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3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8] 이에 그가 세바와 살문나에게 말하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
[19] 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20]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 하였으나 그 소년이 그의 칼을 빼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
[21] 세바와 살문나가 이르되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하니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들을 떼어서 가지니라
세상에서 성도의 삶이 힘들수록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은 커지게 됩니다. 세상이 살기 좋다면 성도들은 예수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재림 신앙이 뜨거웠던 때는 일제 시대였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요한계시록 설교가 많이 행해졌고 목사님들이나 성도들도 요한계시록을 많이 읽고 암송했습니다.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이라 불리는 길선주 목사님은 성경을 약 500독 하셨는데 그 중 계시록은 만 번을 읽으셨다고 합니다. 또 한국 최초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모든 주석을 쓰신 박윤선 목사님도 당시 미국으로 유학가시는 배에서 두 달 동안 요한계시록 전체를 암송하셨다고 합니다.
교회의 역사 가운데도 요한계시록을 가장 사랑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했던 때는 늘 교회가 핍박을 당할 때였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이 당장 오실 것을 기대하는 사람도 많았고,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다 보니, 예수님이 이미 오셨다는 소문이 퍼진 경우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를 써서 4장 16절부터 18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살전 4:16-18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하늘 전체가 진동하고,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우리도 예수님을 영접하러 하늘로 끌어올림 당할 것이기에 예수님이 오시면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너희만 남겨졌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긴박하게 예수님이 오신다고 생각했으면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요? 계시록 22장 20절을 보시겠습니다.
계 22:20 …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시옵소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람어, 마라나타입니다. 예수님은 속히 오시겠다고 말씀하셨고, 그것에 우리가 화답할 말이 마라나타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2천년 동안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서 세상의 삶이 편해질수록 성도들의 신앙이 느슨해졌습니다. 물론 상황이 나쁘다고 예수님 빨리 오시고 이 땅의 고난이 적다고 예수님이 늦게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빨리’라는 우리의 개념은 시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를 진행해 나가시고 또한 이 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것이기에 우리의 시간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5장 17절에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겠다고 약속하시나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옛 하늘과 옛 땅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 창조로 세상이 만들어지고 이 첫 창조의 가장 중요한 창조물인 인간이 만들어졌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타락이 시작된 것입니다.
온 세상이 인간의 타락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타락의 본질은 바로 죄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타락하고, 마귀와 세상의 노예가 되고, 죽음이라는 결국을 맞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원수가 바로 죄, 마귀, 세상, 영적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첫 창조가 원수로 인해 타락되었고 하나님이 이것을 회복하신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장 중요한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원수이며 첫 창조를 파괴한 죄, 마귀, 세상을 왜 지금 심판하시지 않나요? 하나님은 이들이 현저하게 영향을 미치는 과도기적 상황을 통해 성도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지금 죄나 마귀가 없이 세상이 다 하나님 편이라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나는 원래 착하고 좋은 존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즉 마귀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세상이 이렇게 악하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을 핍박하고 유혹하는 세상이 번성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쉬울 수 있으나, 외부 자극이 없다면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상황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첫 창조에 아담과 하와를 온전하게 만드셨고 마귀도 아직 개입하지 않았고 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시험을 하자마자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깊은 타락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가득한 세상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과도기적 시간은 끝이 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고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 원수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 백성을 핍박하고 유혹하던 모든 세력들이 심판을 받아야 새 창조가 시작됩니다.
원수들은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되나요?
1.행한 대로 공정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vv.18-19
그렇다면 원수들은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되나요? 첫 번째로 행한 대로 공정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18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8a] 이에 그가 세바와 살문나에게 말하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하니 …
지난주에도 살펴봤지만 지금 기드온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처음에는 두려움도 많고 약한 존재로 묘사되지만 전쟁을 마친 뒤에 예수님을 상징할 만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기드온은 이제껏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미디안 두 왕을 사로잡고 심문하고 있습니다.
다음 절에 드러나지만 미디안 두 왕은 다볼이라는 곳을 침공해서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들은 기드온의 형제들이었습니다. 기드온이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물어본 것은 그들이 자기 입으로 죄를 고백하여 그들이 정당하고 공정한 심판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18장 18절 하반절입니다.
[18b] …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
이 문장은 두 가지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드온을 왕자 같다고 높인 것이며, 또 하나는 너와 같은 왕자들을 죽였으니 우리는 강하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을 높이는 동시에 자기 자랑을 한 이들은 자신들이 기드온의 형제들을 죽인지 알지 못한 채 죄를 시인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공정하게, 행한 대로 임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이들이 고백하자 기드온이 그제야 자기 의도를 밝힙니다. 19절 상반절입니다.
