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0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예수님을 진짜 만난 사람은 반드시 변화합니다. 바울이 된 사울만큼의 극적 변화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삶에서 일정 부분 변화를 경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변화가 종교적이 되거나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종교적 열심은 기독교 외의 종교에서 오히려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교인들이 드리는 지극한 정성을 우리가 따라할 수 있을까요? 이슬람 교도들이 하루에 다섯 번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열심을 따라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진짜 만났다면 종교적 열심 정도가 아닌 본문의 사울과 같은 내적 변화를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떤 변화가 나타나나요?
1. 자신의 깊은 어두움을 직면합니다. vv.3-9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떤 변화가 나타나나요? 첫 번째로 자신의 깊은 어두움을 직면합니다. 1절과 2절 말씀입니다.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은 자기가 믿는 바에 있어서 누구보다 열심인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자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다메섹에게도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170km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그들을 잡으러 간 것입니다. 엄청난 종교적 열심입니다. 다메섹에게 가던 길에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3절입니다.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하나님의 임재가 빛으로 강력하게 나타나자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4절 상반절입니다.
[4a]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와 위엄 앞에 엎드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말씀 하십니다. 4절 하반절입니다.
[4b] …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했을 뿐인데 예수님은 ‘네가 나를 박해했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성도와 함께하심을 보여줍니다. 물론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성령으로 성도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박해를 막아주시지 않았는데 과연 내 편이신가 의심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모든 박해를 같이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고난을 지나가며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거기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어려움, 심지어 박해도 목적이 있기에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눈을 떠야 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아이가 원하는 것만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초콜릿과 사탕을 좋아한다고 해서 식사 시간마다 그것을 줄 수도 없고 주사를 싫어한다고 병원을 안 데려갈 수도 없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힘들어 한다고 해서 어려움을 하나도 겪지 않게 된다면 아마 우리는 괴물이 될 것입니다.
사울은 놀라서 5절에 질문합니다.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님은 마치 우리가 되신 것처럼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시고 박해를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사울에게 구체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6절입니다.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사울을 향한 특별한 계획이 있으셨기에 사울에게 개입하셨고 또 사울을 빛으로 인도할 사람도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에 7절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나요?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지만 사울만 예수님과 대화했고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진 뒤에 사울이 어떻게 되었나요? 8절과 9절입니다.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왜 하나님은 사울이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게 하셨나요? 사울의 본질 안에 있는 자기 어둠을 직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갈 때 마음에 살기가 가득했었습니다. 자기가 믿고 있는 바가 너무 확고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심각한 악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죽이며 하나님의 뜻과 가장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도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던 태도가 얼마나 악한가 그 어둠을 직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방어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자기 내면의 죄악을 스스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결혼을 명하신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주 일회 짧게 모이는 것으로는 죄악이 드러나는 정도가 아주 약하지만 같이 사는 사람은 상대의 죄를 모를 수가 없습니다.
배우자의 증언을 들어보면 자신은 보지 못하던 내면이 노출됩니다. 이는 빛이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집 안에 먼지가 가득합니다. 원래 있었지만 어둠에서는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빛으로 나타나셔서 사울의 어두움을 직면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깊은 어둠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의 어둠을 직면하지 못한 사람은 종교적 열심을 낼 수 있지만 언젠가는 어두움이 그를 지배하게 됩니다. 어두움이 종교성을 가지게 되면 신적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사울처럼 예수를 박해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면서도 그 정당성이 너무 강해 그들이 죽어 마땅하다고 왜곡하는 태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짜 만난 자는 자기 어둠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참 빛 앞에서 자기 내면의 어둠을 직면한 자만이 온전한 회개와 변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삶입니다.
제 주변에도 영향력 있는 목사님들이 자신의 어둠을 보지 못해 붕괴된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20여 년 전 코스타 강사로 섰을 때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얼마나 복음을 명쾌하게 선포하시는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당시 복음을 배워가는 과정이라 개념들이 모호한 상태였는데 이 분은 날이 선 검과 같은 말씀으로 심장을 후벼 파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요즘 유명한 분이라며 소개를 받아 또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독일 논문을 사비로 번역해서 연구하기도 하고, 미술, 발레, 정치, 역사 등에 박학다식하고, 또 얼마나 인맥이 넓은지 웬만한 정치인, 지식인들과의 친분도 있어서 예화도 아주 풍부했습니다. 무엇보다 설교는 여전히 칼같이 날카로워서 4~50분 설교를 듣는 동안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습니다.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가 왜 무섭고 아픈가 생각해 보니 설교 안에 비난, 분노, 정죄가 가득했습니다.
기쁜 소식인 복음이 꼭 이렇게 날카롭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고민이 되었는데 비난의 강도가 점점 세지면서 나중에는 아예 다른 목회자들을 [양복 입은 무당들]이라고 칭하는 제목의 설교까지 나왔습니다. 물론 나쁜 목사도 있겠지만 또 훌륭하고 헌신적이신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자신 외의 모든 목사들이 무당이라고 설교를 하자 반감도 들었습니다.
