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30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시험을 망치고 절망해 있던 순간 하나님이 큰 은혜를 부어 주셔서 저를 사랑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은혜를 받고 가장 크게 나타난 변화는 같은 반 아이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너무 마음 아프게 여겨졌다는 점입니다. 밤 10시까지 있던 자율 학습 시간에 반 친구들 한 명 한 명에게 ‘공부 잘하고 있니, 미래는 어떻게 될 것 같니’하며 말을 걸며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얘기 듣기 싫다고 말도 못 붙이게 하는 아이도 있었고, 진지하게 듣고 교회에 온 친구도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3년이나 제가 집으로 가서 깨워서 함께 교회를 다녔지만 결국 떠나기도 하고 별로 친하지 않았던 한 친구는 열심히 혼자 교회를 나오다 나중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똑같이 말씀을 전해도 어떤 이들이 참으로 순전하게 받아들이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 밭을 준비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구원받을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남과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을 자들의 말씀에 대한 반응은 어떠한가요?
1.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릅니다. vv.1-9
그렇다면 구원받을 자들의 말씀에 대한 반응은 어떠한가요? 첫 번째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릅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간수를 구원하고 빌립보를 떠나 작은 도시들을 거쳐 데살로니가에 오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대륙의 입구가 되는 도시라 당시 기록에 의하면 약 5만에서 10만 정도의 사람이 오가는 큰 도시였고, 마침 유대인들도 살고 있어서 회당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2절과 3절입니다.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이전에 말씀드렸듯 유대인의 회당에 회당장이 있지만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방문하면 그들에게도 말씀을 전할 기회를 주곤 했습니다. 유대인들도 구약 성경의 메시아 예언을 다 알고 있었고 열망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죽었다 살아나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구약을 풀어 설명했던 것입니다. 5절에 보시면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응했나요?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야손은 회당장입니다. 바울이 복음 전한 것을 허용했다는 이유로 야손과 형제들을 끌어내고 불량배들을 동원해 폭동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누군가는 기다렸지만 그것이 예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인가요? 그들은 강력한 권세로 로마를 제압하고 자신들을 부요케 해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분을 예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거부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회당에 다니던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4절입니다.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리스인들은 엄청 많은 신을 섬겼는데 왜 유대인의 회당까지 와서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이들의 그리스 신관은 그들에게 자유와 기쁨이 아닌 혼란과 절망을 주었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신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는 운명론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는 태풍이나 지진 등의 위협적인 자연 재해를 설명할 수도 막을 방도조차 없었기에 이것을 신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연 재해가 벌어질 때마다 그들은 인간이 신의 노리갯감에 불과하다는 허무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만들어 낸 신은 철저히 인본주의적 신들이었습니다. 인간처럼 화내고 불륜하고 보복하고 질투하는데 그들 싸움의 희생양은 인간입니다.
또한 그들의 신관은 모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는 기준을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아무 것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익보다 해가 되는 신들 때문에 오히려 더 불안하고 무질서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만들어낸 거짓 신화입니다.
현대인들도 끊임없이 나름의 신화를 만들어냅니다. 운명에 자신을 맡기는 대신 진화론적이고 물질적인 인간관으로 대체했습니다. 진화는 진화‘론’에 불과하고 증명할 수 없는데도 우연한 사건들을 끌어당겨 맞다고 우깁니다. 아메바가 우연히 진화를 거듭해 인간이 되었다면, 그래서 인간은 영적 존재가 아닌 물질에 불과하다면 인간은 허무하고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또한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려던 시도는 과학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물론 과학은 꼭 필요하지만 과학이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으며 모든 것이 과학으로만 증명된다는 생각은 과학만능주의입니다. 이 때문에 영생할 수도 있다는 착각들을 하지만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고대에는 신이라는 존재를 상정해서 권위에 순복하는 체제가 있었다면 요즘은 포스트 모더니즘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는 절대적인 가치가 사라지고 가치상대론을 지지하는 이론으로 남자가 자신을 여자라고 주장하고, 심지어 개구리라고 주장해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보다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라 현대인들의 의견이 극한으로 치닫고 분열하는 것은 미디어의 영향이 큽니다.
데살로니가인들도 잘못된 세계관에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보편적이었던 그리스 신관을 믿던 그들이 무질서하고 혼란한 세계관에서 고통하다 길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복음을 들으며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던 근거를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이들은 바울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씀이 믿는 자 가운데 역사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은 세상이 진짜라고 얘기하던 거짓을 진리 앞에 무릎 꿇게 만들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거나 세상의 영향력이면 인간은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나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의 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인생의 어두움을 해결할 분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만이 능력이 있습니다.
한국 역사에서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는 어두움과 혼란이 가득하던 시기였습니다. 미신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유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조선의 국교가 되었는데도 모든 사람들은 복을 받고자 조상을 섬겼습니다. 나라의 운명은 열강들로 풍전등화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으로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시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 가운데 한국처럼 말씀으로 자생적으로 신자들이 생겨난 나라가 없습니다. 첫 복음 전파는 선교사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말씀을 읽고 믿는 사람들 덕분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입니다.
1866년 평양에 미국 상선이 들어왔는데 당시 대원군이 허락하지 않아서 실랑이를 하다가 나중에는 관군을 동원해서 강에다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여서 배를 불태웠습니다. 그 때 배에 웨일즈의 토마스 선교사님이 조선에 복음을 전하고자 중국에서 왔는데 배가 불타자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뛰어내려서 물가로 나왔습니다.
