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했음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하나님 나라란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 백성들을 다스리시며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읽어야 하고 기적들 역시 그러합니다.
병자가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면 착각하기 쉽습니다. 누구나 기적을 통해 병 낫고 싶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부활을 열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이런 기적을 경험할 수 있을까 헛된 기대를 하고,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서 마치 이런 능력이 있는 양 남을 속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치유 은사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정성껏 기도하면 응답받는 받는다는 예시도 아닙니다. 본문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우리는 능력 있는 누군가를 찾아다니거나 열심히 기도해보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났는가를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본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는 무엇인가요?
1.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병적 증상이 치료됩니다. vv.32-35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는 무엇인가요?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병적 증상이 치료됩니다. 32절 말씀입니다.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베드로는 원래 예루살렘에 거하다가 사방에 흩어진 하나님 백성들인 예루살렘 교인들을 방문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닌 것 같습니다. 그러다 33절에서 한 중풍병자 제자를 만납니다.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일시적으로 몸이 마비된 것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상태입니다. 이 중풍병자를 보자마자 34절에서 베드로가 어떻게 하나요?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말씀만으로 치유가 임합니다. 아플 때마다 이런 베드로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요? 그러나 본문은 베드로의 능력이 아닌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기적이 행해진 제일 중요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35절입니다.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영향력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때때로 구원을 위한 특별한 목적으로 기적을 행하시기도 합니다. 물론 2천 년 전에 일어난 기적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지만 ‘나도 그 기적으로 낫고 싶다’는 것은 잘못된 도출입니다.
중풍병자를 일으키신 일은 예수님도 행하셨던 일입니다. 누가복음 5장 17절부터 26절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이야기 가운데 24절과 25절 말씀을 보시면
[24] …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의 반복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현현을 보여주신 통치자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을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제자들이 성령을 통해 동일하게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중풍병자인가요? 중풍은 인간의 죄악이 가져온 결과를 한 눈에 보여주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중풍의 가장 큰 특징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걷고 싶고 뛰고 싶고 방향을 틀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행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영향력 가운데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욕심내고 화내는 것은 나쁘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생각한 대로 살 수 없습니다. 특별히 가장 불가능한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단순한 지식이 아닌 본질에서부터 나오는 온전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왜 불가능한가요? 죄에서 기인한 영향력이 인간을 자기중심적 욕심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요구하시지만 인간은 자기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자기 사랑만큼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을 중풍 걸린 자처럼 보십니다. 중풍 걸린 사람에게 조금만 노력해서 움직여보라고 충고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근원적 죄악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성령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지만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온전한 사랑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을 치료하시기 전에 먼저 무엇을 하셨나요? 누가복음 5장 20절을 보시면
눅 5: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먼저 죄를 사하셔서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뒤에 중풍을 치료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인지하나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고 있다면 반드시 성령의 역사로 우리 삶에 변화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변화인가요?
단순히 교회 출석 잘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앙이 좋아지면 이런 것들을 하게 됩니다만, 내면이 변하지 않고도 겉으로 종교적 열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짜 변화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변화입니다.
저도 마치 성경의 중풍병자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모태 신앙이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의 행위가 없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가장 열심히 찾았을 때를 돌이켜보면 질병, 입시, 결혼 등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믿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인가요? 나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을 성경은 우상숭배라고 부릅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경의 명령대로 다른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려고 했던 것 같지만 돌아보면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좋아했습니다. 멀리서 볼 땐 좋아 보여도 친해지면 단점이 보이면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이 왜 내 기도를 안 이루어주시나?’ 혹은 ‘왜 저 사람은 단점을 고치지 못하나?’ 라고 생각하던 시각에서 내가 중풍병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풍으로 육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듯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음을 인정하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기도의 변화입니다. 물론 지금도 문제가 생기면 기도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던 습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받아들이도록 은혜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람에 대한 마음도 변했습니다. 마음의 틀을 내려놓게 되었고 예전에 마음에 들지 않았을 만한 사람들이 용납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처럼 통제하지 않게 되자 오히려 나의 돈과 시간과 능력을 희생해 남을 돕고 섬기는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20대 때의 제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처럼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해 일상이 고통스러웠는데, 수십 년이 지나 복음을 알게 되고 변화하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치유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으로 진정한 사랑의 은혜를 맛보아 변화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는 무엇인가요?
