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 그러므로 그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자녀를 키운 부모라면 누구나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부푼 기대로 시작을 하지만 체력적으로 지치고, 왜 아픈 건지, 왜 우는 건지 지식적 한계를 느낍니다. 아이가 커갈수록 반항하는 아이를 품고 사랑할 수 없는 감정의 한계를 느끼고 나중에는 아이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권위의 한계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부모 자식의 관계로 자주 비유합니다. 이 두 관계의 한 가지 유사점은 ‘언약’일 것입니다. 언약은 생명을 걸고 맺는 약속입니다. 마치 자식이 말을 안 듣는다고 부모가 자식을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을 ‘훈육’하십니다. 부모도 자녀의 모난 부분들이 다듬어지도록 돕고 때로는 야단을 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는 하나님은 원하시는 일들을 한계 없이 행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언약과 훈육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해 오시면 인간은 절대로 저항하거나 반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성경은 이것을 ‘언약을 깨뜨린다’고 합니다. 언약은 영원한 관계이지만 언약에는 반드시 조건이 따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호하고 공급하며 인도하신다는 약속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인간은 어떤 반응을 해야 되나요?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 내내 인간은 절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수 없고 깨뜨리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면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의 언약을 깨트리면 어떻게 되나요?
1. 하나님이 말씀으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vv.1-2, 4-5
첫 번째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1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a]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구약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사람들이 모여 있는 보김에 왔나요? 길갈은 요단 강을 건너 처음 만난 도시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고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여호수아 4장 19절부터 20절입니다.
수 4:19-20 [19]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 치매 [20]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돌을 세워서 기념탑을 쌓았습니다. 그 이유가 이어지는 구절 23절부터 24절에 나옵니다.
수 4:23-24 [2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요단강은 40여 년 전의 홍해와 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홍해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통과할 수 없는 장벽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적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40년이 지나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태어났고 하나님은 요단강에서 똑같은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여 인도하는 하나님이니 너희는 나를 믿고 끝까지 의존하라’고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상기시켜 주는 돌을 길갈에 세우고 그곳에서 할례까지 행했습니다. 여호수아 5장 8절과 9절을 보시면
수 5:8-9 [8]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지금의 포경 수술은 위생의 관점에서 행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는 과거의 생명이 잘라졌음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남자의 전부이자 미래인 생식기를 전부 잘라낼 수 없으니 끝부분만 잘라낸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그 부분은 애굽에 속한 옛 사람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수백 년을 살며 애굽화되었습니다. 즉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 세상이 우상 숭배하는 모습을 닮게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의존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애굽에 동화되어 광야 내내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하고 육신적 탐욕을 채우고자 불평을 쏟아내었습니다.
부추, 파, 양파를 먹는 노예 상태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열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수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 첫 번째로 행하게 하신 일이 할례였던 것입니다. 세상에 메어 있는 모습을 잘라냄으로 하나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을 의존하고 세상의 노예된 데에서 자유를 얻은 자라는 사실을 길갈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갈의 메시지를 이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들이 지금은 어디에 서 있나요? 본문의 배경이 되는 보김입니다. 보김은 ‘우는 자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시면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 [5] 그러므로 그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
하나님의 백성이 울어서 보김이라고 이름 지었지만 이곳은 원래 벧엘입니다. 벧엘의 뜻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마치 예배드리러 교회에 모인 자들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우상숭배로부터 떠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질책한 것입니다.
장소만 벧엘이지 사람들의 본질은 여전히 애굽적인 삶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왜 다시 애굽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나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벌써 망각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절 하반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무엇을 이야기하나요?
[1b]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시간도 오래 흘렀고, 이것을 직접 경험했던 여호수아 이전의 세대가 다 죽어버렸기 때문에 ‘내가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워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겠다’는 약속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성도들도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성도가 받은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인가요? 옛날에 못 살다가 경제적으로 나아진 것인가요? 아닙니다. 세상에는 성도보다 훨씬 더 부유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성도가 얻은 가장 큰 축복은 우리 또한 세상에 매어 세상 사람처럼 마귀의 노예된 상태로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수치인 줄 몰랐었는데 그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만약 예수를 안 믿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저도 제 인생 가운데 좋았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제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입니다. 구원받은 것만 해도 감사한데 하나님이 누구신지 가르쳐주시고 복음을 알게 하신 것처럼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 없습니다. 내가 열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쫓아다닌 게 아니라 나는 늘 배신하고 죄 가운데 메어 있었는데 하나님이 저를 쫓아다니시며 우매한 저를 가르치시고 용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의 종으로 살다 죽을 자들을 하나님이 기적으로 구원하셔서 가나안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무엇인가요? 2절입니다.
