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3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
[3]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면 반드시 외부에서 핍박과 공격이 있다는 것을 사도행전 강의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옥에 갇히고 야고보와 스데반은 죽임을 당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뿔뿔이 흩어지고 바울은 선교하면서 죽음에 가까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박해를 통해 오히려 무슨 일이 나타났나요?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게 드러나서 교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더 힘 있게 확장되었습니다.
문제는 외부의 공격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공격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단체나 나라가 외부와 내부에서 공격을 받고 문제가 많으면 아마도 분열되어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며 진리를 바로 세우는 기회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교회 내의 진리는 어떻게 세워지나요?
1. 하나님이 직접 행하신 일들이 증거가 됩니다. vv.1-12
그렇다면 교회 내의 진리는 어떻게 세워지나요? 하나님이 직접 행하신 일들이 증거가 되어 진리가 세워집니다. 바울은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를 간증하였는데 몇몇이 나타나 문제를 제기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안디옥 교회는 이방에 첫 번째로 세워진 교회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때 유대로부터 온 사람들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며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당연히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2절 상반절에
[2a]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다는 유대인들과, 하나님은 은혜로만 구원하신다는 바울의 대립이 점점 첨예해지자 결국 권위를 가진 예루살렘 교회에 의논하기로 합니다. 2절 하반절입니다.
[2b] …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결정권을 가진 예루살렘 교회 내에도 어떤 사람들이 있었나요? 5절입니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실 예루살렘 교회 내에 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더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이방인이 없고 이미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 예수를 믿는다면 자신들처럼 할례와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만약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되어야만 구원 받는다고 하면 아마 기독교는 널리 전파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대에 성인이 되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생명을 내놓는 위험한 일인데다 모세의 율법은 기본 규례만 613가지에다가 그 세부 조항이 수천가지나 되어 지키기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들도 세부 계명을 다 알지 못했고, 이것만을 철저히 연구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바리새인이라고 불렀는데 그들도 이것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는 현실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베드로를 준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도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고넬료를 통해 직접 경험했습니다. 7절부터 9절입니다.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세 가지로 증거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율법이나 할례가 아닌 복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고넬료 사건을 통해 베드로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이렇게 증언했다면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핍박하던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수제자로 당시에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말에 권위가 실린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내리신 성령을 사도행전 10장 44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10: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원래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안수하고 기도할 때 임했는데 이곳에는 설교 중에 임하십니다. 왜인가요? 베드로조차 이방인에게 손을 대기를 꺼려해서 그들에게 안수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 중에 성령을 주심으로 모든 사람이 복음으로 구원 받음을 확증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증언에 이어 바울과 바나바도 12절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언합니다.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이제야 사람들이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복음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분열될 뻔한 위기를 맞았지만 하나님이 그동안 하신 일들을 돌아보니 모든 사람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으며 다른 조건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11]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이렇듯 2천 년 전에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은혜의 교리가 확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이단의 이름들은 그들이 예수 외에 무엇을 붙잡는지를 잘 드러냅니다. 안식교는 안식일처럼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여호와의 증인은 구약의 여호와를 구원의 수단으로 여깁니다. 즉 예수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여전히 예수님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노력하고 열심을 낸 대가를 받을 뿐 은혜의 원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진리가 견고하게 서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생활 중에 흔들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일에 많은 증거를 허락하셨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나요? 신앙은 내가 죄인이라는 인정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또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초에서 시작되는 구원의 증거들입니다.
이 과정을 강렬하게 지나는 사람도 있고 희미하고 어렴풋한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의심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았으면 큰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것 아닌가? 내 인생이 달라져야 되는 것 아닌가? 이것은 미성숙할 때 벌어지는 내적 갈등이지만 의심이 있다는 것 자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미성숙하면 이뿐 아니라 신앙의 기복이 심합니다. 스스로도 예수 믿는 사람 같지 않다가 회개하면 죄책감이 커지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당연한 과정입니다. 신앙은 어린 아이가 자라가듯 오랜 시간과 경험과 실수와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엄마 아빠를 알아보고 소통하는 아기가 없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완전히 신뢰하는 데에 도달하는 것은 긴 여정이 걸립니다. 초신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찾으려고 하지만 신앙이 성숙해지면 구원의 확실한 증거가 은혜 의식으로 나타납니다. 은혜 의식은 죄책감이 아닙니다.