[19a] 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
이들의 자만심을 이용해 결국 다 고백하게 만든 후 19절 하반절에서 심판의 선고를 내립니다.
[19b] …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는 다른 말로 ‘반드시’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나는 이 일을 해내고 말겠다는 맹세의 표현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에게 단순히 곡식만 뺏긴 것이 아닌, 친 형제들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고대 율법에 의하면 형제나 가족이 죽임을 당하면 피의 보복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사회에서는 개인 보복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은 사회 체제가 갖춰지기 전이라 한 존재가 죽임을 당하면 보복을 허용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가족이 죽임을 당했는데 아무런 보복을 할 수 없다면 너무 억울하고 분노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기드온처럼 원수들을 반드시 보복하고 심판하여 주실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바로 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핍박당하고 세상과 마귀와 죄의 유혹과 시험으로 실패하며 고통할 수 있습니다. 꼭 마귀의 시험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우리는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반드시 예수님이 형제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공의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은 ‘예수님 편에 선 자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입니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원래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거룩이라는 개념은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하려면 인간은 불타던지 존재가 사라져버려야 됩니다. 그러니까 같은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신 뒤에 우리를 형제라고 불러주십니다.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원래는 부끄러워하셔야 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바퀴벌레의 형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수치심과 혐오보다 훨씬 심한 수준으로 예수님이 낮아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바라보시는 관점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하나도 없으신데 우리 안에는 마음의 본질에서부터 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고 보복하여 주겠다고 하십니다. 왜인가요? 하나님 백성은 이 땅 가운데 반드시 원수로 인해 고통하고, 그 고통의 수준이 단순히 세상 살기 힘들다는 푸념의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심지어 우리를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계시록 6장 10절입니다.
계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큰 소리로 부르는 주체는 성도들의 연합인 교회입니다. 교회가 우리 피를 갚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들은 지금 피를 흘리고 있는 교회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 순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피를 흘린 자처럼 신원함을 요청하는 이유는 우리가 모두 동일한 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피를 흘리고 어떤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전부는 마치 피를 흘리며 이 땅에 살아가듯 모든 교회는 순교자의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이며 피를 흘린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 가장 먼저 심판을 받을 대상은 마귀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을 보시면
계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마귀가 던져진 불과 유황에 거짓 선지자와 짐승까지 던지시는 이유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보이지 않는 마귀의 영향력을 세상에 확산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눈에 보이지 않는데 우리는 보이는 세계에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보이는 세계에 영향을 미칠 도구들을 사용하는데 그 도구가 바로 짐승과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로 거짓을 믿게 만드는 영향력입니다. 어쩌면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미디어이며 세상의 소리일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의존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의 시스템을 따라가지 않는 자들을 핍박하여 죽이는 존재를 짐승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하나님 백성들을 핍박하고 유혹하는 존재들이 심판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는 이 영적 영향력을 구체적으로 행사하는 사람도 존재합니다. 그 중에는 특별히 더 마귀 편에 서서 악을 행하는 일에 열심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국주의의 역사를 보면, 일본, 영국, 프랑스 등은 식민지 본토 사람들을 중간 지도자로 세워 사람들을 착취하며 고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마치 매국노처럼 세상에 악을 확산하고, 기독교를 핍박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유혹하는 선봉에 선 자들을 향한 심판이 요한계시록 20장 12절, 13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계 20:12-13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라는 구절이 반복됩니다. 즉 미디안 왕들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위를 책에 기록하셨다가 행위대로 심판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책이 필요 없을 만큼 모든 것을 아시고 반응하실 것이지만 이는 잘못된 것 없이, 누락된 것 없이, 공정한 심판을 행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무엇도 심판을 받나요? 요한계시록 20장 14절을 보시면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사망도 심판을 받습니다. 음부는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라고 여겨진 장소이기 때문에 이를 합쳐 사망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영원한 죽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무엇이라 부르나요?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보면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이 한자어로 신천지입니다. 이단 신천지가 주장하는 신천지는 성경이 약속하는 죄가 사라지고 마귀가 불못에 들어가며 이 세상이 새로워지고 더 이상 영적 죽음이 없는 그런 신천지가 아닙니다. 이들은 전 세계의 땅들을 자기들 14만 4천 명이 나눠 가질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천지의 욕심에 매인 사람들이 물질적 보상 때문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 풍요함이 아닌, 더 이상 죄가 없고 마귀가 없고 마귀에게 노예된 세상이 새로워지며 영원한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그날이 언젠가 올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도 있고 공허하고 불만족하고 불행해서 아파할 때 있지만 하나님이 언젠가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약속대로 우리와 세상을 새롭게 하시며 모든 원수들을 심판하실 때 우리는 찬양하며 기뻐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원수들은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되나요?
