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2]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23] 요셉 족속이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24] 탐정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의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 하매
[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르친지라 이에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 그 사람이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날까지 그곳의 이름이더라
제가 다녔던 대학교의 정문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서있었습니다. 어느 날 누가 이것을 도끼로 찍어버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반기독교 동아리들은 기독교인의 무지와 악행을 비난하고 전통 문화 보존을 옹호하는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고 이에 대자보 전쟁이 일었습니다.
의견이 분분한 와중에 학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새로 설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군가가 이것을 빨간 페인트로 칠한 것입니다. 이렇듯 미신적인 것을 없애는 것, 혹은 절에 가서 찬송을 부르며 스님들과 싸우는 것, 해외의 이슬람사원 주변의 ‘땅밟기’ 기도로 사원이 무너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영적 전쟁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영적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행동입니다. 천하대장군을 없애거나 불교를 없앤다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전쟁 이야기를 우리는 왜 배워야 하나요? 이는 목사, 선교사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영적 전쟁의 상황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며 영적 전쟁의 원리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 전쟁의 큰 유혹은 전쟁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입니다. 타협이 가장 치명적이며, 가장 큰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타협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나요?
1. 영적 전쟁을 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vv.22-26
그렇다면 영적으로 타협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나요? 첫 번째로 영적 전쟁을 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22절입니다.
[22]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사사기가 시작하고 1장 21절까지는 유다 지파가 선봉에 서서 여러 전쟁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22절에 와서야 다른 지파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요셉 지파입니다. 사실 요셉이라는 지파는 없고,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지파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이들이 같이 어떤 일을 했기 때문에 둘을 하나로 묶어서 요셉 가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전쟁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힘이 강한지, 보급을 갖추었는지, 좋은 무기가 있는지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의 여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많은 전쟁 이야기는 강력한 군대로 이룬 승리의 행렬을 보여주지 않고 이들이 하나님과 함께하였는가 또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는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으면 당연히 요셉 지파의 승리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어떤 일을 하나요? 23절입니다.
[23]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전쟁을 하면 당연히 정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은 야곱이 루스라는 지역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하고 붙인 이름입니다. 세상의 이름은 루스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이었기에 그 곳을 반드시 점령해야하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탐 중에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24절입니다.
[24]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성에 입구가 없을 수가 있나요? 아닙니다. 모든 성은 정문을 가장 강력하게 방어하고, 화살 쏘기 쉽게 구멍도 많이 만들고, 접근하지 못하게 해자도 파놓습니다. 즉 정문으로 쳐들어가면 힘든 싸움을 해야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 있었기에 싸우면 되는데 힘든 싸움을 피하고자 정문이 아닌 비밀스러운 문, 즉 쉬운 길을 찾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선대하리라’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헤세드’로 언약으로 맺은 무한한 은혜 및 호의입니다. 즉 쉬운 길만 보장된다면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언약을 맺겠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정말 쉬운 길을 알려줍니다. 25절 상반절입니다.
[25a]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정문으로 갔으면 훨씬 힘들었을 싸움을 칼로 쉽게 점령했습니다만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5절 하반절과 26절입니다.
[25b] …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읍을 점령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단순히 땅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확장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나안은 어느 지역보다 강력한 우상 숭배의 근원지였습니다. 가나안에서 시작된 바알 숭배가 모든 세계에 퍼져나갔고 사람들은 바알을 음란하게 숭배하며 악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민수기나 신명기에는 아이들과 같이 읽기 부담스러운 부분들이 나옵니다. 한 장 전체가 하체를 범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거기 나열되는 모든 관계는 한 남자가 여자와 맺을 수 있는 모든 관계입니다. 즉 딸, 이모, 배다른 어머니 등 한 남자가 관계된 모든 여자들을 성적 욕구를 위한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파괴되어 마귀에게 매인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하라고 하셨는데 루스의 족장과 같은 자를 살려줌으로 루스 땅을 점령한 것이 소용이 없어져버렸습니다. 다른 곳에 또 하나의 루스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쉬운 길로 얻은 승리는 하나마나한 싸움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도의 인생에도 이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영적 싸움을 하나요? 예전의 목사님들은 이 대상을 찾아내기 위해 창녀촌, 마약소굴 등을 예시로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영적 전쟁의 본질은 하나님의 기업을 방해하는 모든 어둠과 대적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우리는 늘 무슨 유혹을 받나요?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니까 자꾸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도움을 줄 힘을 원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끊임없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힘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이는 힘, 돈, 권력이 훨씬 매력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또한 마귀는 하나님의 통치 대신 주인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매일의 선택들 또한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 마음의 싸움의 주체가 되는 대상들을 에베소서 2장 2절과 3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엡 2:2-3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세상의 풍속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며 문화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는 마귀입니다. 세상의 풍속과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유혹하는 대로 유혹 받는 우리 육체의 욕심이 바로 전쟁의 주체입니다. 밖에 있는 것과 싸우라면 적이 명확해서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마음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협하고자 하고 쉬운 길을 걷고 싶어 합니다. 매 맞은 바울보다는 이삭처럼 부자 되고 요셉처럼 총리가 되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서 편안하고 고난은 적게 겪으면서 영적으로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개인마다 이 싸움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를 처음 믿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지는 않습니다. 초신자에게는 주일에 예배하러 오는 것도 어쩌면 영적 전쟁입니다. 잠과 약속과 유혹을 이기고 출석하는 자체가 결단이자 은혜입니다. 헌금으로 어려워하는 부분도 역시 영적 싸움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넘치게 헌금하셔서 저희 교회가 여태까지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절기마다 어려운 교회나 사역자들께 풍성히 흘려보낼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도 신앙 가운데 타협을 합니다. 지금은 십일조를 안 하지만 나중에 돈이 많아지면 하겠다고 타협합니다. 그러나 돈은 크기가 커질수록 힘이 세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딱 적당한 만큼 주고 계십니다. 돈이 많아질수록 돈의 힘이 주인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기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기업을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의존해야 되는데 하나님만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돈에는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에 이제 돈의 크기만큼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도 점점 커지기 마련입니다. 결국 준비 안 된 자에게 돈이 많아지면 그 인생이 파괴됩니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해서 우리에게 헌금을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이 싸움을 거치며 승리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작은 돈을 의존의 수단으로 삼는 내 중심이 변하지 않고는 인생 내내 돈이 여러분을 끌고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헌금의 과정에서도 우리는 영적 전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쉬운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쉽게 살고 영적 전쟁도 승리하고 싶어 하지만 이런 길은 없습니다. 세상의 강력한 힘으로 마귀가 유혹하고, 본질의 욕망을 싸워야 합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기업과 통치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영적으로 타협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나요?
