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0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2]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3]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4]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5]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6]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완전히 끝난 상황은 아닙니다. 13만 5천의 군대 중 서로 싸우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12만 명이 죽음으로 전세가 크게 기울었지만 아직 미디안의 두 왕과 1만 5천 명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을 살려 보낸다면 세력을 키워 재공격할 것이기에 왕을 잡고 잔당을 처리해 전쟁을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적이 아닌 이스라엘의 두 집단이 각각 기드온에게 모욕을 주며 시비를 건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한 무리에게는 아부하며 달래듯 반응하고 또 한 무리에게는 잔인하고 무섭게 반응합니다. 똑같이 분노할 만한 상황에 왜 다른 반응을 한 것일까요?
많은 이들은 성경을 오해하고 인간적인 답을 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드온이 승리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모욕을 견디다가, 배고프고 피곤하니까 본성이 나왔다는 등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한 개인의 성격이 나쁨을 보여주는 기록이 아닙니다. 성경은 철저히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즉 기드온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와, 특별히 구원자로 오신 예수에 대해 기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거의 승리했지만 잔당이 남은 기드온의 상황은 사실 지금 벌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전쟁의 승리가 확정이 되었고 마귀와 원수의 세력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최종 완성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입니다.
승리자이며 구원자인 기드온에게 반응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에게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형이기 때문에 결국 본문을 통해 구원자에 대한 반응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성경은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자에 대한 반응은 어떤 다른 결과를 가져오나요?
구원자에 대한 반응은 어떤 다른 결과를 가져오나요?
1. 교만하게 반응하더라도 전쟁에 참여한 자들은 용서받습니다. vv.1-3
첫 번째로 교만하게 반응하더라도 전쟁에 참여한 자들은 용서받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에브라임의 주장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7년 동안 미디안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이전에는 먼저 나서서 전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기회와 능력과 마음이 있었으면 이미 싸웠을 것입니다. 그래놓고 왜 미리 안 불렀냐고 주장합니다. 사실 기드온은 전쟁의 승기가 확실해졌을 때, 가장 가까이 있던 에브라임에게 도움을 요청했었습니다. 바로 앞장인 7장 24절에
7:24 기드온이 사자들을 보내서 에브라임 온 산지로 두루 다니게 하여 이르기를 내려와서 미디안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라 하매,
고대의 전쟁에는 승리했을 때 얻게 되는 보상물이 엄청나게 컸습니다. 특히 미디안과 같이 장막에 거하는 사람들은 견고한 집이 없으니 귀중품을 다 가지고 다닙니다. 지금 13만 5천 명이 귀중품과 식량과 좋은 것들은 들고 다니다 죽고 도망간 상황입니다. 십만 여명의 물건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전쟁에 먼저 참여했더라면 좋은 것을 더 가질 수 있었을텐데’라고 에브라임이 생각하자 화가 난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미리 전쟁하지 못하고 숨어 있던 사람들이 욕심이 나니까 왜 빨리 안 불렀냐고 화를 내는 배은망덕한 상황입니다. 이 모습이 누구와 닮았나요?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과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로 인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죄와 마귀와 세상에 매여 노예처럼 살다가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완전한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은 다른 사람이 받은 좋은 것을 왜 주시지 않는지 서운해 합니다. 왜 우리 집 아이는 공부를 못하는지, 왜 내 식구만 아픈지, 왜 나는 돈 걱정을 하는지, 채워지지 않는 욕심에 대해 분노하며 화를 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불만은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 바울 사도처럼 사역할 기회가 없는지, 왜 복음을 전할 기회가 막히는지를 놓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불만은 비교에서 옵니다. 나보다 기도 안 하는 것 같은 사람이 잘 살면 실망하고 시험에 듭니다. 이것이 에브라임의 모습입니다.
노예처럼 살며 가진 것을 뺏기는 고통을 7년이나 겪었는데 전리품을 보니까 욕심이 나서 구원자 기드온을 향해 투정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악의 모습입니다. 기드온이 몰랐을까요? ‘더 일찍 부를 걸’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의 욕심이 날뛰는 뻔뻔한 모습에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그러나 기드온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2절입니다.
[2]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우리가 시작한 일은 별것 아니고 너네가 마무리한 일이 큰 일이야’ 추켜세워 줍니다. 물론 에브라임 때문에 마무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7장 마지막 25절입니다.
7:25 또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미디안을 추격하였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강 건너편에서 기드온에게 가져왔더라
에브라임이 부름에 응답하여 오렙과 스엡을 죽이고 기드온에게 가져왔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 정도로 칭찬받을 일인가요? 기드온이 이룬 놀라운 구원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드온은 이들을 높이고 칭찬하며 3절에서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3a]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
그러자 3절 하반절에
[3b] …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이 단순하고 배은망덕한 자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교회 내 많은 사람들은 사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구원의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기대해서라기보다는 사실 자기 욕심으로 시작합니다. 저희 집안에 복음이 들어온 이유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뻔하다 기도 받고 나으셔서였습니다. 그리고 인생 내내 고난이 닥칠 때마다 저희 집에서 가장 많이 했던 기도가 하나님 어려움에서 해결해 주세요, 돈 주세요, 병 낫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며 그것이 되지 않았을 때 낙심하고 실망했습니다.
