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1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2]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13]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1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16] 에훗이 길이가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17]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매우 비둔한 자였더라
사람은 살면서 실수와 잘못을 반복합니다. 다시는 같은 잘못을 하지 말아야지 결심하지만 결국 같은 일들을 하게 됩니다. 왜인가요? 행동하고 말하는 이면에 인간의 본질에서부터 미치는 영향력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본질이 바뀌지 않으면 평생 같은 반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 상반절에도 이와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12a]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
‘또’라는 단어는 사사기에 반복됩니다. 3장 앞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여 고통하다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셔서 구원받은 경험이 있는데 그들은 또 악을 행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은 받았지만 옛사람의 본성 자체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상황이 조금만 바뀌면 본성이 다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복하여 잘못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멸하시지 않고 이 상황들을 허락하십니다. 12절 하반절입니다.
[12b] …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하나님이 상황을 바꾸어 버리십니다. 주변에 있던 족속이 어느 날 갑자기 강성해지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이 고통하게 됩니다. 성도의 인생에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의 상황이 갑자기 변해 고통하는 경우가 전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변화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이런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이때 도구로 사용된 모압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창세기 19장 36절과 37절을 보시면
창 19:36-37 [36]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37]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세상이 너무 좋아서 소돔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승승장구하다 나중에는 장로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소돔이 심판을 당하자 구원은 받았지만 토굴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의 딸들은 소돔에 완전히 물들어서 세상 사람들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아버지와 동침을 했고 그렇게 생긴 첫 번째 아이가 바로 모압의 조상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나요? 하나님의 백성인데 세상 사람처럼 되어버린 자, 하나님을 버린 자,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자에게서 난 파멸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 대해 뭐라고 말씀을 하시나요? 신명기 23장 3절입니다.
신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근원은 하나님 백성이었으나 세상에 들어가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뒤 세상의 문화를 받아들여 아버지와 동침하여 낳은 아이들은 하나님 백성의 순수함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했더니 심지어 이런 이질적이고 문제가 많은 족속에게조차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이들에 대해 13절과 14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3]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1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모압은 이스라엘 북 동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거기서부터 세력을 키워 이스라엘 중심부, 종려나무 성읍, 곧 여리고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가나안의 여리고는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땅인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여리고를 점령함으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백성처럼 살지 못하자 그 중심부를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외압이 이렇게 길지 않았습니다. 3장 8절입니다.
[8] …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을 섬겼더니
근데 지금 에글론 밑에서는 두 배도 넘는 기간인 18년을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본질 자체가 바뀌지 않자 상황적 고통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시나요?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시나요?
1.가장 약한 자를 통해 구원하십니다. vv.15-17, 27-29
첫 번째로 가장 약한 자를 통해 구원하십니다. 15절 상반절입니다.
[15a]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
사사기에 또 반복되는 구절입니다. 언제 하나님께 부르짖나요? 고통이 너무 심할 때, 내 힘과 경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입니다. 부르짖음이라는 인간의 반응 안에 사실은 깨어지고 상한 마음이 있습니다. 인간은 해결 가능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인간적 자존심과 능력이 다 깨어진 상황을 성경은 ‘상하고 통회’하다고 합니다. 시편 51편 17절입니다.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원래 내가 주인이 되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통이 찾아와서 한계에 도달하게 될 때 마음이 무너져 내리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갖게 됩니다. 성경에서 이 마음을 다른 말로는 ‘가난한 마음, 가난한 심령’이라고 부릅니다. 사사기 66장 2절을 보시면
사 66:2 …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가난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이 같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마음이 결국 겸손한 마음입니다. 내 스스로, 내 힘으로, 내 의지로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시는 목적인 것입니다. 한두 번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어 항상 가난한 마음을 갖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마음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마태복음 5장 3절입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가난하고 겸손해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내가 주인인데 하나님이 통치가 임하면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우리 마음이 준비되기 원하십니다.
마음이 준비되어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로 선 사람인 에훗에 대해 15절 중반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15b] …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한글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어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훗은 베냐민 지파 사람인데 베냐민의 뜻은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구약에서 오른손은 강력한 힘입니다. 오른손이 중요하고 왼손은 중요하지 않으니 베냐민은 즉 ‘오른손의 강한 힘을 가진 자’입니다.