[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인간은 세상의 영향을 받고 세상 사람과 언약을 맺으며 세상이 섬기는 우상을 쫓아갑니다. 인간은 왜 세상 사람과 언약을 맺을까요? 그들처럼 되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너희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처럼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우상숭배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유혹을 받았던 가장 강력한 우상이 바알입니다. 바알은 부처처럼 어떤 특정한 이름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뜻으로 지역마다 그들이 주님으로 섬기는 특정한 모습의 우상들이 존재했습니다. 이들을 왜 주인이라고 불렀을까요? 주인의 말대로 따라가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도 똑같은 교훈을 고린도후서 6장 14절부터 16절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후 6:14-16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기 위해서는 벨리알이라고 하는 세상의 신과 세상에 믿지 않는 자들이 사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와 관계는 바알 숭배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물질이 강력한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질을 더 얻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오픈런이라는 단어를 들어 보셨나요? 상점이 문을 열 때 일등으로 물건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신발, 시계, 가방, 등을 사기 위해 수백 미터 줄을 섭니다. 또 그냥 물건을 산다고 표현하지 않고 지름신이 들렸다고 표현합니다. 나도 모르게 신에 들린 것처럼, 신이 나를 조종해서 사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이끌린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건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행복을 알지 못하니까 물질로 자기 영혼을 채워 일시적 만족을 추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신발 천 켤레를 집어넣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쾌락의 특징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한계 효용의 법칙에 따라 이전에는 좋았던 것들은 점점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되고 자극은 점점 세져야 합니다.
결국 세상의 시스템에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그것이 인생과 영혼을 지배할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물건 뿐 아니라 먹는 것, 사진 찍는 것, 여행이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이 맛있는 거 먹고, 남이 안 해 본 것 하고, 다른 나라 가서 새로운 거 보는 것 등의 일시적 쾌락을 얻기 위해 인생을 채우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진짜 목적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삶으로, 내게 주신 기회로, 내가 섬겨야 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여기서 떠나가고 벗어난 많은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울어야 될 때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이런 얘기를 했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나요? 4절과 5절입니다.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5] 그러므로 그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초기이고 아직 환란이 시작되기 전이라 마음이 강퍅하지 않아서 말씀을 듣고 울었습니다. 아직 다행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말씀에 반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죠.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행하시나요?
하나님의 언약을 깨트리면 어떻게 되나요?
2. 하나님이 세상을 가시와 올무로 사용하십니다. v.3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면 두 번째로 하나님이 세상을 가시와 올무로 사용하십니다. 3절입니다.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가시는 찔리게 하는 것입니다. 올무는 원래 짐승을 잡을 때 쓰는 도구로 한 번 메이면 벗어날 수가 없이 노예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세상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셔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우상숭배에서 떠나가지 못하는 자들에게 세상이 가시가 되고 세상이 올무가 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힘들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얘기하는 구원은 세상의 어려움으로부터 건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생 내내 어려움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의 기업을 얻는 것입니다. 애굽에 살 때는 우리도 눈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기업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 내가 세상에서 어떤 존재이냐는 여호와를 기업으로 삼은 자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의존의 중심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된 구원은 무엇인가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확장되는 것 즉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구원은, 아프지 않고, 가난하지 않고, 아무한테도 손 벌리지 않고 혼자 알아서 해낼 수 있는 삶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우리의 구원이 너무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말고 내 마음대로 살기를 원하기에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스스로를 고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 하나요?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시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세상에 대한 의존이 스스로를 찌르게 만듭니다. 돈이 많다고 걱정이 없나요? 돈이 많으면 그 돈을 노리는 자들로부터 어떻게 지켜야 할지 걱정에 몸부림을 칩니다. 돈이 많은 가정에서는 서로를 돈으로 재단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집은 돈에서 자유한가요? 사소한 액수로 서로 원망하고 다투는 비참한 모습은 마찬가지입니다. 돈의 액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은 뻥 뚫린 무저갱 같아서 늘 비교하며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기 안정을 삼고자 하는데 그 욕심을 채울 만큼 충만한 물질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때로는 가시로 때로는 올무로 우리 인생에 개입하셔서 우리가 꿈꾸는 구원을 박살내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주고자 하십니다.
주식, 코인, 운세, 타로 점 등은 우리가 그려놓은 미래가 불안해서 안전을 보장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질 즉 가나안적 삶입니다. 우리는 가시와 올무로부터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하지만 사사기 끝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케 되어 하나님만을 섬기게 되었나요? 아닙니다. 끊임없는 죄의 반복은 점점 심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을 깨뜨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가시로 찌르셨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시고 손과 발에 가시보다 크고 강력한 못을 박으셨습니다. 올무로 메인 것처럼 십자가에 매달아 언약을 깨뜨린 자들이 당해야 할 죽음의 형벌을 예수에게 전가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상숭배로 걸려 넘어지고 고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우리의 본질이고 옛사람의 근원입니다. 한 몫 잡고 싶은 열망은 모두 안에서 꿈틀댑니다. 어떤 사람은 소심해서 시도를 못해볼 뿐이고 어떤 사람은 열정적으로 시도하는 것입니다. 불안한 미래를 타개해보고자 무엇이라도 의존하려는 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애굽의 행위인가를 깨달으실 때마다 다시 십자가 앞에 나아가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