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햄릿 증후군을 알고 계신가요? 햄릿 내용은 몰라도 가장 유명한 대사는 다 아실 것입니다. ‘죽는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는 죽어도 살아도 해결이 안 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한 말로 햄릿 증후군을 다른 말로 결정 장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생은 사실 끊임없는 결정의 과정입니다. 하루에 몇 번이나 결정을 내리시나요? 아침에 일어날까 말까, 샤워를 할까 말까, 물건을 살까 말까. 평범한 사람이 하루에 3만 5천 번 결정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사소한 결정이겠지만 우리는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도 내려야 합니다.
그 결정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두려움도 크고, 또 내가 결정으로 일이 잘못될 까봐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대신 현재와 미래까지 완벽하게 알고 있는 존재가 우리를 대신하여 결정해 주고 좋은 길로 인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이에 대한 오해도 많아서 하나님 자체에 대한 오해를 낳기도 합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성도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어떻게 인도하시나요?
1.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하십니다. vv.6-7
하나님은 성도를 어떻게 인도하시나요? 첫 번째로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하십니다. 6절입니다.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바울과 실라는 2차 전도 여행 중이며 대상은 지금의 터키 지역인 아시아였습니다. 2차 전도여행의 목적은 15장 36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15: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1차 선교 여행을 했던 지역에 교회를 세운 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상황이 너무 궁금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도처에 교회가 있고 새가족반 등을 통해 초신자들의 적응을 도와주던 문화가 아닌,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예배하고 함께 예수님을 배우는 상황이다 보니 교회가 사라진 건 아닌지 이들이 잘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다시 가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첫 번째 갔던 더베와 루스드라 지역을 방문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변을 돌아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거기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개입하셨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개입을 흔히 성령의 감동이라고도 합니다. 감동은 환상이나 특별한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마음을 주셔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은 원래 자신의 생각과 분별해내기가 모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누구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고 이것이 실제 능력으로 나타나 죽은 사람을 살려내기도 했습니다. 그런 자의 마음에 성령이 감동하심으로 하지 말아야 될 일을 알리신 것입니다. 7절에도 보시면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소아시아 지역으로 가지 말라고 성령이 막으셨습니다. 성령의 감동이라는 것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사실은 모든 상황에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오랫동안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그 뜻을 따르고자 한다면 점점 더 민감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오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우리 인생을 인도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손해를 막아주시고 이익을 보도록 인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계속 보았듯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목적 안에서 인생들에게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중요한 결정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자 할 때 세 가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이익과 손해의 여부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익을 원합니다. 손해를 보지 않고 체면도 차리고 지위도 높아질 수 있다면 이것은 성령의 감동이기보다는 우리 안에 원래 있는 욕망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어떤 선택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우리가 손해 보고 내려놓으라고 감동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가의 여부입니다. 지금 성령은 바울이 어떤 지역에 가는 것을 막으셨는데 바울은 알지 못했지만 이는 16장 하반부에 보면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그리스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시려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확신으로 어떤 것을 결정할 때 그 결정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가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셔서 희생하게 하셨다면 유익한 방식으로 합당하게 이끄실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이 감동이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인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1차원적으로 이 땅에서 나와 내 가족이 얼마나 잘 사는가에만 관심 갖던 시각에서 눈을 들어 복음이 확장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는 큰 기쁨을 누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모른 채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축구 선수 중 이영표 선수는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직업이 축구 선수이고 하나님이 능력도 주셨고 본인도 노력을 많이 해서 좋은 성과를 내었는데 본인은 자신의 부르심이 축구 선수가 아닌 예수 전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인트호벤 팀에서 뛰게 되었을 때 아직 영어가 서툴자 구단에서 통역사를 붙여 주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아서 교회가 없었는데 통역사 분이 어려서 교회에 다녔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분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분의 예수 믿지 않는 남편도 전도해서 그 부부와 함께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몇 년 뒤 이영표 선수는 다른 지역으로 옮겼는데도 이 일을 통해 아인트호벤에 한인 교회가 생겨 지금은 백 명 넘는 교인이 출석하게 되었고 통역사 남편 분은 장로님이 되셨다고 합니다.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복음을 드러내시고 유익을 끼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신다는 확신으로 사는 사람이 경험하는 은혜와 축복은 얼마나 복된 것일까요?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뜻보다는 내 불안한 미래를 안심시켜줄 인도만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우리 생각이 다른 결정적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감동으로 어떤 결과를 원하시나요?
우리의 선과 하나님의 선이 너무나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은 경제적 여유로 마음에 근심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입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을 보시면
눅 6:20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가난이 좋은 것을 넘어 복되다고 얘기하십니다. 물질적 가난을 통해 인간이 영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깊은 갈망이 만들어지며 결국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장은 궁핍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이것을 통해 궁극적이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마가복음 10장 25절에 뭐라고 얘기하셨나요?
막 10: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부자는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땅에서의 부요로 인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살아간다면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기에 자기 능력으로 부와 명예를 얻으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부자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시기보다 안 들어주시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기도해서 부자가 되면 하나님을 의존하지도 않고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돈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고 많은 것들이 그러합니다.