이런 배경 위에 에훗이 등장하는데 에훗은 왼손잡이입니다. 한글로는 의미적으로 번역을 한 것이지만 히브리어로 읽으면 ‘오른손이 불구인 에훗’입니다. 태어날 때 불구였는지, 사고를 당했는지, 지금 오른손에 문제가 있어서 왼손만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글로는 왼손잡이라고 번역을 해버렸지만 히브리어로 이 문장을 읽으면 ‘오른손이 강한 자인 베냐민 지파에 속한 오른손을 못 쓰는 불구 에훗’이라는 소개입니다. 이런 자가 모압 왕 에글론과 싸워 이기는 구원자가 될 수 수 있을까요? 15절 하반절에 힌트가 나옵니다.
[15c] …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에훗은 누구나 꺼릴 만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세금을 모아 외국 왕에게 바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에훗’의 이름 뜻이 ‘여호와의 영광이 어디 있느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세상의 어둠을 보며,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면 이렇게 어둡고 고통스럽지 않을 텐데’ 생각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입니다.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족의 피와 눈물을 거만한 압제자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아마 그 마음에,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사실 이 거사에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왼손으로 겨우 살아가는 불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구원을 베풀기 위해 어떤 일을 행하나요? 16절과 17절입니다.
[16] 에훗이 길이가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17]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매우 비둔한 자였더라
고대에 비둔한, 뚱뚱한 사람은 주로 부자들이었습니다. 에글론이 뚱뚱하다라고 성경이 일부러 이야기한 것은 뒤에 나오는 상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힘과 권세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줍니다. 에홋은 오른쪽 허벅다리에 칼을 숨기고 에글론에게 다가갑니다. 일반 사람이었으면 암살을 예방하고자 몸수색을 했겠지만 에훗은 장애인이라 칼을 들키지 않습니다.
가장 약한 자처럼 보이는 에훗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왜 성경은 약한 자를 등장시키나요? 앞으로 우리들을 구원할 분이 얼마나 구원자처럼 보이지 않는지 미리 학습시키고자 함입니다. 성경은 그 분을 뭐라고 이야기하나요? 이사야 53장 2절과 3절입니다.
사 53:2-3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아마 예수님이 지금 오셔도 우리는 그분을 구원자로 믿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당한 대우도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좌우할 능력을 가지신 강력한 분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가장 약한 자로 오셨습니다.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셨고 시골 변방에서 자라 30세에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더 행복해지고 문제없도록 만들어주는 구원자를 열망하는 마음은 부자인 마음입니다. 내가 중심에 서고 싶고 원하는 대로 살기 원하는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를 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장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분의 인도하심이 맞다고 인정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상하고 가난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에글론의 18년의 억압 속에 마음이 낮아진 상태였습니다. 그 때 에훗이 나타나 구원을 행하자 그와 함께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게 됩니다. 에훗을 구원자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결과가 27절부터 29절입니다.
[27] 그가 이르러서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 [28] 무리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 사람을 너희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서 모압 맞은편 요단강 나루를 잡아 지켜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29] 그 때에 모압 사람 일만 명 가량을 죽였으니 다 역사요 용사라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였더라
아마 이전에는 에훗을 무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18년이나 고통당하다 에훗이 나를 따르라고 할 때, 자신을 의지할 수 없어서 순전히 따랐더니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함께 이루어내었습니다. 결국 고통이 무엇을 만들어냈나요? 약해 보이는 구원자를 의지하는 마음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들이 항상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며 수많은 문제와 약점들을 경험하지만 돌아보면 인생의 가장 큰 약점으로 인해 오히려 예수님을 만났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세상적으로 약한 과정을 통해 상한 마음을 가지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붙드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존재 자체가 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했던 일은 늘 세상 우상을 붙들어 자기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자꾸 약한 자리로 몰아넣으십니다. 그곳에서 예수를 붙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연약함을 가지고 계신가요? 이 사람, 이 상황만 없으면 나는 더 잘 살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시나요? 바로 그 약하고 어려운 부분 때문에 여러분은 상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시나요?
2. 제물의 죽음을 통해 구원하십니다. vv.18-26, 30
두 번째로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시나요? 제물의 죽음을 통해 구원하십니다. 에훗이 에글론을 죽인 이야기가 18절과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18] 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19]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려 하나이다 하니 왕이 명령하여 조용히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에글론은 아주 큰 자였습니다. 비밀스러운 일을 전달하겠다고 따로 남은 불구자가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에훗의 전략은 20절에서 22절까지 이어집니다.
