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지금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세와 능력으로도 요동하는 바다를 잠잠케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가지신 능력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지금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힘이 약하셔서 군병들에게 잡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인가요? 아닙니다. 얼마든지 군대를 무찌르실 수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복종하여 그 자리에 가셨음을 요한복음 18장 3절과 6절에 나와 있는데 먼저 3절입니다.
요 18:3, 6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군대가 예수님을 잡으러 와서 예수님을 찾았더니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얘기하십니까? 6절입니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다 나다’라고 대답했더니 그들이 우연처럼 넘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본문의 ‘내가 그니라’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내 이름이 여호와다’라고 하신 말씀의 헬라어 ‘에고 에이미’로 동일한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이 ‘내가 구약의 그 하나님이다’라고 하시자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군대가 다 자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만으로 나약한 인간들은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이 왜 잡히셨나요? 마가복음 10장 45절을 보시면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세상 사람들은 보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을 권세를 휘두르며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물질적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상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습니다. 돈으로 건물 세울 수도 있고 권세로 남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영역에 해당합니다.
아무리 세상의 큰 권세와 힘을 가져도 사람의 마음을 바끄거나 진정한 순종과 존경을 얻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나요? 마가복음 10장 42절입니다.
막 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쉬운 성경은 조금 더 쉽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쉬운성경] 막 10:4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이것이 세상이 권력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남을 지배하려는 자들의 결과가 무엇인가요? 관계가 깨지고 주변 사람들은 떠납니다. 이번 주에 창세기 3장에 ‘여자는 남편을 원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릴지니라’ 본문을 가르칠 일이 있어서 앞에 앉으신 분께 아내분을 다스리려고 하지 않냐고 여쭸더니 ‘제가 그래서 이혼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텐데 성경에도 다스리라고 되어 있길래 다스리다가 이혼당했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만약 가장 가까운 사람이 여러분을 지배하려고 한다면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육체적, 감정적, 언어적 폭력은 죄의 결과입니다.
창세기 3장은 생략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죄가 들어오자 여자도 남편을 다스리기 원하고 남자도 아내를 다스리기 원해서 지배욕으로 서로 인생을 파괴하게 되는 무서운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원래 서로를 소중한 존재로 섬기고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인간이 이제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똑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시키기 위해 화내고 소리 지르고 짜증내고 조종하는 무서운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이 부름받은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왕자의 자리를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왕자의 힘으로도 진짜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천지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나 하나 구원하여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서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만이 생명이며 구원임을 우리가 인정하고 믿을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해 참 생명이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어두워서 세상의 길이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에게 욕망을 투영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분노합니다.
여러번 말씀드렸듯 여러분 안에 있는 분노는 여러분이 하나님 되고 싶어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입니다. 화나실 때마다 ‘하나님도 아닌 내가 내 원하는 대로 내 주변 사람을 통제하려고 했구나’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시면 여러분은 아직 애굽 왕자 모세처럼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내는 세상의 방식으로 통치하려고 하는 이 세상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흘려내고 계신가요?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예수를 올바로 알게 되었나요? 하나님은 때로 내 힘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개입하십니다.
모세도 불순한 의도로 백성을 구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 교만으로 인해 결국 쫓겨나 광야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의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나요? 히브리서 11장 24절부터 26절입니다.
히 11:24-26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의 반응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해 오시면 나는 원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두 손 두 발을 묶으시고 어쩔 수 없이 세상의 권세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게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평가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세가 자기 힘을 내려놓았듯, 예수님이 권세를 내려놓고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하셨듯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고 계신가요? 아니면 여러분 힘으로 누군가를 바꿔보려고 매일 소리지르고 미워하다 몸부림치다 관계가 깨지고 갈등하며 고통하고 계신가요?
세상의 방식을 내려놓지 못하면 구원이 아니라 파괴와 멸망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단순히 혼자 천국가는 것이 끝이 아니라면 우리 인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가 나타나도록 해야합니다.
모세는 어떻게 예수님을 모형하나요?
2. 하나님이 통치자와 속량하는 자로 보내심으로 모형합니다. vv.30-36
두 번째로 모세는 어떻게 예수님을 모형하나요? 하나님이 통치자와 속량하는 자로 보내심으로 모용합니다. 30절 상반절입니다.
[30a] 사십 년이 차매 …
성경은 40년이 지났다고 표현하지 않고 ‘찼다’고 표현합니다. 채워질 분량이 채워진 시점입니다. 왜 40년인가요? 구약에서의 40은 인생의 한 세대를 의미하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는데 당시 평균으로 보면 사실은 세 번의 인생을 산 것과 같습니다.
왕자의 아들로 40년, 광야에서 40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40년.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특별한 능력과 은혜를 주셔서 길게 살았지만 어쩌면 이 40년은 광야를 통해 애굽에서의 힘과 교만이 죽임을 당하는 여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마음대로 사는데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백성이라면 하나님이 개입해 오십니다. 언제인가요? 세상의 힘을 다 내려놓으며 시간이 채워지는 하나님의 때까지입니다. 그때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날 때입니다. 30절 하반절입니다.
[30b] …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구약에 나타난 천사는 하나님의 임재의 현현입니다. 하나님이 불꽃 가운데 오십니다. 40년이나 지나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했을 때 찾아오십니다. 지금이 바로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32절입니다.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하나님의 현현을 본 자들이 보이는 두려움의 반응입니다. 그동안 모세가 얼마나 많은 고통의 외침을 외쳤을까요? 자기 인생이 무엇인지 얼마나 많은 회의와 고민을 했을까요? 그간 오시지 않았던 하나님이 40년이 차자 오셔서 34절에서 사명을 주십니다.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애굽은 세상입니다. 죄와 마귀로 인해 세상에 사로잡혀 고통하는 자의 소리를 하나님은 늘 듣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구원자를 보내고자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애굽에 사로잡혀 고통하던 자들의 이 탄식 소리에 모세를 보내셨듯, 죄에 사로잡힌 자들이 내는 구원을 열망하는 간구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35] …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관리’는 최고 지도자를 뜻하는 헬라어 ‘아르콘’으로 ‘통치자’라고 번역하면 좋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야기할 때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됩니다. 골로서 2장 10절을 보시면
골 2:10 …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모세가 이스라엘 전체의 리더였던 것도 예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모형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로 예수님을 일컫는 가장 중요한 표현이 무엇인가요? 요한계시록 17장 14절입니다.
계 17:14 …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
믿음의 여정에서 이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왕의 왕이라면 예수님이 유일하고 가장 탁월하셔야 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많은 왕들 중 하나로 생각하게 됩니다. 다른 주들을 의지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모세를 볼 때도 하나님이 세우신 통치자라고 인정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야를 걸을 때 끊임없이 반역했습니다. 모세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반역할 때마다 너무 화가 났고 지쳤고 힘들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인정하기가 쉽지 않아도 이것은 믿음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를 속량하시는 분이십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속량하는 자’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에게 어떻게 반응했나요? 35절입니다.
[35]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 …
이것은 모든 세상 사람들의 반응이며 때로 우리들의 반응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주인이며 통치자 되시기를 원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다들 인생의 계획이 있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하나님이 예수를 우리 통치자와 구속자로 만들어가시는 과정입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세상의 힘으로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거짓을 거슬러 믿음으로 반응하여 사랑하고 섬기며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인생이 되고 그 은혜를 전파해야 합니다. 모두가 목사나 선교사가 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통치받는 자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 생명과 은혜를 전파해야 되지 않을까요? 모세처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길에 서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