2. 영적으로 살아난 모습이 나타납니다. vv.36-42
두 번째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는 무엇인가요? 영적으로 살아난 모습이 나타납니다. 36절과 37절입니다.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다비다의 헬라어 이름은 도르가로 이는 영양 즉, 사슴이라는 뜻입니다. 선행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여 제자가 죽자 제자들이 베드로를 부릅니다. 38절입니다.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누가 죽어서 누워 있는데 베드로를 부른 사람들도 굉장히 믿음이 큰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믿음대로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40절 말씀입니다.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이런 놀라운 일이 역사상 계속 반복되나요? 성경에만 이 일이 기록된 것은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오해한 사람들은 아직도 죽은 자의 부활을 위해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이 살아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입니다. 36절입니다.
[36]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다비다는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랑의 삶을 살았더니 39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39] …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이 땅에는 도르가와 같이 희생과 섬김의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도르가가 노환이 아니라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자 주변 사람들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베드로를 불러와서 도르가의 섬김과 은혜도 곱씹고 사랑의 사람이 사라질 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를 이야기를 하며 도르가를 살려달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르가를 통해 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위로하시고자 살려내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목적이 무엇인가요? 42절입니다.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복음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도르가도 이후에 영원한 죽음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을 보시면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일시적으로 일어났어도 반드시 또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성경은 우리에게 두 번의 죽음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육적 죽음은 누구나 겪는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죽음은 무엇인가요?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보시면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영적인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육적 죽음은 죽게 되지만 예수를 믿어 생명을 얻은 자는 둘째 사망을 겪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20장 6절은 성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
성도는 이미 영적으로 한 번 태어났기 때문에 첫째 부활을 경험한 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성령이 오셨다면 육적으로는 죽더라도 이미 한 번 부활한 사람이며 둘째 사망을 경험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살아나셨다면 살아난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 안에 생명의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죽음의 냄새를 풍기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16절을 보시면
고후 2:16 이 사람(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
바울 사도는 죽음의 영향력의 냄새와 예수의 생명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구분합니다.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무엇인가요?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영적 죄악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냄새처럼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맡을 수 있는 냄새 중 제일 심한 냄새가 시체 썩는 냄새라고 합니다. 특별히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황화수소와 암모니아가 만드는 냄새는 마치 죽은 영혼이 만들어내는 악취와 유사합니다. 물론 이것은 코로 맡는 악취가 아닙니다. 인간이 죄악의 영향력으로 죽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부정적 감정들입니다.
한 심리학자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긍정적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기쁨, 행복, 만족 등은 인지의 영역이지 실제 영혼에서부터 출발해서 육체, 정신, 호르몬까지 영향을 미치는 감정이 아니라고 합니다. 반대로 부정적 감정의 영향력은 육체, 정신, 호르몬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우리가 뭉뚱그려 ‘감정’이라고 부르는 이 두 부류는 전혀 다른 종류라고 합니다.
긍정적 감정은 사실 너무 단순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됐을 때 좋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욕망이 채워질 때 느끼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부정적 감정은 몸과 정신, 그리고 궁극적으로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부정적 감정의 뿌리는 욕망과 두려움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부정적 감정인 분노는 왜 느끼나요?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어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왜 미워하나요?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게 만든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왜 불안한가요?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될까 봐 미래가 두려운 것입니다. 왜 우울한가요?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는데 그 원인을 자신으로 수렴하면서 자신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왜 슬픈가요?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된다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 오는 좌절입니다. 모든 감정의 원인은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고 내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부정적 감정들을 경험합니다.
