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2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 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이방 하로셋에 거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병거 구백 승이 있어서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은 가나안의 풍요를 뜻합니다. 민수기 13장 27절입니다.
민 13:27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황량한 광야입니다. 물이 없으니 갈릴리 호수 등의 곳에서 물을 대어다 소수의 땅에 집중적으로 관개 농사를 짓고 있지만, 고대의 가나안 땅은 지금과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자도 살고, 이리도 살고, 많은 들짐승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단순히 환경이 좋은 땅을 주시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훨씬 더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상황적으로 풍성해도 이들이 당한 고통을 지나간다면,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를 보시면
[1]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 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이방 하로셋에 거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병거 구백 승이 있어서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좋은 환경에서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야빈이라는 가나안 왕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학대’는 ‘아주 좁은 공간에 몰아놓고 짓이겨 누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강력한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 민족에게 눌리고 짓이겨져서 기쁨과 평안을 다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가 되자 이들은 또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반복되는 이야기를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나요? 많은 목사님들이 사사기를 설교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충분히,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개할 때까지 고통이 반복된 것이라고들 설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더 깊이 회개하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행위를 열심히 해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이루어 낼 수 없는 영적이고 깊은 부분들을 하나님이 직접 이루어 나가십니다.
한국만 보아도 과거와 비교해 상황적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환경이지만 정신적으로 지옥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영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상태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 수 있나요?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 수 있나요?
1.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vv.6-16
첫 번째로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6절과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6] 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드보라는 굉장히 용감한 믿음의 사람처럼 보입니다. 바락은 어떤가요? 드보라의 명령에 남자답게, 장군답게 행동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8절에 바락의 답변입니다.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드보라는 평소에 전쟁을 하거나 군대를 이끌던 장군이 아닙니다. 여선지자로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재판하던 사람입니다. 바락은 군대 장관으로 전쟁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드보라가 리더십이 있는 남자같고, 바락은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는 어린아이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히브리서 11장 32절에 믿음의 사람으로 언급된 것은 드보라가 아닌 바락입니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사사기에서 믿음의 사람을 하나 고른다면 드보라일 것 같은데 히브리서는 왜 바락을 언급할까요? 우리는 흔히 ‘믿음’을 용기를 내어 남들은 할 수 없는 일을 용맹하게 해 내는 행동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은사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입니다. 그 의존의 과정에서는 바락처럼 얼마든지 두려워하고 떨 수 있습니다. 드보라가 믿음의 사람으로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락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구원자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붙드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형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락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13절입니다.
[13] 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병거 구백 승과 자기와 함께 있는 온 군사를 이방 하로셋에서부터 기손 강으로 모은지라
당시의 철병거는 현대의 탱크와 같은 것입니다. 6.25때 남한에는 없던 탱크가 북한에 240대나 있었고 그 기세로 북한은 남한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던 것입니다. 바락이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어떻게 해도 대적할 수 없어서 이십년 동안 고통하며 끌려다녔는데 그 두려움 가운데도 ‘당신이 가면 내가 따르겠습니다’라는 반응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하나도 두렵지 않고 용맹스럽게 나가는 행동’이 아닌, ‘두렵고 힘들고 못할 것 같아도 하나님을 붙들고 가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바락은 드보라 뒤를 따른다고 했기에 그에게 적장을 죽이는 영광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9절입니다.
[9]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것임이니라 …
장군에게는 적장의 머리를 베는 공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통해서도 모든 승리의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돌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싸움을 잘하고 승리해도 그것이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나의 능력인 것처럼 생각해서 하나를 이루고 나면 그것을 마치 자기 영광처럼 누리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자, 하나님을 붙들지 않으면 안 되는 자, 나약한 자의 자리에 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우리를 여자라고 부릅니다.