죄책감은 잘못한 일을 보상하고 싶은데 안 될 때 느끼는 감정으로, 인간에 근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식이 깊어지면 은혜 의식으로 발전합니다. ‘죄’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데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 큰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하셨다는 은혜 의식이 찾아오게 되면 마치 디모데전서의 바울처럼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 고백 바로 앞 절에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게 나타나’라고 고백합니다. 즉 자신은 이런 큰 은혜를 받을 자가 아닌 괴수라는 고백입니다. 이 은혜 의식이 바탕이 되어야만 자기 삶에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대해 감사하며 찬양하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점차 성숙하게 되면 나의 본질로는 불가능한 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용서할 수 없던 사람을 용서하게 되고, 보기만 해도 화가 나던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나와 관계가 없던 사람을 긍휼히 여기게 되고, 믿지 않은 사람을 향한 긍휼과 그들을 구원하고 싶은 열망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듯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인생을 통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잘못하고 실수할 때마다 하나님이 싫어하실까봐 걱정하고 있다면 아직 미성숙한 아이일 것입니다. 은혜 의식이 넘쳐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성숙한 은혜의 결과를 누리는 중이실 것입니다.
저는 20대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 이 모든 것을 짧은 시간에 경험했습니다. 너무 다양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기뻤다가 지옥 같다가 하늘로 올랐다가 땅에 꺼지는데 스스로를 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은혜가 처음 임했을 때는 죄에 대한 민감성이 너무 강해져서, 태어난 것 자체가 죄 같고, 내 행동이 다 죄 같고, 벌레 같은 내가 어떻게 살아갈까 고통 속에 지냈습니다. 그랬더니 제 안에서 ‘주님, 예수님을 통해 저를 구원하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요’라는 절박함이 커졌습니다.
그때가 제 인생에서 말씀에 대한 사랑이 가장 커졌을 때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성경 일독을 시작으로 늘 성경을 가까이는 했었지만 이때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 지가 사모되어서 하루에 100장씩 읽곤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의존과 말씀에 대한 사랑이 커지다가도 불현듯 내가 신앙이라는 환각에 빠진 것은 아닌지, 주변 사람들은 다 잔잔한데 왜 나만 특이한지, 내가 미친 것은 아닌지 불안이 일기도 했습니다.
은혜가 강권적으로 임할 때 다양한 서원을 하고, 지키지 못해서 절망하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더 큰 다짐을 하고 또 절망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가시 같이 남아있던 것이 여동생과의 관계였습니다.
저는 ISTJ인데 한 살 아래 여동생은 ENFP로 모든 면에서 상극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안 좋았는데 성인이 되고 여동생이 어머니께 반항하자 저와도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11시에 들어오라면 12시를 넘기고 12시까지 오라면 1시를 넘기고 어머니가 기다리시다 자주 우셨습니다.
어느 날 또 1시가 넘도록 안 들어오고 어머니께서 덜덜 떠시면서 추운 마당에서 기다리시자 제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혼쭐을 내 줄 마음으로 큰 길에 나가 기다렸습니다. 이때는 우습게도 제가 가장 은혜가 충만하던 시절이었는데도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습니다.
씩씩거리며 3시까지 기다렸는데도 동생이 오지 않아서 화가 나서 집에 와 보니 여동생이 이미 귀가해서 자고 있었습니다. 집에 오는 길이 두 갈래가 있는데 항상 큰 길로만 다니더니 하필 그날은 다른 길로 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막아주신 줄 믿습니다.
이런 여동생이었는데 은혜를 받고 나니 하나님이 여동생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적인 얘기도 안 할 만큼 싫어하던 사이에 갑자기 사랑한다고 하기 싫었는데 감정을 뛰어넘어 순종해야 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고 그 불편함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심이 선 날 도저히 말로는 못하고 편지를 썼습니다. ‘자주 화내고 미워해서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편지와 용돈까지 전달하자 동생도 엄청 울고 가족도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기적과 같이 십 수 년 동안 꼬였던 관계가 점점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고 내가 그들을 잡아 올려야 된다는 절박감이 많았습니다. 돈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복음의 기초적인 내용과 그림이 적혀 있는 이슬비 전도 편지를 사서 수십 명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우체국에서 일일이 우표를 붙여서 보내야 했는데 우체국 직원이 저를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약 3년 정도 폭풍이 치는 은혜와 구원의 시간을 지냈습니다. 물론 저와 같은 경우는 흔하지 않고 대부분은 구원을 받고도 갈등하고 의심하고 혼돈을 지나며 천천히 성장합니다. 정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일 만큼 여러분을 사랑하신다고 확정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이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녀는 구원을 받습니다.
