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3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실 뿐 아니라 개인의 인생에도 개입하시지만 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구원 과정에서 나타나는 외부 현상들은 알 수 있지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랫동안 일해오신 것을 인간은 알기 어렵습니다.
성경은 구원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신비하게 개입하시는지를 가끔 보여줍니다. 본문의 에티오피아 내시가 구원받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개입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개입하시나요?
1.영적인 방법으로 개입하십니다. vv.26-29
첫 번째로 영적인 방법으로 개입하십니다. 26절 말씀입니다.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하나님은 빌립을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보내시는데 특별히 천사를 보내십니다. 천사가 나타난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지금은 천사가 나타나서 지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빌립이 있던 사마리아에 부흥이 일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부흥이 임할 때에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고 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시기 위해 환란을 허용하셨습니다. 지금 사마리아에도 동일하게 표적이 나타나고 은혜를 임하니 빌립이 그곳을 떠날 이유가 없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를 위해 꼭 사람이 필요하자 하나님이 특별히 천사를 보내셔서 빌립을 보내시려고 한 것입니다. 빌립은 성령의 음성에 민감한 사람이었는데도 꼭 천사가 필요했나요? 성령의 음성은 내적인 감동에 속한 영역입니다. 우리 마음의 틀을 넘어서는 객관적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음성은 사람의 마음 틀에 따라 달라집니다.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대부분 자기 욕망의 반영입니다. 두려움 가득한 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들은 것 같아도 대부분 자기 두려움을 증폭한 소리입니다. 빌립도 성령 충만했지만 상황을 완전히 뛰어넘는,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내적 음성만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사’는 사마리아에서 70km나 떨어진 곳이고 이스라엘 남쪽은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 지대입니다. 갑자기 이곳까지 간다는 것은 빌립의 내적 음성만으로 순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히 천사까지 동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구원을 위해 천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는 알 수 없는 신비한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빌립이 도착한 곳에 누가 있었나요? 에티오피아 내시에 대해 27절과 28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예배했다, 성경 읽었다’라는 단순한 관찰 이면에 이 내시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은 약 4,500km로, 낙타가 하루 평균 40km 이동한다 치면 4-5개월 이동해서 예배드리고 4-5개월 돌아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여왕의 국고를 맡은 관리인이 나라 일을 제쳐두고 예배를 위해 1년을 시간을 낸 것입니다.
성경을 읽었다는 정보도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고대에 성경은 양 가죽 두루마리였고 책이 길수록 가격이 높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이사야서 두루마리는 집 한 채에 달하는 비싼 가격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읽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돈과 시간을 씁니다. 지출의 90%가 식비라면 일차적인 수준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인테리어, 여행, 차 등이라면 그 사람의 가치가 그 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 내시는 일 년을 들여 예배 자리에 나오고, 집 한 채의 돈을 들여 이사야서를 읽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로 시작해 말씀으로 열매 맺는 한 영혼의 성장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예배로 나올 때 하나님은 말씀에 대한 사랑을 넣어 주십니다.
저도 처음 은혜를 받고 말씀에 대한 열망이 커졌습니다. 옛날에는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쉽지 않아서 라디오나 교회를 찾아가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을 돌아다니며 몇 년 동안 모은 천여 개의 설교 테이프를 늘어질 때까지 들었습니다.
지금은 유튜브로 쉽게 말씀을 접할 수 있지만 동시에 문제도 많습니다. 비진리와 이단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열심히 방송을 하면서 진리를 분별하지 못 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TV도 많아졌지만 좋은 시간대는 모두 한 달에 몇 천 만원 씩 돈을 내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좋은 설교를 선별하지 않고 자본주의로 전락해 결국 홍수 때에 물은 많으나 마실 물이 없는 상황처럼 되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가 겪었던 돈과 시간적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쉽게 예배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열망이 있나요?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시작점에서 역사하시지만 또한 삶을 통해 계속 은혜를 베푸십니다. 여기서도 에티오피아 내시가 말씀으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빌립을 동원하신 것입니다. 수레에 다가가 내시가 이사야 말씀을 읽는 것을 듣는 순간 29절에서 성령이 뭐라고 하시나요?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성령의 음성은 주관적일 수도 있고 내적 감동이라고도 하기에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성령의 음성인지 내 음성인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정확한 방법이 있습니다. 내 욕심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말씀하시면 대부분 성령의 음성입니다.