만약 기드온이 에브라임의 반역적 반응에 대해 그들을 벌하거나 화를 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지금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라 잘못하면 내전이 벌어져을 것입니다. 지금 집중할 것은 잔당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이스라엘끼리 칼을 들이대면 전쟁을 완수할 수 없는 상황이라 모자란 인간들을 높여주며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자라고 미련한 성도들을 용납하시는 이유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바울처럼 믿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욕심으로 시작하지만 그 과정에서 복음도 받아들이고 고난을 통해 자아가 깨어지며 성장하며 하나님 나라가 좋은 것도 알게 되고 그러나 여전히 세상이 좋은 갈등도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 분노도 하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아도 만족하는 더 성숙한 길로 가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는 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어리숙한 자들을 달래고 얼르면서 데리고 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기드온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난 아무것도 아니야, 너네가 잘했어’라고 이야기했듯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높이며 이끌어 가시는 은혜의 손길이 이 이야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찬양을 가장 많이 부르는 곳이 새가족부입니다. 그러나 이곳에만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어르고 달래는 과정이 어디까지인가요? 성장할 때까지입니다. 성장의 과정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똑같았습니다. 3년간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이 직접 인도해 주시는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하루 전에 예루살렘을 향해 같이 가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두 명이 선수를 칩니다. 마가복음 10장 35절부터 37절입니다.
막 10:35-37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제자들은 무엇을 기대했나요?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제일 높은 두 자리를 형제가 갖기를 열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3년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다른 열 제자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마가복음 10장 41절입니다.
막 10: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언제 화난다고 제가 말씀드렸나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다른 사람이 가지려고 할 때입니다. 에브라임이 화난 이유도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을 남들이 먼저 가져서입니다. 제자들도 자신이 노리고 있던 것을 야고보와 요한이 먼저 얘기하자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화내고, 싸우고, 예수님의 양 옆에 높은 자리에 서겠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이었나요? 이들의 요청 직전에 마가복음 10장 33절과 34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막 10:33-34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
자기 욕망이 너무 강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만 하면 잡혀 죽을 것을 준비하며 마음의 근심을 이야기 하셨는데 제자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말이 안 통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제자들이 나중에 가롯 유다를 빼고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위해 끝까지 생명을 내거는 충성을 바친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욕심 때문에 따라왔을 수도 있지만 일단 발을 들이고 나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가 하나님 나라의 길에 서서 욕심도 부리고 채워지지 않으면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런 미련한 자들을 예수가 붙들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길로 인도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보여주는 반응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보이시는 은혜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자들을 모아 큰 일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늘 실패하고 분노하며 심지어는 하나님도 가르치려 드는 우리를 하나님은 은혜로 덮으시며, ‘괜찮아, 잘하고 있어, 넌 사랑받는 자야’라고 말씀해 주시며 우리를 끝까지 데려 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에브라임과 똑같습니다. 에브라임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우상숭배의 본질적 모형으로 등장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에브라임이 ‘우상숭배자’와 같은 용어로 사용됩니다. ‘너 에브라임아’ 하면 ‘이 우상숭배자’와 동격인 것입니다. 이런 본질을 가진 존재여도 호세아서를 통해 보여주시듯 하나님이 끝까지 용납하시며 이끌어 가시는 은혜가 기드온의 반응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승리한 구원자에 대한 반응은 어떤 다른 결과를 가져오나요?
2. 승리를 기대하지 않아 구원자를 거부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vv.4-17
두 번째로 승리한 구원자에 대한 반응은 어떤 다른 결과를 가져오나요? 승리를 기대하지 않아 구원자를 거부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4절과 5절입니다.
[4]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5]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숙곳 사람들은 요단 강변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을 달랜 후 기드온이 나머지 군사들과 함께 잔당을 처리하러 가는 중입니다. 밤을 새며 싸우고, 도망간 자들을 추적하느라고 미리 준비한 것이 없습니다. 배가 고프고, 잠을 못 자고 피곤하지만, 조금만 더, 잔당만 해결하면 이제 끝이라는 생각으로 가는데 이스라엘 마을이 나타납니다.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그래서 빵 좀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도 참여를 안 했는데 이들을 구원한 기드온이 조금만 도와달라고 할 때 빵만 주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요? 그런데 6절에 이들을 냉담하기만 합니다.
[6]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완전한 승리를 이루기 전에는 떡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괜히 줬다가 세바와 살문나가 쳐들어올까봐 못 준다니 분노할 일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분노할 만한 상황에서 상대를 달래던 기드온이 7절에 무서운 심판을 선언합니다.
[7]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죽이겠다는 선포를 뒤로 하고 숙곳 옆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갑니다. 8절입니다.