2. 가장 치욕스럽게 심판을 받게 됩니다. v.20-21
두 번째로 원수들은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되나요? 가장 치욕스럽게 심판을 받게 됩니다. 20절 입니다.
[20]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 하였으나 그 소년이 그의 칼을 빼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
그들의 고백을 듣자마자 칼을 휘둘러 목을 베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기드온은 어려서 칼도 제대로 못 빼는 아들에게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고대에서 죽음은 굉장히 명예로운 순간입니다. 반대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은 나와 수준이 맞지 않는 약한 자에게 당하는 죽음입니다. 왕이자 전사라면 그 수준에 맞는 죽음이 주어져야 명예로운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우리보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명예롭게 죽어야 죽음 이후의 인생에서도 명예로운 존재로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비슷한 경우가 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다음 장인 9장입니다. 기드온의 첩이 낳은 아들인 아비멜렉이 전쟁을 하다 거의 죽게 됩니다. 9장 53절과 54절입니다.
9:53-54 [53]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54]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두개골이 이미 깨져서 곧 죽을 텐데 급히 옆의 사람을 붙잡고 자기를 죽여달라고 합니다. 어차피 죽는다는 사실은 같지만 맷돌에 맞아 죽으면 여자로부터 죽임 당한 치욕스러운 존재가 되게 생겼으니 남자에게 칼을 맞아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대의 맥락에서 기드온은 적군의 왕들에게 정당하고 명예로운 죽음을 주지 않으려 아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아들이 너무 어려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나중에 원수들을 치욕스럽게 심판하실 것에 대한 모형입니다. 결국 기드온이 심판을 마무리합니다. 21절에서
[21] 세바와 살문나가 이르되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하니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
세상에는 영광스러운 체 행세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세상의 삶이 영광스러운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그들을 뭐라고 부르나요? 왕, 장군, 부자, 강한 자입니다. 그들의 결국이 어떻게 될지 계시록 6장 15절부터 17절은 이야기합니다.
계 6:15-17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앞에 나온 리스트는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을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왕인 것처럼 사는 자, 힘을 근거로 살아가는 장군들, 물질을 근거로 살아가는 부자들, 강한 자들, 그들과 함께 있는 종들과 모든 자유인까지도 하나님 없이 굴과 바위틈에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무서워서 굴속에서 벌벌 떨면서, 심판을 당하느니 차라리 바위가 무너져서 깔렸으면 좋겠다고 외칩니다. 이것이 이들이 당할 마지막 심판입니다.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하늘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보게 될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가 영접하러 하늘로 올라갔다가 같이 내려오게 됩니다. 이것이 휴거인데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 땅이 어려움을 겪을 때 하늘에 가서 피했다가 어려움이 끝난 다음에 내려오는 일은 없습니다.
‘영접하다’라는 성경의 단어는 중요한 손님이 올 때 문 밖에 나가서 그분과 함께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면 앉아서 손만 흔드는 것이 아니라 귀한 분을 맞으러 우리가 올라갔다가 그분과 함께 내려오는 것입니다. 올라갔다가 예수님 손잡고 같이 내려와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된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울까요?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어야 합니다.
2천 년 동안 연습하고 기다려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어떤 의미에서 소망이 옅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100년 더 살면 행복할까요? 세상에는 150세까지 살겠다고 하루에 60개의 알약을 먹고 있는 부자도 있고, 몸의 생존 시계를 늦추기 위해 1년에 20억 원씩 쓰면서 열 여섯된 자기 아들의 피를 수혈해서 자기 몸에 넣는 부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사는 결국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부름 앞에 준비해야 합니다.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가 되어 그와 함께 설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 편에 서지 못한 자들이 당할 심판에 대해 마태복음 24장 51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마 24: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엄히 때리다’는 원래 ‘반쪽으로 쪼개 죽이다’라는 뜻인데 직역하기에 너무 심해서 살짝 약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리로 쳐 넣기 전에 반으로 두 조각을 내어 죽이겠다는 것은 심판의 엄중함을 보여주는 무서운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왜인가요? 이 땅에서 우리가 억울하고 슬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다 갚아주실 것이기에 우리가 보복하고 억울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삶에서 사람들로 인해 좌절할 때, 낙심할 때, 슬플 때, 억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주시고 세상에는 끝이 있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으심으로 억울하고 슬픈 데서 자유를 얻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