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3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이 했던 긴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찔리게 하고 또한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54절을 보시면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언제 이를 가나요? 마음이 분노에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을 표출하지 못할 때 이를 갑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마음이 찔렸기 때문입니다. 51절부터 53절을 보시면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의 긴 설교 중 특히 이 부분이 그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짐승으로 여길 만큼 할례에 자부심을 느꼈고 우리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스데반은 이들을 무할례자, 십계명을 어기고 살인한 자, 율법을 어긴 자들이라 부름으로 유대인들이 생명같이 여기는 내용을 정면으로 공격한 것입니다.
이들이 분노한 이유는 스데반이 자신들의 외식을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할례자라고 자부하는데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했다고 하고, 살인한 적이 없다고 자부하는데 역사적으로 선지자들을 죽였다고 하고, 십계명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는데 너희가 예수도 죽였다고 조목조목 지적하니까 화가 치밀어 스데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이 스데반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십니다. 성령 충만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큰 능력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해져서 순교합니다. 원인 결과를 바꾸어 보면, 순교를 잘할 수 있도록 성령 충만케 된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성령 충만의 결과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성령 충만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1. 하나님의 임재로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vv.55-58
첫 번째로 성령 충만의 결과는 하나님의 임재로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5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55a]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
성령 충만은 노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내 생각과 감정과 뜻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를 일시적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성령 충만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 생각, 우리 뜻, 우리 감정 다 있고, 그것을 없애시면 더 이상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성령 충만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해졌더니 55절 하반절에 스데반에게 어떤 결과가 나타났나요?
[55b] …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하늘이 열리며 그곳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보는 것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성경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이것을 기록하고 있나요? 하나님이 특별하게 개입하셔서 성령 충만으로 어떤 일을 준비해 나가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6절입니다.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도 너무 놀라서 말이 튀어나온 것 같습니다. 이것을 왜 보여주셨다고 했나요? 순교하기 직전에 스데반에게 하나님이 지금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도와 평소에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늘 함께 계신다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평소에 느낄 수 있나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살아가기 때문에 함께 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깨닫고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약속하나요?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시면
요 14:23…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과 예수님이 그의 백성에게 와서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을 보신 적이 있나요? 못 봅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성령 충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심을 가르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때 하나님의 강렬한 임재로 하나님이 스데반과 함께하심을 가르쳐주시고자 했나요?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수백 명이 이를 갈며 적대감을 강렬하게 표하는 중입니다. 스데반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봤다고 말해버리자 이 신성 모독으로 유대인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을 스데반 자신이 촉발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스데반을 성령 충만하게 하신 것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도록 특별한 은혜로 그를 붙드신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나요? 57절과 58절입니다.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유대인들이 사람을 죽일 때 사용한 돌은 사람 머리만한 돌입니다. 작은 돌 몇 개 던져서는 사람이 죽지 않습니다. 이런 적대적인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큰 돌을 던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 충만으로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성령 충만은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특별한 상황을 우리의 본질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가르쳐 주셔서 우리가 참 백성답게 믿음으로 위기를 지나갈 수 있도록 특별히 개입해 오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성령 충만하다면 두려움 없이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변에 누가 아프거나 뉴스만 봐도 우리는 얼마나 요동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나요? 그런데 하나님이 성령 충만으로 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실 때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상황은 우리 자체의 힘으로는 절대 이겨낼 수 없는 강력한 시험과 위기라는 뜻입니다.
물론 스데반처럼 죽음 앞에서 하나님이 성령 충만으로 충만케 하시는 경우는 요즘은 없습니다. 어떤 분이 천국을 다녀왔다고 책을 쓰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가운데 두고 동심원 구조로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동심원에 제일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이 순교자들이고 그 다음으로 일생을 헌신한 슈바이처와 마더 테레사가 있다는 데까지 읽고는 책을 덮었습니다.
천국은 인간의 노력과 의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의 의로 가는 곳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우리를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순교도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과정을 은혜로 지나가게 하심으로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것을 모델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고난을 지나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부림치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나요? 두려움은 내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 기도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내가 신앙생활 잘하고 열심 냈더니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가 아니라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 과정을 지났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저는 두려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변화를 맞으면 너무 오래 고민하고 안 좋은 결과를 시뮬레이션 하느라 쉽게 결정하지 못합니다. 미국 유학을 떠날 때도 그랬습니다. 떠나는 게 하나님 뜻 같은데 돈도 없고, 첫째도 갓 태어났고, 몇 년 후에 떠나는 것이 나을지 폭풍우 가운데 돛단배처럼 오르락내리락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요동함이 너무 심해서 새벽 기도를 갔습니다. 예배 후 다들 돌아가시고 큰 예배당에 혼자 남아서 ‘하나님 무서워서 못 가겠어요. 맞는 것 같은데 발을 못 떼겠어요’라고 기도하는데 그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평소에도 함께 계신다고 성경에 써있지만 어떤 특별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생각하는 순간 행복해지면서 눈물이 나고 두려움이 요동하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일승아 먼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었니?’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떠나는 것이 맞구나 확신이 들면서 담대해졌습니다. 나는 준비가 안 되었다고 느끼더라도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까 그날 확실히 결정하고 수속을 마치고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을 한국에 들어올 때도 겪었습니다. 미국에서 8년 유학을 하고 논문이 통과되어서 귀국이 결정되었는데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자 두려움이 또 슬금슬금 올라왔습니다. 제 소원은 졸업 즈음에 청빙 받아 금의환향해서 새 교회 교인들이 공항에 마중 나오시는 것이었는데 막판에 돈을 1원까지 다 쓰고 한국에 올 비행기 표 값이 없어서 카드로 긁고 할 일도 정해지지 않은 채 빈털터리로 귀국하기가 너무 두려웠습니다.