우리 욕심은 돈이 있으면 움켜쥐려 합니다. 제가 들은 성령의 음성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남에게 돈을 주라는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본성을 깨뜨리시기 위해 저 개인에게도 많이 일하셨고 그 결과 우리 교회도 절기마다 적소에 후원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구원 받고 성장하기 위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계속 일하십니다. 이 내시는 천사가 빌립을 보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부흥의 중심에 있던 빌립이 자기를 위해 먼 길을 왔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메시아에 대한 구절을 읽고 있는 순간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를 만나게 하신 것을 알았을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물론 예수를 믿고 성장하는 과정에도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우리 믿음이 열리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신의 인생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찬양과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개입하시나요?
2. 말씀을 깨달아 예수님을 믿도록 개입하십니다. vv.30-40
두 번째로 하나님은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개입하시나요? 말씀을 깨달아 예수님을 믿도록 개입하십니다. 30절 말씀입니다.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놀라운 타이밍입니다. 이사야의 많은 구절 중 마침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지식으로는 깨닫지 못하는 부분을 읽고 있는 순간에 빌립이 도달해서 이해했냐고 질문합니다. 31절에 내시의 대답입니다.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낯선 사람이지만 말씀의 매개인 그를 초대해 배우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꼭 필요한 태도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에게는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갈망이 늘 있습니다. 물론 시행착오도 겪고 실수도 하지만 하나님은 필요적절하게 그의 갈망을 채워주십니다.
저도 하나님이 특별하게 개입해 오시지 않았으면 지금 제가 아는 복음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도 표면적인 수준에서만 성경을 알고 자기가 아는 수준에서 가르칩니다. 질문하지 않고 아는 수준에서 가르치다보니 성경을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수준에서 가르칩니다.
어느 날 큰 교회 목사님 설교를 우연히 들었는데 야곱이 험악한 인생을 보낸 것은 거짓말했기 때문이니 거짓말하지 말라는 설교였습니다. 정직하면 풍요롭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도덕책이 아닙니다. 야곱은 남을 속이고 빼앗고 끊임없이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우리 안의 깨져야 하는 옛 자아의 대표적 모형입니다. 거짓말을 하던 하지 않던 우리 안에 있는 자아가 깨어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만 우리는 이스라엘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저도 그것밖에 알지 못할 때는 그렇게 설교했고 학생들에게 열심을 요구했습니다. 지각하지 말고, 큐티 빼먹지 말고,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는지 체크했습니다. 그런 수준에 살던 저를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로 만나주셨습니다.
유학을 가서 성경을 연구하고 싶은 열망이 강렬했습니다. 그런데 첫 학기의 적응과 언어의 부담과 과제로 쉽지가 않아서 오전 12시까지는 성경을 보고 오후에는 학교 공부를 하기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 내내 성경을 봐도 벽에 부딪혔습니다. 모르는 것은 여전히 모르고, 이전에 궁금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궁금해졌는데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해 써 있다고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유학을 마쳐도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길이 없습니다.’ 그때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서 박사를 그만두고 소명을 받아 신학을 시작하신 전도사님이 오셨습니다.
그 분이 유명한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겠냐고 제안하셨는데 그 분이 바로 티모시 켈러였습니다. 설교를 들으며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구나, 구속사적으로 모든 책이 연결되는구나, 눈이 열렸습니다. 설교 제목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는 복음’ ‘이삭으로 말미암는 복음’이었습니다. 즉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이야기라는 큰 틀을 소개받았던 셈입니다.
그런데 제 안에 또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연결을 어떻게 찾아내는 걸까? 뉴욕에 가서 그 교회를 다녀봐야 하나 생각도 했습니다. 설교를 들으며 궁금증을 늘 갖고 있었는데 마침 제가 졸업하기 한 달 전에 저희 학교로 티모시 켈러가 세미나를 하러 오셨습니다. 1년 동안 그 분을 만나고 싶어 한 저를 위해 하나님이 직접 초대하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3박 4일 동안 전율했습니다. 자료 찾는 법, 조합하는 법, 성경 연구와 관련된 모든 것을 흡수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더 이상 그분 설교를 듣지는 않았지만 제가 한 단계 올라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보게 되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후로도 제가 진행할 수 없이 막힐 때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책을 만나게 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티모시 켈러가 지금은 한국에서도 굉장히 유명해져서 그분을 따라하는 설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수박 겉핥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남의 설교를 가져다 표면만 따라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깨달은 것이 첨부되지 않으니 남의 옷을 입은 모양인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열망이 있으면 하나님이 개입해 오십니다. 시야를 열어주시고 성장하게 해 주시고 그래서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며 보는 눈을 바꾸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게 해 주십니다. 그때 내시가 읽었던 구절이 이사야 53장 말씀입니다. 32절과 33절을 보시면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실지 예언한 구절입니다. 이사야 66장 중에서도 메시아를 가장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는 장입니다. 이해할 수 없던 참이라 34절에 질문합니다.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하나님은 한 사람의 궁금증을 위해 70km 떨어진 곳에 있던 빌립을 불러다가 답을 주십니다. 빌립의 답이 무엇인가요? 35절입니다.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흩어졌던 많은 사람 중 하나님이 특별히 빌립을 보내신 이유는 빌립은 모든 말하는 것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5절 사마리아 성에서도 무엇을 전했나요?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인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입니다. 예수만이 능력이고 예수만이 구원입니다. 성경 이외에 인간의 열심과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행위로 인한 구원을 촉구하는 꼴입니다.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구원을 성취하려고 하면 지치고 결국 좌절하게 됩니다.
