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1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18]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 하니라
[19]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20]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죽음처럼 강력하고 불가피한 힘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 외에도 우리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파괴되거나 미래에 영향을 받을까봐 자주 두려워하게 됩니다. 두려움은 인간 안에 다양한 감정과 반응을 만들어냅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모호하면 이는 불안으로 확대됩니다. 사람이 불안하면 평안이 깨지고 긴장하고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커지면 그 사람에 대한 집착과 통제가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힘이 영향을 미쳐서 원치 않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사사건건 개입하고 막아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 과잉보호라는 악한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두려움과 불안이 많으면 소극적이 되고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책임을 떠넘기며 의심이 많아집니다. 결국 두려움이라는 감정 때문에 한 사람이 제대로 관계 맺거나 일상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이 두려움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스스로는 절대 두려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은 감정이 아니라 죄로 인한 욕망이 만들어낸 내적 반응이기에 죄가 해결되기 전에는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두려움은 무엇을 간절히 원해서 생기는 반대 감정인 것입니다.
또한 욕망은 우리 안의 근원적인 죄, 영적 공허함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결국 영적인 부분이 해결되지 않고는 인간은 욕망도 두려움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인생 자체를 통제하시는 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태도를 ‘두려움’이 아닌 ‘경외’라고 부릅니다. 원어나 영어에도 없는 한자어 ‘경외’는 아주 잘 번역된 단어입니다. 시편 2편 11절을 보시면
시 2: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이라는 완벽하고 강력하신 분을 진짜 알게 되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먼지는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인데 그분은 선하시며 사랑이 많은 분이십니다. 그분이 두렵지만 또 그분 앞에 서는 것이 한편으로는 너무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진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신 것을 경험한 사람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직관한 사람도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어떻게 되나요?
1. 소심한 의심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vv.17-24
첫 번째로 소심한 의심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기드온의 모든 반응은 그의 두려움이라는 맥락 안에서 보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드온은 지금 표징을 요구합니다. 두려움이 많아서 포도주 틀 안에서 몰래 타작하던 기도원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서 하신 말씀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2절입니다.
[12] …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또한 16절에서도
[16] …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자기 상황과 맞지 않는 호칭과 약속을 받자 소심한 사람에게 의심이 먼저 든 것이 당연합니다. 두려움이 기드온 삶의 전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가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11] …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포도주 틀의 타작은 단순한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기드온의 본질입니다. 모든 사람은 동전의 양면처럼 욕망과 두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욕망이 충천하고 두려움은 내면화되고, 또 어떤 사람은 두려움이 삶의 태도가 되고 욕망이 내면화되기도 합니다.
기질은 타고나는 것이라 소심한 아이에게 용맹해지라고 잔소리하거나 욕심이 많은 아이에게 양보하라고 잔소리해도 기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너무 현저한 기질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본인이 경험하며 조금씩 사회화될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미디안을 해치울 큰 용사’라는 엄청난 약속을 받아도 소심함 때문에 말씀을 의심합니다. 소심함 때문에 영적 장애물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 앞에 증거를 요구합니다. 게다 증거를 요구했으면 증거를 기다려야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18절입니다.
[18]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 하니라
증거를 달라고 해놓고 왜 예물을 갖고 온다고 할까요? 이것이 바로 기드온의 두려움을 이해해야 해결되는 구절입니다. 기드온은 의심이 들어 증거를 요구했지만 후환이 있을까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의심은 많아서 확실히 하고 싶으면서도 대가를 치르게 될까봐 추궁 받지 않으려는, 보완책으로 보험을 드는 것입니다. 소심한 사람은 나쁜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돌다리를 두드립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예물을 건성으로 준비하지 않습니다. 19절입니다.
[19]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염소 새끼 한 마리이지만, 미디안이 매일 침공해 싹쓸이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엄청난 예물입니다. 또한 한 에바는 22kg 정도로 이것으로 떡을 만들면 200-300인분은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소심한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이 만들었나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확실치 않아서 확답을 듣고 싶지만, 확실할 수도 있으니 최선을 다하는 보험인 것입니다. 20절입니다.
[20]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절대 불이 붙을 수 없는 상황이 구약의 다른 곳에도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갈멜 산에서 싸울 때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놓고 물을 네 번이나 길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도 지금 그렇게 한 것입니다. 국을 나무와 제물에 부어 불이 붙을 수 없게 만듦으로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증거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21절입니다.
[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국을 부어 축축해진 제물을 바위로부터 솟구친 불이 태워버리고 게다 여호와의 사자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 징표를 통해 보여주셨으니 이 징표를 요구했던 기드온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정말이구나. 나를 큰 용사라고 불러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구나.’라고 해야 하는데 기드온은 그렇지 않습니다. 21절입니다.
