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9] …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어떻게 바울이 되어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하면 종교성만 깊어지고 자기 의만 강해집니다. 사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삶에 어떤 변화와 모습이 나타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삶은 어떠한가요?
1.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전합니다. vv.19b-22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삶은 어떠한가요? 첫 번째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전합니다. 19절 하반절부터 20절 말씀입니다.
[19b] …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놀라운 일입니다. 다메섹에 온 이유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고자 온 것인데,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가 변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고대에는 혈통이 매우 중요해서 왕의 혈통을 가진 사람만 왕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왕의 아들은 앞으로 왕이 될 특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니,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21절에서 이것을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나요?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만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반응에도 관계없이 22절에서 사울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세상에 보내기로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메시아라고까지 증언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라고 하루에 세 번씩 ‘쉐마’를 암송했습니다. 신명기 6장 4절부터 5절을 보시면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아이부터 어른까지 여호와는 ‘유일한’ 하나님 한 분이심을 매일 세 번씩 기도하며 세뇌 받다시피 암송했는데 예수님도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듣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이 땅에 사시며 만질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볼 수도 있는 사람이었던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은 연약한 모습으로 이 땅을 사시다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다 무너뜨리고, 로마를 압제하고,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는 강력한 하나님을 기대했는데, 예수님은 아버지도 모르는 채 마구간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라난 비참한 청년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화려하고 성공적이고 큰 꿈을 도저히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본질 안에 있는 태도는 똑같기 때문에 아마 예수님이 지금 오셔도 우리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로마서 9장 33절입니다.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문이 아닌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가 되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길이 막혀버리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 이단의 숫자가 50만에서 150만까지로 추정됩니다. 매 주일마다 열심히 모이는 숫자만 4-50만입니다.
그런데 이단의 특징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걸려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지 않고 많은 천사 중에 으뜸가는 천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들은 열심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일주일에 봉사시간을 채워서 충성 점수를 쌓아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단들이 바로 예수에서 걸려 넘어지며 예수를 대체할 교주를 믿으라고 얘기합니다.
‘기독교’는 Christ를 한자로 바꾼 것으로 ‘그리스도교’이며 따라서 우리는 ‘예수 믿는 자들’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노력, 종교적 의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으며 예수로 모든 죄가 해결되었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다는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복음을 받았다고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제시된 신비로운 사실을 다 이해할 수 있나요? 사실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 중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단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를 온전히 믿거나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세 개인데 하나이며, 다른데 같고, 같은데 다른 현상이 존재하나요? 이것을 설명하고자 사람들은 여러 비유를 생각해 냈습니다. 물, 얼음, 수증기 혹은 햄버거, 콜라, 감자튀김 세트, 이런 설명들은 삼위일체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을 야기합니다.
이런 삼위일체가 어느 순간 믿어진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영을 여시고 주신 믿음의 선물입니다. 목사인 저도 오랫동안 연구하고 많은 책을 봤지만 삼위일체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고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온전한 하나님이며 온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도 합니다. 아리우스파, 영지주의, 네스토리우스파, 마르키온파, 에비온파 등 역사상 많은 이단이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이지만 사람이 아니라거나, 예수님은 사람인데 하나님처럼 행세하셨다는 한 가지만을 주장했습니다.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결국 이단으로 판명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모든 결정에 개입하셔서 진리와 비진리를 잘 가를 수 있도록 역사해 오셨기에 우리는 삼위일체를 믿지 않거나 예수님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단체들이 이단임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예수님이 연약한 하나님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지금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에 있어 가장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성화시켜 나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의 인생에 개입해 오셔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드신다’는 성화의 교리가 있습니다. 교리란 변할 수 없는 확고한 진리이자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을 예수님처럼 온전해지거나 능력이 많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저렇게 약한 자는 신이 아닐거야’라고 생각했듯이, 우리도 구원자를 ‘강력해서 나를 성공하게 해줄 수 있는 자’라고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은 강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나요? 예수님이 병자를 치료하신 것은 예수 믿는 자들은 병을 고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일을 행하실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님과 귀머거리를 고치신 것은 영적으로 눈 먼 자들, 영적 귀머거리들을 고치셔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듣게 하시겠다는 그림입니다.
예수님은 또 누구를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중풍병은 생각은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 병으로 이것은 마치 죄의 현상 같습니다. 화내고 폭행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사랑해야 한다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죄는 우리 영혼에서부터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살 수 없는 중풍병자같이 정죄하고 비난하고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나병 환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몸의 모든 감각 세포가 마비되어 감각이 없어집니다. 세균이 감염되어 썩기 시작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말초부터 잘라져 나갑니다. 지금은 약이 좋아져서 감염을 멈출 수 있지만 예전에 문둥병 환자들은 팔다리가 차례로 잘라져 나가 나중에는 몸통으로 굴러다녔다고 합니다. 죄 역시 사람의 감각을 마비시켜서 무엇이 나쁜지 좋은지 판단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죽음을 가져오고 또 전염시킵니다.