우리는 약하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얻는 구원의 은혜로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케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수 이야기를 들었더니 내시는 세례까지 받고자 합니다. 36절입니다.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세례는 자기 인생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헌신의 반응입니다. 그의 열망하던 마음에 예수가 심기자 그를 위해 내 인생을 바치겠다고 바로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에는 37절이 없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사본학이 발전하면서 원래는 없었을 구절을 추후에 추가한 것 같은 구절은 빼버린 작업의 결과입니다. 빠진 구절은 이것입니다.
[37] [빌립이 가로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문맥상 괜찮은 것 같은데 사본학이 아니라고 하니까 없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어 38절에서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내시가 세례를 받고 예수께 인생을 헌신합니다. 그런데 39절에서 또 신비한 일이 벌어집니다.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이 사라져버립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 이런 일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생각해보면 두 가지 목적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내시에게 이 신비한 역사를 이룬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확신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40절입니다.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빌립이 내시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빌립은 목적을 이룬 뒤 복음 전파를 위해 떠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필요 적절히 개입하시고 인도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또한 모두가 같은 방법이 아닌 사람마다 상황마다 맞춤형으로 일하십니다.
저도 친구의 아버지가 구원받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알게 된 경우가 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생 때까지 한 교회에 다닌 친구였는데 가족은 안 다니고 혼자 열심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교회 간 것을 들키면 혼나고 매를 맞아서 늘 거짓말을 하고 교회에 온 것이었습니다.
안 됐다고 생각했지만 잊어버렸다가 대학생 때 은혜를 받은 후 수련회에서 또래들을 기도해 주고 싶었습니다. 10명 정도가 모였는데 제 안에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넘쳤습니다. 특별히 그 친구 손을 잡고 기도하는데 매를 맞아가며 교회 다니던 아이의 그 고통, 아빠의 구원을 위해 흘렸던 눈물이 절절이 느껴지면서 서로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 후에 그 친구는 그때 마음이 힘들었는데 다시 힘을 내보겠다고 다짐하고 저는 얼마 후 신학대학원에 가기 위해 교회를 옮겼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병원에 계신데 한번 기도해 달라기에 가보니 뇌졸중으로 움직이지 못하셨고 친구는 1년째 직장도 그만두고 간호하는 중이었습니다. 아버지 예수 믿게 해달라고 평생 기도했는데 처음에 쓰러졌을 때 절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원래 예수 이름도 못 꺼냈는데 이제는 아버지가 움직이지도 못하시니까 예수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종일 설교와 찬양과 성경을 틀어서 1년째 누구보다 많은 말씀을 듣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심박수가 떨어지고 임종을 준비하라고 하자 또 낙심했습니다. ‘나 예수 믿는다’ 확신의 말이 듣고 싶은데 그냥 가시면 어떡하나 걱정되어서 복도에서 울고 있었는데 어떤 할머니가 왜 우냐고 말을 거셔서 상황을 말했더니 본인 남편도 중풍으로 쓰러져서 예수 믿게 되어서 나았다고, 하나님은 네 기도를 들으시니 힘내라고 해서 힘을 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할머니를 찾으려고 했는데 아무도 모른다고 해서 천사가 아니었나 생각했다고 합니다.
얼마 후에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친구가 낙심했을까봐 걱정했는데 밝은 얼굴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아버지 예수 믿어요.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요. 예수 믿으시면 얘기 해 주세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눈을 두 번 끔벅끔벅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인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아무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십 수 년을 울며 아버지를 위해 기도한 과정을 볼 때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가 여기서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를 자세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이렇게 많이 개입하셨구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구나. 아마 우리는 천국에서 그 일들을 깨달으며 하나님께 쉼 없이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놀라운 분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낙심하지 말고 구원을 위해 애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