[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일이 없어서 이런 생각을 못하지만 고대에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사자를 직접 만나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라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해서 보여줬더니 기드온은 또 두려움에 슬퍼합니다. 두려움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굴레가 기드온의 본질입니다. 답답하고 구제불능인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23절에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생명의 주관자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기드온이 확신을 갖게 되자 이제까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기드온이 24절에서 이렇게 반응합니다.
[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제단의 이름은 왜 여호와 살롬이라고 붙였을까요?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불안하고 초조해서 인생에서 평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제야 평안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평화’라고 제단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께 영적 반응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소심한 의심으로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고,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벌을 주실까봐 행위에 집착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교정하고 벌주는 회초리 든 선생님이 아니라, 영혼의 근원적 죄를 해결해 주고자 하십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까지 율법과 기복에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두 경향 다 동기가 자신에게 있습니다. 규칙을 안 지키면 나한테 문제가 생길까봐 열심히 지키는 것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문제를 피하고자 하는 행위들을 나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소심함으로 말미암은 의심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물을 풍성히 드렸지만 증거를 보이라고 한 일로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한 마음은 예배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두려움에서 우리를 건지기 원하십니다.
복음은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다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원하는 무엇인가 주어지거나 주어지지 않아도 하나님만 두려워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소심한 기질로 태어난 분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소심함이 영적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기도하셔야 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경외함으로, 저를 주도하는 잘못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실 때 하나님은 참으로 두려워해야할 분이 누구신가 가르쳐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어떻게 되나요?
2.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vv.25-32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어떻게 되나요? 두 번째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25절, 26절 말씀입니다.
[25]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기드온의 아버지는 지역의 족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족장 집에 바알과 아세라 상을 만들고 마을 사람들이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을을 대표해서 만든 것들을 깨부수고 아버지의 소를 찍어 죽여야 하는 상황입니다. 소심한 사람이 이 명령을 받들 수 있었을까요? 27절입니다.
[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두려움이 없어졌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저도 어릴 때 소심해서 일이 확실하지 않으면 하고 싶지 않고, 확실해도 선뜻 나서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기도 많이 하고 성숙하면 기질이 바뀐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기질 자체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말씀에 대해 반응하는 태도입니다.
성숙했다는 것은, 두려움이 여전히 있지만 두려워도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적 변화입니다. 근원적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수 있는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아침에 드러납니다. 28절입니다.
[28] 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마을이 발칵 뒤집힐 상황입니다. 자기들이 숭배하고 신성시 여기는 제단이 파되되니 29절, 30절에서 범인을 추적하다 기드온을 찾아내게 됩니다.
[29] 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30]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이들의 반응이 당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순이에요.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데 7년째 지금 미디언으로부터 고통을 당하면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풍요와 안정을 꿈꾸는 것, 이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너무 어려우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대체제를 찾아 우상을 숭배합니다.
이것은 위기입니다. 대중의 힘을 누가 이길 수 있나요? 많은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메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몸부림치지만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더 많은 시선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빌라도입니다. 누가복음 23장 20절과부터 23절입니다.
눅 23:20-23 [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한 번이 아닙니다. 빌라도가 세 번을 거부합니다. 빌라도는 당시 예루살렘과 온 유대를 다스리는 권력자였습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지화하여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빌라도가 죽이라면 죽이고 살리라면 살리는 힘이 있이 있었습니다. 그런 빌라도를 이긴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들의 소리’입니다. 이것이 대중의 영향력입니다.
이 소리를 인간은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소심한 기드온이 이겨냅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마을 사람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런데 31절에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31]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자기가 족장이고, 자기 집에 바알 제단이 있고, 자기의 아끼는 두 번째 소가 희생되었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그리고 왜 기드온을 변호한 것일까요? 바로 자기 아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요아스는 자신처럼 진취적이고 용맹한 아들이 뒤를 이어 영향력을 미치길 원했는데 그 반대로 소심의 끝판왕이 태어나서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종도 많고, 큰 가문이고, 다른 아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문에 걸맞지 않는 아들이라 늘 아픈 손가락이었을 것입니다.
그랬던 아들이 생명을 내어놓고 신상을 깨뜨리며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아버지가 나서서 아들을 죽여야 하지만 요아스는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원래 자신이 알던 아들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아들의 본질은 넘어선 하나님의 개입을 눈치챈 것입니다. 그래서 바알을 위하는 자를 죽이겠다고 아들 편에 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겠지만, 성경은 그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일로 소심하던 기드온의 이름이 바뀝니다. 32절입니다.
[32]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요? ‘바알과 다투는 자, 여룹바알.’ 가장 소심한 사람이 영적 전쟁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이 결과가 어디에서 왔나요? 하나님을 알아 하나님을 경외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다 두려워합니다. 미래가 두렵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불안과 걱정이 듭니다. 그러나 잔소리로도 돈으로도 노력으로도 인간은 인간을 지킬 수 없고 미래를 좌우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 자라가도록 기도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아,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들이 될 때 기드온처럼 가장 소심하던 자가 영적 전쟁의 선봉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