미국에 남아야 하나 타협하고 싶던 어느 날 어느 교회에서 새벽 기도 설교를 해 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설교 후 교인들도 돌아가시고 또 빈 교회에서 ‘한국에 어떻게 가나요?’ 혼자 기도하고 있었는데 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음성은 아니고 당시 묵상하고 있던 창세기 15장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내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떠오르며, 내가 무서워서 못 움직이고 있지만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겠구나, 하나님이 내 큰 상급이 되시는구나, 확신을 얻어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물론 돌아온 뒤 2년은 미국의 8년을 압축한 것 같이 힘든 과정이었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이 준비하신 은혜의 과정이었습니다. 두려움이 크고 안정을 원하는 제 기질로는 절대 택하지 않았을 과정입니다. 그러나 저의 기질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수 있는 순간들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두려움이 깊이 몰려오는 순간들이 있으신가요? 여러분 힘으로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며 울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혼자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때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성령 충만의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저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제가 더 강렬하게 느끼고 그 약속으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세요’라고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걸음 걸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여러분에게 놀라운 은혜로 보여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성령 충만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2.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vv.59-60
두 번째로 성령 충만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예수님과 같이 반응할 수 있습니다. 59절 말씀입니다.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성령 충만했더니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대한 약속을 믿고 ‘하나님 내 영혼을 받아주세요’라고 고백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 이 담대함이 없다면 죽음 앞에서 얼마나 억울하고 분할까요? 스데반의 모습은 정확히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누가복음 23장 46절을 보시면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너무 큽니다. 자신의 죽음보다 남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도 못지않게 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믿고 눈에 보이는 것을 뛰어넘으며 살라고 하십니다. 평소에는 우리의 생각,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생각이 우리 눈을 가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허락하실 때 우리는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이야기하셨나요? 마태복음 10장 28절을 보시면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이 땅에서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우리는 육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시각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뛰어넘는 영적 시각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며 이것이 우리가 성령 충만을 자주 경험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죽음 앞에서 뿐 아니라 항상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경험할 때, 내 본질이 아닌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영혼을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보다 훨씬 우리에게 필요한 예수님의 모습이 60절에 나와 있습니다.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죽음의 순간에는 사람의 본질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용서하며 죽습니다. 이 모습도 예수님과 똑같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을 보시면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수십 년 전에 나한테 말 한마디 잘못한 사람 용서하기도 쉽지 않은데 지금 나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한다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이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은 우리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감정에 사로잡히고 상처를 받고 누군가 나를 무시하면 보복하고 싶어 합니다. 받은 대로가 아닌 몇 배로 되갚아주고 싶어 합니다. 치솟아 오르는 보복 욕구를 도저히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기도문에도 똑같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입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것은 도저히 쉬운 기도가 아닙니다.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죄를 사하여 달라는 조건부 용서입니다. 왜 조건이 있나요? 이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 백성만 할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문의 시작처럼,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아버지와 관계없는 사람들은 만들어낼 수 없는 용서가 그의 삶에 나타나야 합니다.
육적 자녀는 얼굴, 행동, 혹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친자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자녀임을 증명 받는 조건은 하나입니다. 나로서는 불가능한 용서가 내 안에서 나왔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절대 용서 못하고 있다면 아무리 기도하고 찬양하고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입니다.
이 근거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증명이 되면 그때부터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 기도가 얼마나 어려우면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고 나서 이것만 따로 떼어 또 설명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부터 15절을 보시면
마 6:14-15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여러분은 이런 용서의 삶을 살고 계신가요? 특별히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을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가까우면 자꾸 상처를 입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사실 용납의 결과입니다. 성경에서 어느 정도의 사랑을 요구하나요? 마태복음 5장 44절을 보시면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사랑은 감정적 사랑이 아닙니다. 아직도 미워합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원수입니다. 원수를 향한 사랑의 가장 첫 단계는 용납입니다. 왜 용납이 안 되나요? 우리 마음의 틀이 너무 좁아서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싫을 때 ‘마음에 안 든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사실 ‘내 마음은 너무 좁아서 아무도 받아들일 수 없어’와 같은 말입니다. 마음이 넓다면 이 사람 저 사람 다 받아들여도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좁으니까 내 생각의 틀에 조금만 벗어나는 사람이 다 불편하고 걸리는 것입니다. 용납하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용납하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 대해 죄보다는 기호의 문제, 말투의 문제, 태도의 문제를 내세우며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용서하기 싫으니 관계를 차단해버리고 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것은 방문을 닫아버리는 사춘기 어린아이 같은 모습입니다. 가까운 관계의 본질은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대화가 멈췄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도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돌로 찍는 사람을 용서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도 성령 충만할 때 가능하다고 그림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스데반처럼 죽음을 앞두고 있는 분이라면 ‘제 영혼을 받아주세요’ 기도하셔야 될 것입니다. 아직 살 날이 많으시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제 인생에서도 보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세요’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해서 힘든 것입니다. 말만 하면 싸우니까 더 이상 말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저주입니다. 지금 용납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곁이 있어서 불편하시다면 다음과 같이 기도하셔야 합니다. ‘용납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이 좁은 마음을 부수시고 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용납하고 용서하여 선을 베풀 수 있게 해 주세요’ 기도하셔야 합니다. 다툴 수 있고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끊임없이 용서하며 용납해야 합니다. 어디까지 가셔야 하나요? 누구와도 같이 있는 것이 불편하면 안 됩니다.
돌로 찍는 자를 사랑하는 수준은 아니어도 같이 살라고 붙여주신 가족, 친척, 직장 동료들을 용납하고 용서하는 예수의 모습을 가지라고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좁은 마음을 넓히시고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한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인한 사랑의 은혜를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