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말씀을 전한 뒤 남쪽에 있는 아덴, 지금의 아테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아테네는 잘 아시듯이 그리스에서 가장 발전되고 화려한 도시였고, 문화, 철학, 예술 등 고대 문명의 꽃을 피웠다고도 알려진 영광스러운 도시였습니다.
물론 바울이 방문했던 즈음에는 그 도시의 영광이 막 사그라지던 상황이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아테네가 세계의 중심이며 그 곳에 모든 철학과 예술이 부흥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마치 ‘뉴욕이 패션의 중심지’라고 생각하듯, 당시 사람들은 아테네를 문학과 철학의 중심지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느낀 것은 아름다움이나 화려함이 아니었습니다. 16절입니다.
[16] 바울이 아덴에서 …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바울이 본 것은 도시를 가득 채운 우상이었습니다. ‘격분하다’는 ‘날카로운 것으로 무엇인가를 계속 찔러서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철학적이고 고결한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바울의 내면을 찌를 만큼 강력한 우상숭배가 그들의 본질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23절을 보시면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
다른 곳들도 물론 우상을 숭배했지만, 아테네 사람들처럼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단을 쌓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철학적이고 교양 있어 보였던 아테네 인들의 영적 본질 안에는 우상숭배가 가득했습니다. 분노한 바울이 무엇을 했나요? 17절 말씀입니다.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짜이고, 그들이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잘못임을 선포합니다. ‘변론하다’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변론이지만 혼자서 이야기할 때는 ‘강론’이라고 성경이 번역합니다. 18장 3절을 보시면
18:3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
같은 단어를 아테네에서는 ‘변론’으로 번역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다른 지역 사람들은 듣기만 했는데 자신들이 철학적으로 뛰어나다고 생각한 아테네인들은 계속 질문하고 반박하고 토를 달자 결국 우상숭배자들과 언쟁이 붙은 상황입니다. 우리 또한 세상을 살아갈 때 우상 숭배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하며 이 우상 숭배적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우상 숭배적 세상과 어떻게 싸워야 하나요?
1. 하나님이 온 세상의 통치자 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vv.18-27
그렇다면 우상 숭배적 세상과 어떻게 싸워야 하나요? 첫 번째로 하나님이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18절 상반절입니다.
[18a]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은 고대 철학의 근원이 되는 철학으로 이 둘은 상반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삶을 즐겨라’ 주의입니다. 반대로 스토아 학파는 어떤 고통이 와도 그것을 이겨낼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믿으며 절제하고 금육하고 훈련하는 ‘삶을 견뎌라’ 주의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상의 근원에는 우상 숭배적 영적 본질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철학적 사상을 만들어냈지만 근거를 파고들면 본질에는 우상 숭배적 경향성이 있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우상은 쾌락입니다. 모든 좋은 것을 더 많이 자극적으로 누려서 행복하고 싶은 열망입니다. 여기서 나온 결과는 내가 원하는 것이 선이라는 거짓입니다.
절제하고 금욕하는 스토아 학파는 얼핏 올곧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의 우상은 통제입니다. 노력하고 훈련하는 인간은 탁월한 존재라는 전제에서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이 근원에는 고난을 극복한 자신을 최우선에 두려는 경향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수천 년 전에 멋진 철학을 만들어낸 것 같지만 속을 들춰보면 요즘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양식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쾌락을 최대한 증폭시킬 도구들을 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쾌락을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남들이 갖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을 내가 갖고 누리기 위해서는 항상 물질이 필요하기에 쾌락주의와 물질주의는 같은 것입니다.