관군들이 토마스 선교사님을 칼로 찌르는 순간 이 분이 가슴에 품었던 성경을 던지면서 예수 믿으라고 말하고 순교 당하셨습니다. 아무 일도 해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다니 선교사로서 허무한 죽음이었을까요? 그 날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장면을 구경하던 12살 최치량 어린이가 몰래 책을 가져다 같은 동네의 박영식에게 주었고 박영식은 종이가 귀하던 시대이니 책을 낱장으로 뜯어 집 전체를 도배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앉아도, 누워도, 일어서도 성경이 보이니 매일 한문 성경을 읽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최치량이 성인이 되었을 때 박영식의 집을 사게 되었고 그곳을 여관으로 꾸몄습니다. 후일에 평양 마포 삼열 선교사님이 오셔서, 자신이 처음 온 줄 알았는데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고, 성경으로 도배된 여관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그 여관이 평양 최초의 널다리 교회가 되었고 나중에 이름을 바꾸어서 평양 장대현 교회가 되었으며, 토마스 선교사가 성경을 주며 순교할 때 12살 꼬마였던 최치량은 평양 장대현 교회 최초의 장로가 됩니다. 선교사님이 와서 아무 말 못하고 성경만 던졌는데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를 칼로 찌른 관원이 박춘권이었는데, 그는 피 묻은 성경책을 보며 평생 외국인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회개하고 예수 믿고 평안도 안주 교회의 영수가 됩니다. 영수는 지금의 안수 집사나 장로 같은 분입니다.
또한 박춘권 씨의 조카 이영태는 삼촌 집에 오가며 삼촌의 성경을 읽다가 예수를 믿었고, 나중에 레이놀즈 선교사님과 함께 한문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어 토마스 선교사를 죽였던 사람의 조카가 한국어 최초 번역본 성경에 공번역자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선교사님은 바로 돌아가셨지만 말씀이 수많은 사람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기고 선교사들이 들어오고 학교가 세워지고 한국이 망하지 않고 길을 찾아 궤도에 오르기까지 하나님이 말씀으로 빛을 비추셨습니다.
지금 한국은 백수십 년 전의 어둠과 유사한 지경입니다. 정치는 소망이 없을 정도로 무너졌고, 교회에서는 말씀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짧은 영상을 보고 세상의 성공을 따라가는 일이 훨씬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길을 따라가면 반드시 어두움이 몰려오고 어두움은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기에 우리는 꼭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구원 받을 자들의 말씀에 대한 반응은 어떠한가요?
2. 너그럽고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상고합니다. vv.10-15
두 번째로 구원받을 자들의 말씀에 대한 반응은 어떠한가요? 너그럽고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상고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하자 약 70km 떨어진 베뢰아로 몰래 도망을 갑니다.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는데 이들은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1절을 보시면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그럽다’는 ‘교양이 있는’ 혹은 ‘고귀한 출생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양은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통해 자기의 틀을 넘어선 다른 세상과 사상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를 말합니다. 교양이 없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가 살던 방식과 생각만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글을 읽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했던 고대인 대부분은 교양이 없었습니다. 귀족들만이 책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세상은 넓고, 내가 사는 방식과 다른 방식이 있다는 지식을 접하고 경험하며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출신이 고귀하다, 교양 있다, 너그러운 마음이 다 같은 뜻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도 진짜인가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간절히 들었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또한 그러한가 하여 질문하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질문하는 사람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커진 것은 신비한 경험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성경에 관해 질문하고 답을 찾는 여정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60명이나 되는 저자가 거의 1500년 동안 썼는데 마치 창세기를 쓴 사람이 요한계시록을 쓴 것처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창세기 설교하면서 이사야를 이야기하고 사무엘서를 설교하며 신약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상고하다’는 ‘깊이 조사하여 결론을 낸다’입니다.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매일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고 깊이 조사한 것입니다. 말씀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간절히 보며 질문을 던지고 매일 상고한 결과가 12절에 나옵입니다.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이들은 기적으로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지식에 대한 열망이 컸고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접하며 예수를 믿었습니다. 여러분은 너그러운 마음, 교양 있는 태도로 성경을 보시나요? 계속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고자 애쓰고 매일 상고하시나요?
이 과정을 많이 반복하실수록 여러분의 믿음이 커지고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묵상의 숲에서 하는 사역입니다. 참가자들은 대형교회 목사님이 아니라 다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답을 찾고자 열린 마음으로 온 분들입니다.
저는 이 분들께 매주 질문을 15개에서 20개씩 드립니다. 교회 성도들께는 숙제를 드리고, 체크하거나 벌금을 물릴 수 없지만, 목사님들은 너그럽고 간절하게 참석하시기 때문에 이것을 감당하십니다. 세어 보니 창세기에서만 1200 문제를 풀었는데 각자가 고민하고 답을 찾고, 못 찾으면 저와 함께 상고하여 결론을 내는 과정을 지나면서 목사님들이 엄청 성장하셨습니다.
여러분과도 이 훈련을 하고 싶은데 여건상 특별 목장 5주라도 질문하고 상고하고자 합니다. 개인 묵상에서 자신이 질문을 던지고 답하면서 성장하는 것이 설교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뷔페 먹는 사람과 매일 밥 먹는 사람 중 건강하고 잘 성장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물론 변화는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로 나오는 반응입니다. 그 복음의 정답을 알기에 여러분에게 율법을 강조한 적이 없지만, 자율에 맡겼더니 정말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것 같아서 균형을 위해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를 배워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역사하지 않고는 변화될 수 없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설교는 방향과 틀을 제시할 뿐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는 여러분이 각자 애쓰셔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하고 사랑하는 일 중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매일 은혜와 충만함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