물론 요즘은 드센 여자도 많고 인권에 대한 논의도 많지만, 고대에 여자의 위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자는 사람 수에도 들어가지 못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숫자에는 여자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아버지나 남편에게 부속된 존재였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뭘 보여주시고자 했나요? 하나님 백성이 마치 여자처럼 오직 하나님에게 부속되고 예수의 말씀에 의존해 살아가는 존재이며, 고대에 남편이 없는 과부가 가장 불쌍한 여자였듯 우리 역시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존재 의미가 없는 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락이 약한 여자 같지만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한 결과가 14절입니다.
[14]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이에 바락이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눈 앞에 철병거 900대를 상상해 보십시오. 현대로서도 엄청난 숫자입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가 서방에게 애걸복걸해서 얻어낸 탱크가 겨우 300대이고, 미국에게 받은 것은 몇십 대입니다. 천 대만 있으면 이길 수 있다고 했는데 탱크 천 대를 모으지 못했습니다. 탱크 천대를 가진 군대와 탱크 없는 군대가 대치한 상황에서 바락은 사람 1만 명만 데리고 내려갑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15절과 16절입니다.
[15] 여호와께서 바락의 앞에서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도보로 도망한지라 [16] 바락이 그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이방 하로셋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남은 자가 없었더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시스라의 군대를 때리신 것이 아니라, 기적 이면에 하나님이 특별하게 개입하신 자연 현상이 있었습니다. 5장 21절을 보시면
5:21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다볼산이라는 곳에 이스라엘 군대가 모여 있고 산 아래에 이스라엘 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 평야에 기손강이 흐르는데 건기에는 강이 말라 평야처럼 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의 날에 하나님이 폭우를 쏟아부으신 것입니다. 광야 지대에 폭우가 내리면 갑자기 엄청 큰 강이 생겨버립니다. 병거가 진흙밭에 묻혀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실 바락의 이름 뜻이 번개입니다. 하늘에서 비바람이 내려치고 번개가 내려치며, 하나님이 바락을 이름에 맞는 역할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원수가 종종 우리를 학대하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돈이, 건강이, 사람이 우리를 힘들게 해서 짓이겨져 죽을 것 같고, 이 상황을 이기지 못하는 내가 바락과 같은 겁쟁이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예수만을 믿는 믿음으로 싸움을 싸우기를 원하시기에 상황들을 허락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싸움은 인간적으로 싸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생마다 싸움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로 우리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시며 예수를 믿는 진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 수 있나요?
2. 예수님의 통치가 임해야 살 수 있습니다. vv.4-5, 17-24
두 번째로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 수 있나요? 예수님의 통치가 임해야 살 수 있습니다. 4절과 5절 말씀입니다.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성경에 나오는 사사들은 다 남자입니다. 그래서 드보라가 아주 특별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사사기의 배경은 한국으로 치면 고조선 시대입니다. 여자가 사사가 되었다는 상황은 하나님이 모든 남자들을 부정해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난 남자들이 아닌 가장 약한 것 같은 여자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삼으시고 그에게 재판자의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의 손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모형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드보라 뿐 아니라 다른 여인이 또 등장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17]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병거로 승산이 없자 시스라는 도보로 도망을 치다 야엘이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남편은 어디 갔는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닙니다. 11절 보시면
[11]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모세의 장인의 겐 족속 사람으로 이스라엘 족속과 떨어져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국가도 없고 뭉쳐 살지도 않았기 때문에 주변 모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고는 살수 없었습니다. 가나안 야빈과도 친분을 맺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협상을 한 상태입니다. 그런 우호적인 관계를 시스라도 잘 알고 있어서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18절입니다.
[18]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가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으니라
유목민들은 떠돌다가 누구와 적대되어서 만약 관계가 틀어져버리면 다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나그네와 이방인을 환대하는 전통이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망치는 시스라를 환대하는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환대는 19절에도 이어집니다.