저는 배우자를 위해 십년 동안 매일 한 두 시간씩 기도했습니다. 무엇을 기도했을까요? 나는 변하지 않은 채 나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며 나의 유익과 편리와 행복을 위해 완벽한 존재를 열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10년 기도한 후 내린 결론은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이며 혹 있다 해도 이것은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구원의 가장 궁극적 목적은 왕 되고자 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남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로 본질이 변화되는 것인데 노예와 같이 나에게 맞추어 주는 사람 옆에서는 내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결혼을 만드신 이유는 죄인과 죄인이 만나 죄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고백하며 우리는 절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사랑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배우자 때문에 고통스럽고, 자꾸 내 이기성이 폭로되고 있고, 은혜 없이는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셨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강력하게 받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하나님의 인도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주변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돈과 배우자가 아니라도 하나님은 여러 다른 것으로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존재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인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인도’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울처럼 결혼도 포기하며 인생 전체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펼쳐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선상에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따라가며 성령의 감동으로 욕심을 내려놓고 남의 유익을 위해 내 인생을 내어 주기로 순종한다면 여러분도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동참하는 자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어떻게 인도하시나요?
2. 생각의 틀을 벗어나도록 인도하십니다. vv.8-10
두 번째로 하나님은 성도를 어떻게 인도하시나요? 생각의 틀을 벗어나도록 인도하십니다. 8절 말씀입니다.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하나님이 막으실 때마다 다른 쪽으로 나아가다가 결국 소아시아의 가장 끝부분, 바다에 면한 항구 도시인 드로아에 도달했습니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는데 9절에서 환상을 보게 됩니다.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사도행전에는 인간의 틀을 넘어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장면들이 자주 나옵니다. 사람은 본래 자신이 원래 생각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본문은 마치 한국에서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일본으로 보내시는 상황입니다. 한국에서 전도하던 사람이 바다를 건너야겠다는 생각을 할 리가 없자 환상으로 임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방인에게 전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구원은 유대인들만 받는다는 틀이 너무 견고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환상을 세 번 연거푸 주셨습니다. 불결하고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먹으라는 것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는 바울의 생각보다 훨씬 견고한 틀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마게도냐는 그리스로 대륙이 달라집니다. 바다를 건너는 것은 아시아에 복음을 다 전한 뒤에나 생각해 볼 일이었을 것일 텐데 환상을 본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틀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저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전부 제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들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목사가 된 일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목사 될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학생 때 아파서 쓰러지고 휴학하고 매일 누워 있는 등 제 스스로 인생을 끌어갈 수 없는 상황들이 벌어지면서 틀을 점점 내려놓던 차였습니다.
누워 지낸지 한 달 만에 이전에 기도원에서 만났던 어떤 전도사님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기도처를 열어 매일 기도하시는데 청년이 열심히 있는 것 같으니 한 번 오라고 얘기를 들은 것이 벌써 몇 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고통 중에 갑자기 생각난 것입니다.
전화번호도 없고 주소도 없고 기도처 이름도 모르고 단서가 없는 상태로 동네를 돌기 시작했는데 정말 신기하게 무슨 기도처라고 써 있는 곳을 찾았고 기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크지 않은 공간에 대여섯 명과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사연을 얘기하고 기도를 하는데 다 남자 분들 사이에 한 젊은 여자가 저를 그윽하고 집요하게 쳐다보는데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얘기할 때도 기도할 때도 내내 보다가 흩어져서 따로 기도하는 시간에도 따라 와서 옆에 앉아서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왜 거부하냐고 두세 번을 얘기했습니다. 전도사님이 오셔서 그 분을 떼어 놓았는데 나중에야 그 사람이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말해주셨습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집에 와서도 그 생각이 맴돌았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내가 거부하는 영역이 있는가라고 일주일 동안 고민하다가 그때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다가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솔직히 귀신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부르셨다는 생각을 평생 해본 적이 없고 부모님도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었더니 하나님이 생각지도 못한 이런 도구를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또한 교회 개척 또한 제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미국에서 하루에 10시간씩 몇 개월씩 기도할 때도 매번 청빙 받아 갈 교회를 잘 회복하게 해달라는 기도만 하던 저에게 하나님이 틀을 깨뜨리며 찾아오셨습니다. 한국에 와서 2년 동안 청빙은커녕 아무런 소망이 없어 제 마음이 무너져 내리던 즈음 2014년 초에 어떤 교회의 대학부 수련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 예전 대학부 제자들이 찾아왔는데 당시는 교회에 어려움이 있어서 젊은이들이 많이 교회를 떠나고 방황하던 때였습니다. 그 중 한 명이 ‘목사님 왜 방황하는 우리들을 방치하고 돌보지 않으세요?’라고 한 말이 제 머리를 쳤고 집에 와서도 그 말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목양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가라는 고민으로 2주 동안 기도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개척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고, 멤버도, 장소도, 돈도 없고, 남의 교회에서 개척을 할 수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제 마음을 바꾸시고 급박하게 상황도 진행하셔서 그 얘기를 들은 지 한 달이 되지 않은 2014년 3월 16일에 집에서 개척을 했고 이제 11년이 된 것입니다.
제가 지난 11년을 돌아보며 제일 감사한 것이 청빙 받지 않은 것입니다. 기존 교회 사람의 마음의 틀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는데 저는 지금 매주 제가 맞다고 확신하는 것을 가르치고 또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분만 계시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다 주시지 않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광의 길이며 우리에게도 가장 축복된 길임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복음을 받아들여 성장하시는 모습 또한 큰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제가 이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고통하고 눈물 흘리지 않았을 텐데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지금은 힘들더라도 하나님이 그 과정을 통해 여러분을 영광을 드러낼 거룩한 자로, 욕망에 이끌리지 않는 도구로 만들어 가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심으로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