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스데반은 7장의 긴 설교에서 유대인들의 강퍅함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요셉, 모세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주제를 바꾸어 성전과 율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족장들을 설명하다 갑자기 왜 성전과 율법을 언급하나요? 전 장에서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공격했던 내용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공회에 세우고 6장 13절과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공격했습니다.
6:13-14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유대인에게 생명과 같이 중요했던 성전과 율법에 대해 스데반이 이단적인 사상을 전파했다고 거짓 공격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에 답하기에 앞서 구약의 역사를 훑다가 지금 본론이자 결론에 다다른 것입니다. 이들이 거짓 증인까지 세우며 공격한 이유는 이들이 성전과 율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은 이스라엘의 성전을 수호한다는 자들이었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고 헌신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귀한 유산인 성전과 율법을 지키겠다는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강퍅하여 예수님을 핍박하며 교회를 방해하는 무리였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이들은 생명이 있는 복음이 아닌 자기들이 만든 종교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어려운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영적인 눈을 가리는 세속주의 때문입니다. vv.44-50
첫 번째로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어려운 이유는 영적인 눈을 가리는 세속주의 때문입니다. 44절 말씀입니다.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성전’ 이전에 하나님은 왜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나요?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 죄를 용서받고 축복받아 살 수 있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이 죄인을 만나시는 장소를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떠돌 때는 이동할 수 있는 성막을 주신 것이고, 나라가 이루어진 뒤에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이동식 성막이 아닌 집을 짓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47절에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하게 여겨졌던 성전마저도 진짜를 보여주기 위한 그림에 불과했습니다. 48절입니다.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이 땅에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도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무엇이라고 얘기했나요? 49절과 50절을 보시면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 것입니다. 특정 장소를 정하고 금을 칠한 뒤 ‘하나님은 이곳에만 계시고 이것을 지키는 우리만 중요한 사람이고 다른 곳들은 오염되었다’는 이들을 향해 ‘그것은 진짜 올 것의 그림자며 모형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진짜는 무엇인가요? 요한복음 2장 19절부터 21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2:19-21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46년 동안 지은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아닌 헤롯이 지은 크고 화려한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을 헐면 3일 만에 짓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은 본인 자신이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고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 단어 뜻 자체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성령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셨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 구약에 성막도 존재했고 성전도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실체가 오셨는데도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과거의 그림자를 진짜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마치 모델하우스 같습니다. 모델하우스 안은 아파트와 똑같이 생겼고 가구도 있고 부엌도 화장실도 있지만 벽은 나무판자로 지어졌고 수도는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델하우스는 진짜 아파트의 홍보물이고 분양이 끝나고 아파트가 지어지면 모델하우스는 철거합니다.
구약의 성전도 똑같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니 그분이 어떻게 오실지를 임시적으로 그림을 통해 바라보다가 진짜가 오면 그림을 버리라고 주신 것인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델하우스로 장사를 너무 잘하면서 돈을 번 것입니다.
이스라엘처럼 모두가 종교 생활을 하는 공동체에서는 성전이 권력과 돈의 소재였습니다. 지금 이곳이 성전인가요? 아닙니다. 이곳은 우리가 모이는 장소인 예배당입니다. 이제는 예수 믿는 자에게 성령이 오셔서 함께하시기에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입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그분이 성전이 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고 직접 기도할 수 있고 직접 축복 받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이 놀라운 복을 받았는데도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성전을 통해 누리는 이익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보여주는 종교성은 종교적 세속주의를 의미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영적인 것을 믿지 않고 이 땅의 삶을 즐겼습니다. 90%의 사람들이 하루 한 끼로 근근이 살아갈 때 이들은 매일 성전으로 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내는 성전세에 로마 황제의 초상이 있으니 받을 수 없다고 하여 초상 없는 두로 동전으로 바꿔주며 환전 수수료를 받았고, 상인들에게 장사를 허용하며 자릿세를 받았고, 사람들이 끌고 온 양과 소는 퇴짜 놓고 자신들이 운영하는 목장의 양과 소를 팔아 이익을 얻었습니다. 헤롯 가문과 로마에게 뇌물을 상납하며 권력과 결탁한 이곳이 그들에게 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메시아를 믿지 않았습니다. 수백 년 전에 성전을 돌려준 마카비가 메시아라고 믿었고 부활도 천사도 내세도 믿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현재가 행복하고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세속주의는 사실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입니다.