이런 설교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목사님께 전화와 메일로 자신의 교회 상황을 알리면 또 그것을 예화로 쓰면서 가짜 목사들 멱살을 잡고 강단에서 끌어내리라고 선동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맞았지만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악한 인간이라고 설교하며 분노와 미움을 걸러내지 않는 설교를 보며 이 분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를 하던 분이었는데 인터넷 애독자가 많아지면서 한국의 성도들이 한국에서 개척하면 교회가 부흥할 것이라고 초청을 했는지 미국 교회를 정리하고 한국에 왔습니다. 그 몇 달 후에 저도 마침 한국을 오게 되어 그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5~600명 정도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저는 그 날 결국 설교를 끝까지 듣지 못하고 중간에 나와 버렸습니다. 그간 조금씩 세지던 정죄와 미움과 공격이 얼마나 더 집약되고 강한지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회중들은 그 미움이 느껴지지 않는지, 10년 전에 만났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저렇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 후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자살을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심했다고 합니다. 설교 안에 어두움이 가득했던 이유가 결국 너무 화가 나는데 그것을 표출하고 해결 받지 못해서 하면 우울증이 된 것입니다. 진리를 알게 되고 나니 진리가 아닌 것을 때려 부수고 싶었는데 그 대상이 모든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매주 화가 나고 해결은 안 되고 진리 앞에서 자신을 옳고 남들이 잘못되어 분노하기를 십년 이상 반복하다 스스로 자기를 파괴한 것입니다.
미국과 한국의 그 교회에는 여전히 수백 명씩 모여서 목사님이 생전에 하신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굉장히 훌륭한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깊이 있게 연구하고 담대하게 전하는 설교자를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이 그를 삼켜버린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늘사랑교회에 오셔서 복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여러분이 예수님을 진짜 만났다면 남이 아닌 자기 어둠을 보아야 합니다. 복음은 무엇을 얘기해 주나요? 우리는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해줍니다. 우리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복음을 머리로만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비판과 판단이 커집니다. ‘저 사람은 복음을 모르네, 저 사람은 가짜네’에서 머물고 있다면 이것은 복음의 반작용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으로 진짜 예수를 만났다면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자신의 어두움을 보셔야 합니다.
즉 여러분이 진짜 예수를 만난 증거는 자신의 어둠을 직면하여 남을 향해 비난과 판단의 칼날을 들이대던 것을 거두고 ‘제가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의 문제는 잘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항상 남을 향한 비난과 판단만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를 진짜 만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을 듣고 율법과 기복이 무엇인지 판단은 되었지만 그 잣대로 남을 칼로 재단하고 있다면 아직도 눈뜨지 못한 자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를 만나 자신의 어둠에 눈을 뜨셨나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 어두움을 지나가게 하시기 위해 때로는 고난을 주시고 때로는 갈등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결혼도 어쩌면 그런 과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저는 결혼하기 전에 나처럼 준비된 남편을 만나다니 나와 결혼할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해 보니 나라는 사람은 뼛속까지 이기적이고 악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셔서 내 영혼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죄악된지를 가까운 사람을 통해 알게 하시며 깊은 복음의 은혜에 의존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물론 사울처럼 천국의 빛으로 단번에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상 딱 한 번 있던 일이고 우리는 일상을 통해 계속 어둠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어둠을 지나며 빛을 열망하도록 하셔서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기보다 어둠 속에 있는 자가 마땅히 반응해야 할 긍휼과 반응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어둠을 직면하여 예수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떤 변화가 나타나나요?
2. 영적인 눈을 뜹니다. vv.10-19
두 번째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떤 변화가 나타나나요? 영적인 눈을 뜹니다. 10절입니다.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아나니아는 성경의 다른 곳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조연인데 주님의 음성을 듣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성령의 역사도 강력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신비한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준비시키셔서 사울을 돕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던 사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13절에 질문합니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숨어 있어도 무서운 판국에 오히려 사람을 찾아가라니요? 여쭸더니 주님의 답이 15절과 16절에 나옵니다.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울이 바울이 되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당시 사람들 아니 사울 자신도 사울이 이런 삶을 살리라고는 추측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조금 일찍 하나님을 만나 20대부터 변화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조금 늦게 개입하실 수 있습니다. 남을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 되고 낙담해서도 안 되는 이유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어둠을 경험하게 하시고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복음의 은혜에 반응하는 자라면 변하지 않는 나와 주변 사람을 보고 ‘하나님 이래서 저는 예수가 필요합니다. 저는 아직도 화내고 미워하고 실수하지만 예수만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나를 바꾸고자 하면 실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복음은 그 곳에서 더 나아가 ‘너는 안 되는 게 당연해. 그러나 내가 너를 돕고 회복시킬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는 힘입니다. 종교와 복음은 유사해 보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종교는 더 기도하고 더 열심내고 노력하라고 책임을 떠넘깁니다. 그러나 죄는 영혼의 근원에서 튀어나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며 영원히 공허한 욕망에서 시작되어 주변 사람을 도구화하고 하나님마저도 우상처럼 여기는 본질인데 우리는 도저히 노력으로 변화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나 남을 향해 낙심하시면 안 되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아나니아도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17절입니다.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우리에게도 이 순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전화나 전보처럼 명확하지 않고 결국 내적 감동으로 말씀하시는데 하나님 뜻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자기의 두려움과 욕망 때문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이기고 말씀에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18절 상반절입니다.