[8] 거기서 브누엘로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사실 이들의 답도 이해가 갑니다. 이들은 요단 강변 근처의 마을로, 요단강 동쪽에 바로 미디안이 살기 때문에, 내륙보다 미디안의 영향력이 훨씬 강합니다. 그러니까 미디안이 확고하게 무너지기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줬다가 혹시라도 미디안이 침공해서 괴롭히면 보복이 두려운 것입니다. 전쟁이 완전히 안 끝난 것 같은데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판단이 안 선 것입니다. 사실 기드온은 피곤한 300명과 달려오고 있고, 미디안의 잔당은 만 5천명입니다.
간단한 산수로도 알 수 있는 상황이 되자 과연 기드온이 전쟁을 끝낼 인물인지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 역시 현재 벌어지는 일 아닌가요? 만약 지금 세상이 반드시 망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확실히 알고 있다면 그들이 이렇게 예수를 안 믿을까요?
성경은 수없이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세상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이며 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모든 원수들을 지옥에 쳐넣으시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왕이며 구원자라고 믿는 소수만이 ‘예수님 오시옵소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도 예수님이 온 세상의 왕이라고 믿는 수가 너무 적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고 약해 보이고, 세상의 왕은 돈이며 권력자라고 생각하니까 하나님 나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싶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숙곳과 브니엘 사람들을 보며, ‘몇 시간 후면 전쟁이 끝나서 너희들은 엄청난 피해를 당할 텐데 바보 같다’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예수에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 똑같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보면 예수님은 곧 오십니다. 하늘의 왕으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며
마귀에게 충성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죄에 매인 자들은 영원한 심판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믿지를 못합니다. 언제쯤 오실 줄은 알지만 만년 후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다미선교회 이장림 목사라는 사람이 책을 내어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서 큰 해프닝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같은 과 친구들도 몇몇 빠져서 통장과 도장을 통째로 헌금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후히 베풀고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땅의 것에 집착하는 가장 근원적 마음은 세상이 영원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안 보이니까, 예수님은 내가 누릴 거 다 누리고 안정과 쾌락을 취한 뒤에 나중에 오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너무 큰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싸움에서 실패하고 있는 겁니다. 숙곳 사람들이 기드온을 거부했던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그들은 잘 지내고 있고, 전쟁을 끝날 것 같지 않고, 적은 강해 보이니까 하나님 나라의 편에 서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나요? 기드온은 9절에서 브누엘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9]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세상이 만들어놓은 멋진 것들이 영원할까요? 다 허물어집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허물어지는 그날이 올 것입니다. 결국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10절입니다.
[10]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따라와서 거기에 있더라
1만 5천 명이 도망친 상황입니다. 요단강 넘어 까지는 못 쫓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강을 건너 자기 땅에 도착하니까 11절에서 어땠나요?
[11] 적군이 안심하고 있는 중에 기드온이 노바와 욕브하 동쪽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길로 올라가서 그 적진을 치니
몇 백 명이 하나님이 주시는 완전한 승리에 대한 믿음으로 1만 5천 명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12절입니다.
[12]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진영을 격파하니라
완전한 승리가 주어졌습니다. 남은 일은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숙곳, 브누엘 사람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시면
[13]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오다가 [14] 숙곳 사람 중 한 소년을 잡아 그를 심문하매 그가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들 칠십칠 명을 그에게 적어 준지라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반역의 선봉에 섰던 대장들, 높은 사람들 이름을 적어내게 합니다. 그리고 15절부터 17절까지 무서운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5]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 살문나를 보라 하고 [16]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17]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
하나님이 기드온을 통해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형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 기드온이 전쟁의 피로로 판단이 흐려져서 나쁜 본성이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세상에 있을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어떤 일이 있을지 요한계시록 19장 11절, 14절부터 16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계 19:11, 14-16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왜 예수님의 이름이 충실과 진실인가요? 성경에 약속된 대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써진 그대로 다시 오셔서 심판하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기억하셔야 됩니다. 하긴 100년 전보다 종말에 대해 각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매년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고, 하와이처럼 불타는 일이 곳곳에 벌어질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세상에 두고 있는가의 여부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백마 탄 예수와 함께할 자가 되느냐 길이 달라집니다. 다미선교회가 한국 교회에 심어놓은 치명적 악이 있습니다. 마귀가 한 일이라고 100% 확신하는데, 다미선교회 사건 이후 종말에 대한 얘기가 한국 교회에서 싹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전에는 요한계시록 관심 있는 사람들 많았습니다. 물론 잘못된 관심들, 잘못된 해석들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종말을 논하면 이 땅을 부정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에 캠핑 가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 보고, 해외 여행 가고, 넷플릭스 보고, 할 일이 널렸는데 하늘나라는 너무 재미없어 보입니다.
기드온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전쟁은 곧 끝난다. 내가 다시 올 거야. 내가 승리할 거야.’ 이 믿음이 없어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은 무서운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 나라의 편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