절제를 통해 남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인정과 칭찬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최근의 자아 성취, 인본주의, 자기개발과 상통합니다. 이런 사상과 싸우기 위해서는 고통이 뒤따릅니다. 바울도 복음을 전하고 어떤 반응을 받았나요? 18절 하반절을 보시면
[18b] …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
‘말쟁이’의 원어는 새가 부리로 이것저것을 쪼듯 여기저기서 조금씩 지식을 모아다가 잘난 척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입니다. 바울이 새로운 얘기를 하자, 여기저기서 모은 지식으로 자랑하는 말쟁이로 보고 비난하고 조롱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이렇게 보는 사람과 말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요? 이들의 사상의 근원은 영적 우상 숭배이기에 이들을 설득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근원 안에서 죄가 만들어낸 욕망과 두려움으로, 욕망이 강력한 사람은 쾌락주의, 두려움이 강한 사람은 금욕주의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뿐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는 우리 안에서 싸움이 존재합니다. 우리도 세상 풍조에 계속 영향을 받고 있기에 하나님이 누구신가 바로 알지 못하면 한순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이 어느 날 신학교 교수님이 쓰신 책을 읽고 시험에 들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영감으로 주신 말씀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한 짜깁기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을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데,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른 제사장파의 문서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른 다른 무리의 문서를 섞었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19세기 자유주의 학파의 주장으로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사람에게 혼선을 주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강력한 권능을 가지신 분으로 강조할 때는 엘로힘, 하나님이라고 했고, 언약을 지키시는 분임을 강조할 때는 여호와라고 쓴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그 학생은 이미 거짓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기적도 거짓이고 하나님 이야기도 거짓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시각에서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신비한 책입니다. 1,500년 동안 60여명의 저자가 쓴 책이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완벽하여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서로 어긋남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그 믿음이 커집니다. 잘못된 영향력을 계속 들으며 따라가다 보면 믿음의 싸움에서 실패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바울은 24절에 무엇을 선포하나요?
[24a]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
하나님이 창조자이심을 이야기를 하고 그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시라고 합니다. ‘주재’는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땅의 신이 하늘을 낳고 바다를 낳고 서로 낳으며 세상이 혼돈 속에서 우연히 발생되었다고 말합니다. 통치도 하나의 강력한 신에게 있지 않고 신들은 끊임없이 싸우고 쟁취하다가 그 균형이 깨지면 폭풍우, 태풍, 지진 등이 나타나 세상은 신들의 전쟁터 가운데 불안하게 놓여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이 ‘통치자’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창조하신다는 사실은 중요한 신학적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우리를 만드셨음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우연한 존재일 뿐입니다. 진화론에서 주장하듯 우리가 우연히 왔다 우연히 사라지는 존재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한 명 한 명을 만드셨고 아신다면 우리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잃은 양을 찾으시고, 엄마는 자식을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며, 무엇보다 우리의 주권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지 못할 때 신앙적 문제들이 생깁니다. 저도 믿음이 없을 때 항상 문제가 생긴 지점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통치하신다면 왜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그러니까 뭔가를 만들어냅니다. 내가 무언가를 안 했기 때문에 축복을 안 주시나? 무언가를 하면 기뻐하실까? 이것이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지는 기복적이고 율법적인 태도입니다.
저도 복음을 몰랐으니까 기도도 열심히 해보고 노력을 했는데 열심을 낼수록 피곤하고 고통스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주실 수 있는 가장 놀랍고 귀한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신다고 느끼나요?
하나님은 우리 여정 중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있을 때 개입하십니다. 영적 성장과 관계가 있다면 개입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도 영적 성장과도 관계없이 내가 원하는 일만 이루어지길 원하니까 하나님 개입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고통이 끝나기만을 열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영적 성장을 위해 고통이 꼭 필요하기에 허락하십니다. 왜 고통이 집요하게 계속되는가 하면 집요한 고통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상황에서 스토아 학파처럼 내 절제와 훈련으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연약하고 예민하고 온전하지 못한 영혼을 성숙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무엇을 하시나요? 25절 하반절을 보시면
[25b] …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하나님은 믿는 자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태양은 지구를 향해 빛을 주고, 물이 계속 생성되고, 공기가 일정한 비율로 유지되는 이 질서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지구상의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연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도 사랑에 대한 열망, 긍휼에 대한 간절함, 질서에 대한 공의 등이 남아 있어서 세상이 지옥처럼 달려가지 않고 어느 정도 질서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에 보편적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세상에 한계를 정하심으로 하나님이 통치자이심을 보여주십니다. 26절입니다.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 사람이 살고 유라시아에는 유라시아 사람들이 살고 어떤 민족이 얼마큼의 영향력으로 언제까지 번성하다가 사라지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한계와 통치의 결과인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하시나요? 27절 보시면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은혜를 베푸시고 한계를 정하셔서 하나님이 통치자이심을 보이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개입하시는 결과입니다. 세상을 향한 보편적 은혜도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은혜와 개입은 훨씬 선명하고 집약적입니다.