[20] 에훗이 그에게로 들어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이르되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의 좌석에서 일어나니 [21] 에훗이 왼손을 뻗쳐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22]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의 몸에서 빼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겼더라
이것은 수천 년 전 이야기입니다. 지금과 같은 날카로운 칼이 아니라 청동기 시대입니다. 뚱뚱하고 큰 사람을 얼마나 세게 찔렀는지 칼자루가 등뒤로 삐져 나올만큼 칼이 들어가 버렸습니다. 청동으로 만든 칼로 찔렀는데 자루까지 쑥 들어갈 정도로 깊이 박은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대지가 무엇인가요? 제물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제물이 누구인가요? 에글론입니다.
에글론의 뜻은 황소입니다. 어떤 황소인가요? 비둔한 황소. 제물로 드릴 황소는 삐쩍 마른 황소를 쓰지 않습니다. 살 찌고 건강한 황소를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제물에서 꼭 필요한 것이 기름입니다. 기름이라는 단어는 레위기에 수십 번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되는 아주 중요한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3장 9절을 보시면
레 3:9 그는 그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그 기름 곧 미려골에서 벤바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힌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하나님께 기름을 태워서 바치면 이것이 향기로운 제사가 됩니다. 지금 에글론을 찔렀더니 배에서 지방이 삐져나오고 있습니다. 제단에서 죽임을 당한 살찐 황소로부터 기름이 나오는 그림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기름이 칼날에 엉켰더라’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한 구절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원문에는 ‘기름과 똥이 함께 쏟아져 나와 엉겼더라’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칼이 내장을 다 지나 등으로 나왔으니 처음에는 기름이 나오다가 똥도 같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제물을 바칠 때 꼭 중요한 과정은 제물을 해체해서 배설물을 분리해 내는 것입니다. 에글론의 몸에서 똥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냄새가 얼마나 심한지 에글론의 부하들은 왕이 대변을 보는 줄 알고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습니다. 24절입니다.
[24] 에훗이 나간 후에 왕의 신하들이 들어와서 다락문들이 잠겼음을 보고 이르되 왕이 분명히 서늘한 방에서 그의 발을 가리우신다 하고
발을 가리운다는 것은 긴 옷을 입고 쪼그려 앉으면 발이 가려지면서 화장실을 쓸 수 있는 상황이 됩니다. 그만큼 냄새가 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몸에서 변이 나오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이것 역시 제물을 바칠 때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9장 14절입니다.
출 29:14 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을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
물론 에글론을 불태워 사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살진 황소’가 죽임을 당해 ‘기름’과 ‘똥’이 배출되는 모습은 제단에 제물이 죽임당하는 그림입니다. 왜 성경은 에훗이 에글론을 죽여 구원을 얻는 과정을 제사처럼 묘사하고 있나요? 에글론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시 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제물을 바치는 자가 제물과 동일시되어야 합니다. 죄로 인해 누군가 제물로 바쳐져 죽어야 돼요. 어떤 존재인가요?
에글론의 비대함과 지방덩어리와 똥 덩어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죄악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우상 숭배, 탐욕, 죄악은 영혼의 기름과 똥과 같았습니다. 희생 제물로 바쳐져 진짜 죽임을 당해야 될 존재는 원래 이스라엘입니다. 에글론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다 이런 존재입니다. 영혼에는 지방이 가득하고 주위 사람들은 악취를 느낍니다. 화내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정죄하고 파괴하고자 하는 거짓말과 탐욕에 물든 인간의 존재. 죽임 당해 마땅한 에글론과 같은 더럽고 비둔한 영적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자기 안의 기름과 똥을 보지 못합니다. 남의 것만 탓합니다. 제물을 바치는 자는 제물과 자기가 동일시된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제물을 바쳐 희생을 드리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하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만이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꾸 우리가 에글론임을 보여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복해서 구원자가 필요하듯 우리는 오늘도 구원자가 필요하고 내일도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에글론임을 인정해야 됩니다. 내 영혼 안에 이렇게 더러운 기름과 똥이 가득함을 인정하고, 나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께 감사할 때 주변 사람의 실수도 용서하며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인간은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힘을 가지면 다른 존재를 휘어잡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며 힘과 권세를 행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본질에서부터 회복시키십니다. 이 은혜가 회복되어야 에글론 같은 우리에게 예수의 은혜와 통치가 임하며 본문 30절의 결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30]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하나님은 우리의 더럽고 추한 영혼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해 진정한 평화를 누리길 원하십니다. 이 평화를 누리기 위해, 상한 심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통치를 간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