부정적 감정이 가져오는 가장 큰 폐해는 무엇인가요? 모든 관계를 파괴합니다. 관계에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감정입니다. 인간은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그 대상을 나의 일부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객관화할 수 있지만 배우자, 자식, 부모는 나의 일부처럼 여기는데 나의 일부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정적인 감정들은 우리가 하나님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우리 영혼이 시체처럼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제가 자꾸 복음을 이야기하나요?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을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분으로 믿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지고 원망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을 향해서는 매섭게 비판합니다.
이 죄의 영향력이 얼마나 더럽고 추하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영혼의 본질에서부터 인정할 때 하나님은 생명을 경험케 하십니다. 예수 믿는 순간에 180도 변화된다면 너무 좋겠지만 인생이 고통인 이유는 우리 안에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옷을 벗고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 은혜 아니면 나는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으로 나를 살려주시지 않으면 저는 살 수 없습니다’를 계속 고백하며 그 은혜를 붙드는 자들에게 무엇이 나타나나요? 고린도후서 2장 15절을 보시면
고후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체 썩는 냄새를 매일 경험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문제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 사람이 화내고 짜증내고 지적하는 것이 괴로워서 남들은 다 알고 피하는데 본인만 모릅니다.
다행인지 제 영혼은 부정적인 감정에 민감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경험한 가장 큰 부정적 영향력은 불안이었습니다. 미래가 너무 걱정되고 힘드니까 불안을 피하고자 시간과 상황과 주변 사람을 통제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준비로도 인생의 풍파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대학교 4학년 때 저희 집이 망하자 불안이 너무 커져서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매일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부도의 당사자이며 감옥에 다녀오신 아버지도 잘 사시는데 아들인 제가 몸과 정신이 망가져서 마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 불안을 사용하셔서 저를 목사로 부르셨지만 그 후로도 훈련은 계속되었습니다. 불안을 벗어나고자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힘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돈인데 저는 집이 망한 이래 약 20년 동안을 돈으로 인한 불안의 끝자락에 붙어서 살았습니다. 이것도 힘들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결정타는 바로 귀국해서 2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기간이었습니다.
제가 유학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에 돌아가면’이라는 단서였습니다. 매일 귀국을 꿈꿨는데 막상 귀국하자 2년 동안 무직이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아 매일 멜라토닌을 먹고, 열심히 살아보려고 새벽부터 운동을 나가지만 걷고 뛰는 내내 눈물이 나고, 책을 읽으려 해도 멍한 우울의 연속이었지만 돌아보면 그마저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까지 제 인생을 주도하던 불안을 깨뜨리시고 그 자리에 믿음이 자라도록 저를 뒤흔드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정말 불안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지냅니다. 지금은 일이 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주변 목사님들 만나면 대화의 대부분이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한국 교회 이대로 괜찮을까? 초등부가 없는데 십년 뒤에는 어떻게 될까? 노후 준비를 안 했는데 은퇴 후에는 어떻게 될까? 목사님들도 걱정합니다. 이 상황에서 불안하지 않는다는 것이 제 기질로는 불가능한 일인데 하나님이 하시겠지 맡기고 걱정이 없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교회 뿐 아니라 사람을 보면서도 그렇습니다. 교회 나오자마자 변화되는 분은 그 분대로 사랑스럽고, 교회 10년째 나오시면서 큰 변화가 없는 분을 보아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시겠지’ 생각하며 똑같이 사랑스럽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성도라면 이 변화의 과정을 필히 지나가야 됩니다. 자는 동안 부정적 감정이 사라지고 하루 만에 행복한 사람이 되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근원의 죽음의 영향력을 직면하게 하셔서 ‘하나님 저는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자입니다. 저는 감정적으로 관계를 파괴하는 자입니다’ 고백하게 하신 뒤 우리 안의 옛 사람을 무너뜨리시고 새 사람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