성도들도 사실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남보다 똑똑하거나, 건강하거나, 사업 수완이 좋거나, 예체능 재능이 있는 것 등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지만 그것도 개개인을 빚어나가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나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계에 부딪힐 때 우상 숭배적 경향으로 반응하면 ‘이 한계를 고쳐 주셔서 완벽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계를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통치자시고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혜로 저를 붙드셔 생명을 보존하여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완벽한 통치와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적 세상과 어떻게 싸워야 하나요?
2. 우상 숭배를 버리고 회개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vv.28-31
두 번째로 우상숭배적 세상과 어떻게 싸워야 하나요? 우상숭배를 버리고 회개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철학자들과 변론하며 바울은 당시 시인들의 시까지 인용합니다. 이 시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시는 아니지만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한 것입니다. 핵심은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데 아테네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29절입니다.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살고 있음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상만 잔뜩 만들어 그것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근원 안에서 자꾸 하나님을 대체하는 우상들을 찾아 나섭니다.
에피쿠로스적 경향이 강한 분은 돈만 있다면, 건강만 있다면, 이것만 있다면, 행복할 텐데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은혜를 주셨습니다. 한계도 주셨습니다. 받은 것에 감사하고 없는 것은 욕심내지 말아야 합니다. 스토아적 경향이 강한 분은 내가 노력하고 결심하면 다 잘 될 거야, 실패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추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적은 없습니다. 1년에 세 번씩 성전에 예배하러 갔음에도 문제는 늘 바알과 몰렉 같은 우상들을 동시에 섬겼다는 것입니다. 바알은 그들에게 쾌락을 약속했고 몰렉은 지금은 없는 절박한 것을 약속했습니다.
특히 몰렉 숭배는 질도 나쁘고 악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문 바로 밖에서 몰렉 숭배를 했습니다. 힌놈 집안의 아들들은 몰렉 숭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예루살렘 성문 바깥에 힌놈의 아들들이 몰래 숭배를 하던 장소를 이름하여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몰렉은 커다란 팔을 벌리고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고 구멍 안에는 불을 활활 태웁니다. 사람들은 몰렉의 팔 위로 자녀를 굴려서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자녀를 바치고 돈이나 건강이나 전쟁의 승리를 기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요시아 왕의 종교 개혁 때 이 장소에 쓰레기를 버리고 짐승의 사체를 불태워 쓰레기장으로 바꿔버렸고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에서는 계속 쓰레기 타는 연기가 올라왔습니다. 이 장소를 신약은 그대로 음역하여 게헨나라고 불렀습니다. 힌놈의 히읗, 니은 앞에 골짜기라는 뜻의 ‘게’를 붙여서 ‘게헨나’가 되었는데 이 헬라어를 한글 성경은 지옥이라고 번역합니다.
지옥이 즉 어디입니까? 심지어 자식까지 불태워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하는 존재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요즘은 7세 고시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정신과 의사의 말마따나 이것은 아이들을 향한 정서적 학대입니다. 내가 원하는 영광을 자녀를 통해 얻고 싶어서 불구덩이에 자녀를 집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흔들립니다. 그래서 바울이 무엇을 촉구하나요? 30절입니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인간은 우상 숭배적 경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마저 여기에 머물러 있다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서 계신가요? 멋진 집을 짓고 성공해서 남이 누리기 못하는 것을 누리며 풍요하게 살 거야라는 에피쿠로스적 사상으로 사시나요? 아니면 나는 이렇게 성공하고 이렇게 계획해서 이렇게 영향력을 미칠거야 라는 스토아적 사상으로 살고 계신가요? 우리가 왜 회개해야 하나요? 31절 보시면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세상의 우상숭배적인 영향력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살리신 십자가의 은혜 앞에 우상숭배를 내려놓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우상숭배를 십자가 앞에 회개하여 참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아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