세속주의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물질주의와 똑같은 개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종교성만 추가된 것입니다. 문제는 세속적 종교성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거나 예수를 믿는 것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이들이 기대하는 것은 이 땅에서 문제가 해결되고 복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린아이 수준의 종교성을 가진 사람까지도 부르시기 위해 때때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한국교회가 그랬습니다. 50~60년대 정말 가난할 때 세속주의적 마음을 가지고 오는 자들을 막지 않으시고 기적도 보이셨습니다.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같이 내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라노라’라는 구절에서 5중 복음 3중 축복이라는 신학을 만들어냈습니다. 복음을 중생, 성령 충만, 치유, 축복, 천국의 복음으로 나누고 또 복음을 누린 자는 영적, 환경적, 육체적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5중 복음과 3중 축복을 다 누렸나요? 가지고 있던 고깃배도 내놓고, 바울은 평생 아파서 기도합니다. 이렇게 성경에 명확하게 답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세속주의적 종교성에 열광하여 100만 명이나 모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사실 똑같습니다. 하나님께 실망할 때가 대부분 어떤 때인가요? 바울 사도처럼 복음을 전하며 핍박과 환난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울며 기도하나요? 대부분 내가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문제를 해결 안 해 주시냐는 투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문제에 관심이 없으신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데려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의사는 병이 심해서 주사를 3개나 놓아야 하는데 아플 거라고 하고, 아이는 주사를 놓지 못하게 해 달라고 떼를 쓰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나요? 올바른 부모라면 아픈 주사를 놓도록 아이의 손을 붙잡을 것입니다. 주사를 맞아야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하나님이 병 낫게 하실 수 있고 사업 잘 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근원적인 문제를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점은 우리가 세속적 마음으로 하나님께 접근해도 쳐내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어린 아이 같은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용납하시고 그 부족한 수준대로 은혜를 베푸시며 이끌어 가십니다.
제가 하나님을 제일 간절하게 찾았던 시초는 사실 학교의 성적 때문이었습니다. 고등학교 공부가 힘들어지면서 하나님께 잘 보여야 지혜를 주시나 해서 종교적으로 애쓰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앞 교회에서 등교 30분 전에 가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심지어 수해가 나서 지하실에 방석이 둥둥 떠다니는데도 양말을 벗고 물 위 방석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 열심들로 성적은 오르지 않았지만 은혜가 임했습니다. 성적 따위의 일로 나를 찾냐고 나무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 한 번의 경험으로 믿음이 단번에 성장했을까요? 그 이후로도 하나님이 돈을 안 주셔서 낙심하고 병이 안 나서 힘들어하고 인생의 문제로 고통한 기간이 참으로 길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문제를 해결 안 해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만약 돈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바로 돈을 주셨다면 제가 수십 년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돈이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고 의존하는 것이 진짜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플 때마다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면 저는 꾸준히 운동하고 먹을 것을 가리는 절제를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제는 해결해주지 않으셨지만 제 안에 있던 욕망을 하나님이 다 드러내시고 하나씩 죽여나가시며 참 은혜를 배워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인생을 돌아보니 그 고통들이 모두 너무 감사합니다. 그 과정이 없었다면 저는 여전히 어리석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으며 불안하게 살았을 텐데 하나님이 제 죄를 해결하시고 잘못된 욕망을 버리도록 은혜를 베푸셨기에 감사와 찬양의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론 세속적 종교성도 용납하셨지만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이젠 우리도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전히 내 문제가 해결 안 돼서 마음 상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일을 위해 여러분의 인생이 사용되는 성도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성령을 거스르는 율법주의 때문입니다. vv.51-53
두 번째로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령을 거스르는 율법주의 때문입니다. 51절 말씀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이 핵심 구절을 말하고자 스데반이 이 긴 설교를 한 것입니다. 이들은 다 할례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무슨 할례를 못 받았나요? 마음과 귀의 할례를 못 받았습니다. 옛사람이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나야 되는데 죽은 존재라 순종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너희에게 새로운 생명의 길이 열렸다. 모형이 아닌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알아듣지 못하자 이들은 무슨 일을 했나요? 52절입니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죽였던 것처럼 이들은 예수도 죽였습니다. 영원히 귀를 닫고 살던 자들이 행한 무서운 죄입니다. 이들이 결정적으로 반대하고 거역한 것이 무엇인가요? 53절입니다.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바리새인들이 들으면 놀라 자빠질 노릇입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키던 자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적들이 쳐들어오면 안식일에는 싸울 수 없다고 서서 죽은 사람들이 수만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율법을 하나도 안 지킨다고 정죄할 수 있나요?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나에게 손해가 미치지 않을 정도로만 합니다. 그런데 율법의 본질은 어느 정도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나요? 누가복음 10장 27절을 보시면
눅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구약 율법 전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것이 이 구절입니다. 전부를 다하는 사랑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사랑의 아이콘인 엄마도 새벽에 애가 자꾸 울면 짜증이 납니다. 말 안 들으면 화가 나고 내 마음대로 크지 않을 때 실망합니다. 내 생각, 내 뜻, 내 욕망이 가득하기에 우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언제만 사랑이 가능한가요? 예수가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셔서 우리가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입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이 내 안에서 움직이셔서 나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사랑한 그 한 번의 사랑조차 하나님은 온전한 사랑이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러나 종교적 율법주의자들은 자기 사랑이 꽉 차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자신이 종교적으로 괜찮은 사람임을 인정받고, 다른 사람에게도 내가 잘난 존재임을 확증 받고자 종교 생활합니다. 누가복음 18장 10절부터 12절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예시가 나옵니다.