2. 악의 영향력이 확산됩니다. vv.27-36
두 번째로 영적으로 타협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나요? 악의 영향력이 확산됩니다. 27절 상반 절입니다.
[27a] 므낫세가 …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
한 절만 읽었지만, 이곳부터 마지막 절까지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구절이 지파마다 반복됩니다. 왜 쫓아내지 못했을까요?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싸워서 쫓아내기보다 중간에 타협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27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27b] …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결심하고’는 원문에는 없는데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잘 번역한 표현입니다. 그들이 의지를 발휘해서 계속 살기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왜 결심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필사적으로 몰아냈으면 도저히 결딜 수 없었을 텐데 그들을 보니 눌러앉을 수 있겠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8절입니다.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사실 수백 년 중 이스라엘이 강성한 적이 몇 번 없습니다. 사사들이 통치하는 잠깐 동안 이스라엘이 강성해지면 가나안인들을 부릴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들의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산 것입니다. 더 비참한 일은 34절입니다.
[34]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심지어 아모리 사람들은 물도 있고 곡식도 키울 수 있는 골짜기를 차지하고 단 지파를 아무 것도 없는 산꼭대기로 쫓았습니다. 타협하고 싸우지 않았더니 나중에는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살지 못하고 오히려 도망자처럼 떠나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에 수차례 명령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20장 16절과 17절입니다.
신 20:16-17 [1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어떤 사람은 구약을 읽으며 진멸하는 하나님을 무섭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나안 족속을 통해 영적 전쟁의 측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 진멸하라고 하셨나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악의 뿌리가 곳곳에 있는 채로는 절대 하나님 나라가 확정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있어도 안 됩니다. 식빵에 곰팡이나 감자에 싹은 그것만 잘라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뿌리가 길게 뻗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저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한 그것이 결국 전부를 집어삼켜 버립니다. 두 번째의 이유가 2장 11절과 12절입니다.
2:11-12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바알은 비를 내리는 신입니다. 사람들은 바알이 아내 아세라와 부부관계를 하면 비가 내린다는 것과 이들이 사람들의 성관계를 보아야 성욕이 동한다는 신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바알 신전과 아세라 신전을 세우고 초경을 마친 여자들과 남자들이 집단으로 성행위를 하게 했습니다. 여기에는 부자 되고 싶은 인간의 욕구와 성적 쾌락을 동시에 채우려는 무서운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바알 숭배가 전 지역으로 확산된 것입니다. 지금도 바알 숭배는 세상에 팽배합니다. 좋은 거 먹고, 좋은 데 살고, 좋은 차 타고, 모든 것을 누리는 삶. 무슨 삶인가요? 부자되고 쾌락을 만족시키는 삶입니다. 성도들도 그래서 자주 바알숭배에 넘어갑니다.
예전에 한 제자가 찾아 온 적이 있습니다. 대학교 때부터 열심이 특심해서 삶의 목표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였습니다. 회사에 들어가면서 모범을 보이고 성공할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영업을 하게 됐는데 예수 믿는 사람으로 주일마다 있는 골프모임과 술을 거절하자 영업이 쉽지 않아졌습니다.
하도 상사에게 욕을 먹자 중간에 목표를 수정하기로 했답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했는데 앞 부분을 빼버리고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로 목표를 바꾸었더니 처음엔 훨씬 쉬웠다고 합니다. 후발주자인 만큼 남들보다 더 많이 마시고, 더 열심히 골프치며 만회했는데도 항상 뒤처지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한 것이 뭐가 문제일지 궁금하다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제가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맞냐’는 질문부터 시작을 했는데 ‘그럼 틀린가요?’라는 첫 대답부터 대화가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직장, 높은 직급, 성공에 하나님은 관심이 없으시다고 말해주었지만 그 날 이후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아직도 갈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단순히 술 마신 것이 문제일까요? 주일에 골프친 것이 문제인가요? 아닙니다. 그 전에 이미 성공해야 한다는 세상의 소리에 넘어져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기뻐하시나요?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믿는 것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성공하고 이름을 알리고, 부자 되고자 하는 본질 안에는 하나님 없이도 세상을 잘 살고 싶은, 내가 내 마음대로 세상을 살고 싶은 죄악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열심을 부리면 하나님도 축복하셔서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게 도와주실 것이라고 타협합니다. 이것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패배한 것입니다. 싸움의 시작은 거짓된 욕망을 분별하고 세상이 만든, 아니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팽배한 거짓을 분별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세상의 높은 자리에 가는 것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 자녀가 좋은 학교 가지 못해도 슬퍼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있고, 돈을 잘 버는 사람도 있고, 몸이 건강한 사람도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시는 은사대로, 우리는 인생에서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아 하나님만 의존하여 그 분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며 이 싸움에서 승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