[19]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게 하라 내가 목이 마르다 하매 우유 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게 하고 그를 덮으니
사력을 다해 걸어서 도망쳤으니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요? 목이 마르다고 하니 야엘이 우유를 내줍니다. 지금까지는 아주 좋습니다. 장막에 몰래 숨겨주고, 마실 것도 주고, 이불도 덮어주자, 마음이 편안해진 상태로 시스라가 잠이 듭니다. 21절입니다.
[21]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갑자기 공포 영화가 되어 버립니다. 아는 사람을 맞아주고, 먹여주고, 숨겨준 뒤, 관자놀이에 말뚝을 꽂다니— 유목민 여자들이 평소에 말뚝을 쳐서 장막을 치기 때문에 야엘 역시 충분히 그런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힘이 있다고 해도 왜 이런 일을 했을까요? 시스라를 해한 것은 언약을 깬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 왕이 유목민을 다 죽인대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엘은 알았습니다. 시스라가 도망친 것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며 승리를 주셨음을 알고 하나님 편에 선 것입니다. 무슨 예언이 성취된 것인가요? 9절입니다.
[9] …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
지금 여인들이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바락도 열심히 싸웠지만 가장 큰 영광을 야엘이 가져갑니다. 드보라와 야엘이 합작해서 여인들이 승리를 가져오는 이야기가 왜 성경에 기록되었을까요? ‘구원’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일부러 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통치와 원수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셔야 합니다. 죄와 욕망과 미련함이 우리를 지배해서 늘 문제가 생기는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원수들로부터’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시스라처럼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무너뜨릴 듯 위협하는 세상과 죽음과 마귀로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가장 약한 자처럼 보이는 여인들이 승리를 가져온 것처럼, 가장 약한 자처럼 오셔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원수를 머리를 꿰뚫으시며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 이것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젖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우리에게는 소의 우유가 익숙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소를 키우기가 쉽지 않아서 집마다 염소를 키워서 젖을 짰습니다. 본문의 야엘의 이름 뜻이 바로 암염소입니다. 이 암염소로부터 젖이 나온 것입니다. 또한 드보라의 이름 뜻은 꿀벌입니다. 꿀벌에서 꿀이 나오듯, 드보라는 이스라엘을 사사로 통치하면서 꿀을 공급한 것입니다.
야엘이 공급한 젖과 드보라가 공급한 꿀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을 모형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은 드보라가 통치한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면 야엘이 원수의 관자놀이를 꿰뚫어 죽인 것처럼 예수가 세상과 죽음과 마귀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통치를 이사야 11장 1, 4, 5절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 11:1, 4-5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새의 뿌리에서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모습으로 오신 분이 이런 통치를 행하실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놀라운 강력한 힘으로 통치하고, 막대기로 세상을 치시고, 악인을 죽이신다는데,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그렇지 않아 보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힘이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 막대기로 심판하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실 우리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아직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모든 악을 먼저 제거해 나가시며 언젠가 심판 때에 다시 오셔서 하나님 백성들은 구원하고, 멸망 받을 세상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통치로 우리 안의 악이 제거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모습을 이사야 11장 6절부터 8절은 비유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사 11:6-8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나님 나라에 동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자기가 세상의 왕인 것처럼 소리치는 사자 같은 사람들, 독기 있는 말을 내뿜어서 남을 마비시키는 독사 같은 사람들, 또 사랑하지 못하고, 마음에 안들면 깨물고, 내가 최고가 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우리들. 이런 존재들은 천국에 없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뱀처럼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이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도록,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통치하신다면 여러분 안에 있는 무서운 맹수와 같은 모습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내 말, 내 분노, 내 발톱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었을까? 그것을 깨닫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저는 못된 짐승으로 살다 죽을 존재인데 제 인생을 다스려주셔서 어린 양처럼 모든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세요’라고 기도하실 때, 가장 약한 것처럼 보이던 예수가 여러분을 다스리심을 경험하심으로 이 땅에서 젖과 꿀을 풍요하게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