[18a]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
하나님은 일부러 그림적인 요소를 보여주십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졌다고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야 하나요? 그렇지만 사울의 영적 부분을 가로막는 육적 장벽이 있었음을 그림으로 알기 쉽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이런 장막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눈이 열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그 주권으로 열어주실 때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이 말하는 참 진리를 깨달으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영적으로 개입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설교 한 번, 기도 한 번, 말씀묵상 한 번으로 변화되는 것 아닙니다. 변화는 전 인생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합니다. 사울이 눈이 열렸더니 일어나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 인생을 헌신합니다.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을 기쁘게 걸어가는 변화는 은혜로 눈이 열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인생에서만 나타나는 일입니다.
이번 주에도 제 눈이 열려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깨닫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번 주에 목사님들이 계시록 포럼을 하자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저는 무천년 입장인데 이것은 교회 시대 내내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우리가 예수님처럼 변화되어서 왕노릇 하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마지막 심판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단이나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는 바이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나 후쿠마 같은 신학자들이 주장하던 바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천년설 입장 10가지 정도를 준비했습니다. 천년 왕국은 지금이며, 천년은 장구한 교회 시대라는 상징이며, 왕노릇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람들을 섬기고 희생하는 왕이라는 것을 성경 구절로 뒷받침하여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전천년설 발표를 맡은 목사님 표정이 안 좋아지시더니 본인이 35년 동안 계시록만 연구하셨다는 말로 발표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계시록을 깨닫게 해 주셨다면서 모든 것은 문자 그대로 보아야 하기에 천 년은 이 땅에서의 천 년이고, 666을 이마에 새기고, 10고을 5고을을 다스리게 된다고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듣던 목사님들이 근거를 대 달라고 해도 이 땅에서도 왕이 아닌데 나중에도 왕이 안 된다면 예수 믿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역정을 내시면서 나중에는 한 발 더 나아가 기독교 역사상 무천년을 주장하는 마귀 새끼들 때문에 교회가 다 망가져버렸다며, 나이도 어린 것이 뭘 알겠냐고 저를 인신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분위기가 안 좋아지니까 다른 분들이 농담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했지만 끝까지 역정을 내셔서 황급히 마무리를 했습니다. 원래 포럼을 여러 차례 계획했었지만 그 목사님이 계속 참석하겠다고 하시자 다른 목사님들이 다 불참을 선언하며 사실상 파투가 났습니다. 당시에는 약간 황당했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의 주장은 35년 전에 성경을 해석하던 방식으로 지금은 신천지가 쓰는 방식입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세상의 땅을 14만 4천 개로 나눠서 공로가 많은 순서대로 고을을 나눠준다고 가르쳐서 지금 신천지 교인들은 자기가 다스릴 땅을 협상하며 나누고 있습니다. 신천지에 왜 젊은 사람들이 많은가요? 젊은이들이 지금은 너무 힘이 없고 비참하게 사니까 천년 왕국이 오면 다른 사람들이 가진 모든 좋은 것을 뺏어서 왕처럼 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왕 노릇은 남을 밟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희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더니 마귀 새끼 취급을 받았다니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또 시간이 지나자 그 분이 불쌍해졌습니다. 그 분은 35년 동안 얼마나 애를 많이 쓰셨을까요? 그런데 눈이 열리지 못한 것입니다. 단순히 요한계시록만 문제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 대해 자기 욕망을 투영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모습과 오버랩 되었습니다. 저도 20대 후반까지 그렇게 요한계시록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변했나요? 제가 열심히 살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어두운 눈을 여시고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눈을 뜨셨나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욕망을 이루어주는 우상이 아닙니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라도 여러분을 왕 되게 만들고 원하는 인생을 살게 해주는 가짜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이 다 부서져 마치 예수님처럼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릴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눈이 열리지 않은 자들은 여전히 예수님 하나님을 이런 우상처럼 바라봅니다. 내가 열심히 살았는데 왜 하나님은 부요와 축복을 주시지 않지? 이렇게 생각하니까 신앙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 눈이 열리셨다면 자기 욕망을 내려놓고 섬기고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맛보게 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저도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불만과 원통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저도 제가 집에서 밥하고 청소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완벽한 아내가 모든 것을 다하고 시간 되면 어깨도 주무르고 왕처럼 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만 편하고 나만 즐겁고 행복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의 영혼을 꺾으셔서 제가 섬기며 살고 있는데 이것이 저주인가요? 아닙니다. 저는 자발적으로 종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욕망을 꺾어내고 자발적으로 종이 안 되면 괴롭고 옆에 있는 사람이 미울 것입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복종하면 행복해집니다. 여러분은 눈이 열린 인생을 살고 계신가요? 바울처럼 눈이 열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변화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