의심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이지만 여기에서 나아가야 합니다. 30년째 의심만 하고 있으면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30년째 유치원 수준이라면 이것은 심각한 장애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혼돈과 혼란의 시간을 지날 수 있지만 시간이 흘러도 은혜 의식에 깊이 사로잡히지 않고 사랑의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복음에 대한 간절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열정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직 미성숙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은혜가 제 인생을 더 깊이 지배하여 은혜의 증거가 나타난 인생을 살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미성숙한 수준에서 복음의 사도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인생 가운데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교회 내의 진리는 어떻게 세워지나요?
2.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가 됩니다. vv.13-35
두 번째로 교회 내의 진리는 어떻게 세워지나요?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가 됩니다. 13절과 14절 말씀입니다.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열 두 제자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이미 순교를 당해 죽었고, 본문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자 야고보서를 쓴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시므온은 시몬 베드로를 지칭하는 것으로, ‘베드로가 얘기한대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고 첨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1구약 선지자들의 말을 통해 베드로의 증언을 확실하게 변호하고 있습니다. 15절입니다.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구약의 아모스 9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하나님이 구약에서부터 이 모든 일을 다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이 일시적인 사건이나 바울과 바나바의 우연한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 아래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황폐한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베푸실 것임을 말씀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서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벌어지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결과이고 정하신 대로 모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운행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개입하신 결과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의 구원은 확고하며, 구원의 여부는 눈에 보이는 상황으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확고하게 한 뒤 그들이 무슨 결정을 하나요? 28절과 29절입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복음이 가장 중요하기에 그것 외에 다른 부담을 지우지 않기로 예루살렘 교회가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29절입니다.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 네 가지는 지금의 우리와는 관계가 없지만 당시 일상에는 흔하고 중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우상의 제물과 음행은 이방인들이 살아가던 방식이었습니다. 도심 도처에서 사람들은 우상에게 소속된 자들과 음식을 공유했습니다. 즉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우상을 섬기는 행위였습니다.
음행은 종교화되었습니다. 당시 종교는 사람들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게 해 주는 도구였습니다. 우상의 신전에는 신전 창기들이 있어서 남자들이 예배하러 와서 맛있는 것을 같이 먹고 창기들과 성관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불륜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신과의 연합을 통해 신이 주는 쾌락의 기쁨도 누리고 인생에서도 행복하게 된다는 우상숭배의 전형이었습니다.
고린도와 같은 도시의 아프로디테의 신전에는 신전 창녀만 수천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하러 오면서 창녀촌이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도 세상의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온전히 소속될 수 없으니 그런 문화는 끊어버리라고 제안한 것입니다.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은 먹지 말라고 이야기한 것은 교회의 연합을 위한 제안이었습니다. 당시는 흩어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있는 교회가 많았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피를 금하는 율법을 지키던 유대인들은 코셔라는 방법을 통해, 몸에서 피가 다 빠진 짐승의 고기만 먹었는데 이방인들은 목을 매서 죽인 뒤에 몸에 피가 남아 있는 짐승을 요리해서 먹었습니다.
피를 극도로 혐오하는 유대인들과 일상적으로 피를 먹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방법을 고집하면 예배 후 식사도 불가능해지기에 교회의 연합을 위해 이것을 삼가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처음에는 분열로 시작되었지만 감사하게도 은혜로 마무리가 됩니다.
세상은 정치 경제 복지 모든 영역에서 서로의 이권 때문에 갈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교회는 강하게 연합되고, 온전하게 세워지고, 복음 전파를 방해하던 걸림돌이 제거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 받는다는 은혜 안에 교회가 확장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방의 교회들이 불필요한 규례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나요? 우리에게도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는 은혜의 교리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원에 대해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무엇인가 해야 될 것 같은 압박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파고들어 유혹하는 무리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하던 하지 않던 하나님이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은혜에 기반을 둔 인생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