눅 18:10-12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종교인의 특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종교 행위를 통해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그 때 꼭 필요한 것이 비교 대상입니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다는 비교는 사실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종교성은 규칙을 잘 지킴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 된 본질이 가장 거부하는 단어는 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의를 쌓아서 거래하기 원하는 인간 본성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은 규칙을 만들어 냈습니다.
교회에서는 찬송가만 불러야 되고, 정장을 입어야 하고, 피아노와 오르간 외에 다른 악기는 삼가야 하고, 주일에 돈을 쓰면 안 되고, 안수집사는 주 3회 이상, 장로는 5회, 목사는 7회 새벽 기도에 참석해야 하고 체크하기 쉽게 자리도 정해 줍니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런 규칙들에 눌리면서 예수 믿으면 안식을 누린다는데 교회 다니기가 왜 이렇게 힘든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진리라면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하지만 다른 교회들은 지키지 않는 규칙이 왜 그렇게 많은지 고민했지만 그 당시에는 답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을 내세우니 지키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저의 깊은 고민과 갈망 끝에 답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주실 안식을 보여준 그림으로, 지금의 주일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안식을 자기 힘으로 얻어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주시는 안식을 바라보고 그날은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이 답을 찾는 수십 년간 고민하고 갈등했지만 그 기간이 은혜였습니다. 아마 이전 교회 가는 지하철에서부터 공황 장애가 찾아올 정도의 눌림이 없었다면 크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도 답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주일에 돈 쓰셔도 아무 말 못하다가 가끔 지나치다 싶으면 설교에서 야단치고 또 지나가기를 반복했을 것입니다. 실제 그런 목사님들 많이 계십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의 교인들은 기복주의와 율법주의를 둘 다 취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어느 종교에나 보편적으로 있습니다. 원래 불교는 수행을 통해 모든 욕망을 끊어내서 번뇌로부터 자유를 얻으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아무리 애써도 욕망을 끊어낼 수 없다는 것기 때문에 문제이지만 자신은 욕망을 벗어났으니 중생도 나를 따르라고 스스로를 깨달은 자인 부처라고 부른 것입니다.
지금 불자들이 수행으로 욕망을 벗어나나요? 아닙니다. 한국의 불자들의 99%는 소원 빌기 위해 절에 다니고 있습니다. 기도를 들어 달라고 삼천 배 절을 합니다. 원래 한국에 전파된 불교는 이것이 아니었는데 한국 사람들의 토속적 기복주의와 율법주의가 불교를 먹어 버린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고결한 자리로 나아가고자 하는 불교는 한국에 1%도 남지 않았습니다.
유교도 한국에 들어와서 조상에게 제사 드려 복 받는 율법과 기복으로 바뀌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특이한 종교성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만 했습니다. 사두개인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키며 서로 대척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융합을 잘 했는지 율법을 지켜 부귀영화를 누리는 종교로 변질시켰습니다. 심지어 그런 간증들도 많습니다.
한 대형 교회의 건축 특별 집회에서 한 장로님께서 이전 교회가 건축할 때 사업이 어려워져서 고민을 하는 중에 어차피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망할 상황이니 도박하듯 빚을 내서 큰 금액을 헌금했는데 그 후로 일이 잘 풀리셨다며 빚내어 헌금 많이 하라는 간증을 하셨습니다.
없는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헌금했다 망한 분은 간증을 안 시킵니다. 헌금해서 망했다는 사람을 누가 간증 자리에 세우겠습니까? 무서운 기복주의와 율법주의가 결합되어 기괴한 모습이 된 것입니다. 과거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이걸 안 해서 벌 주시나?’ ‘이걸 하면 복 주시나?’ 하는 종교성이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온전한 복음의 은혜를 알지 못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복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삼으셔서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은혜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예수 믿는 자만 보일 수 있는 참 사랑의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