이 모든 것보다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의 모습은 십자가에까지 낮아지셔서 자기를 죽여 우리를 사랑하신 그 희생과 섬김입니다. 우리 본성은 남을 짓밟아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낮아져서 십자가에 죽는 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진짜 믿게 되면 우리는 점점 어떤 존재가 되는지가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쓰여 있습니다.
딤전 1:15 …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서는 바울이 죽기 얼마 전에 쓴 책입니다. 평생 헌신하고 전도하고 예수를 위해 산 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신앙이 성장할수록 우리는 ‘죄에 묶여 죽음으로 내몰리는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는 죄 인식이 커져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만이 나를 온전케 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은혜 받은 자의 태도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가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들의 완벽하지 않은 모습은 너무 잘 보이지만 자기 방어 기제가 어찌나 발달되었는지 자신의 죄는 신기하리만큼 잘 보지 못합니다. 사실 여러분의 진짜 모습은 여러분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이 아닌 가장 가까이 사는 사람의 진단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면을 쓴 겉모습의 드러난 부분으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의 본질을 얘기하십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고 선과 악을 판단하고 싶은 강렬한 죄의 본성, 이 죄의 근원을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의 은혜에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지할수록 우리는 예수를 통해 주어지는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치료를 받지 못하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어떤 의사를 만나서 생명이 연장되었다면 그 분을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고 늘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살짝 콧물이 나서 갈까 말까 하다 들렀다면 그 의사가 기억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죄는 보지 못하고 주변 사람만 손가락질하고 있다면 ‘성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가를 하나님께 고백하여 은혜를 더 깊이 의존할수록 은혜가 더 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나 자신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점점 나타나게 됩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안 들면 화내고 미워하고 지적하고 싸웠는데 점점 내 잘못이라고 고백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내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던 사랑과 용서의 행위를 허락하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르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힘 있는 자로 만들어 주시는 신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나아가 주 은혜만 의존하게 하시고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 땅을 살 수 있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삶은 어떠한가요?
2. 성장을 위해 돕는 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vv.23-31
두 번째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삶은 어떠한가요? 성장을 위해 돕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23절과 24절입니다.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렇게 기독교인을 박해하다 어느 날 돌변해서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니 유대인들 입장에서 사울은 죽여 마땅한 배신자입니다. 그런데 위기마다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25절을 보시면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납니다. 수없는 죽음의 순간을 지날 때마다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도구로 바울을 구원하셨습니다. 성도의 인생에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교회로 모이게 하셨나요? 인간은 혼자 성장하고 온전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혹시라도 ‘엄마 아빠가 해준 게 뭐야? 난 혼자 컸어’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서운할까요? 그러나 우리도 가끔 하나님께 이런 투정을 부리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저 살다보니 예수를 잘 믿게 되었나요? 하나님이 주야로 살피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위험을 피하게 하시고 신앙을 떠나지 않도록 도우시고 은혜의 손길이 사람을 통해 임합니다. 26절입니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저라도 스파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누가 사울과 사귀고 싶어 할까요? 그러나 27절입니다.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울은 아마 겉돌고 인정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그가 성장하고 다른 사람과 교제하고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4장 36절과 37절을 보시면
4:36-37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원래 이름이 요셉입니다. 그런데 위로하고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섬기는 삶의 태도로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는데 별명이 그의 삶과 너무 잘 맞자 아예 이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처음 등장할 때 요셉이라고 소개한 이 후 계속 바나바라고 불립니다. 사울이 교회 내에 들어와 기둥으로 성장하는데 또 하나님의 사람들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28절에 보시면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바울은 이전에 싫어서 박해하던 기독교인들과 함께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우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나중에 많은 성경책을 쓰고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니 하나님이 제자들과의 교제의 자리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또 29절입니다.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사울을 죽이려는 무리들이 계속 있었습니다. 그런데 30절 말씀을 보시면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형제들의 도움으로 죽음의 위험을 벗어납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혼자서 할 수 없는 두 가지가 결혼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결혼을 해서 자기가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 죄를 인정하며 인간이 되어 가고,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라고 하나님이 이 두 제도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에 이것을 흔드는 무교회주의가 영향을 미치곤 했습니다. 제도나 교회는 필요 없고 개인의 신앙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펴신 김교신, 함석현, 장기려 등의 무교회주의자들이 한국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장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면 참 감사한 일이지만 그 사람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의 필요와 과정에 맞춰 마치 사울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 주셨듯이 그 분들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에 혼자 두지 않으시고 목적한 자리까지 은혜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을 깨달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감사하고 통로로 사용된 분들에게도 감사로 반응하는 복된 추수 감사 주일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