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3]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4]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5]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인간이란 존재는 욕망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먹고 싶고, 자고 싶고, 사람들과 만나고 싶고, 놀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기본적인 욕망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은 건강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은밀하고 감추어진 욕망에 영향을 받습니다.
사실 인간은 모두 남에게 드러나기를 꺼려하는 은밀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가 여자가 되고 싶다거나 하는 성 정체성 혼란으로 말미암은 욕망도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감추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은밀한 욕망 가운데 사람에게 아주 보편적이면서 또한 가장 치명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영적으로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왕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는 삶이 바로 왕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가장 노골적으로 또 강하게 드러나는 때가 영유아기입니다. 그래서 아기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주 힘이 드는 일입니다. 원하는 것만 하고자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되면 울거나 떼를 씁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이 욕망을 내재화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감추고는 있지만 인간 마음의 근원에는 모두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면 어떻게 되나요? 주변 사람들이 다 그를 견제합니다. 한 사람이 왕이 되면 주변 사람들은 결국 그의 노예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견제 때문에 기드온은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합니다. 8장 23절입니다.
8: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기드온은 내면의 은밀한 욕망을 왕이라는 타이틀로 행할 때 따를 사람들의 견제와 책임져야 할 상황이 두려워 왕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안에는 왕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강렬했습니다. 말로는 거절했지만 실제는 왕처럼 살았습니다. 자기 하렘을 만들어 수십 명의 아내들로부터 70명의 아들을 낳고, 금 에봇을 만들어 사람들이 자신에게 영적 지도를 구하도록 하여 이스라엘 전체를 좌우하고자 했으며, 첩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을 가진 아비멜렉이라고 지음으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왕임을 끊임없이 기억했습니다. 즉 아비멜렉은 왕 되고자 하는 아버지의 열망이 집약된 욕망의 덩어리였습니다. 왕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은밀한 욕망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1.가정이 파괴됩니다. vv.1-5
그렇다면 은밀한 욕망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첫 번째로 가정이 파괴됩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지금 기드온은 죽은 상태이고 아비멜렉 또한 다른 곳에 있다 가족들에게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가서 무엇을 이야기하나요? 2절 말씀입니다.
[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아비멜렉은 처가 쪽으로만 세겜 사람들의 혈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아비멜렉의 어머니를 정식 아내로 삼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세겜 출신의 이방인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의 아들들보다 혈육인 나의 통치가 낫지 않겠는가 하는 그의 주장에 사람들이 설득됩니다. 3절입니다.
[3]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이들은 왜 아비멜렉의 말에 동화되었나요? 가까운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그들 또한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에 한 사람이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권력을 나눠 갖는 혜택을 의미했습니다. 즉 이들은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이 왕이 되면 자신들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합니다. 4절입니다.
[4]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세겜 사람들이 믿고 의존하던 신은 바알 브릿이었습니다. 바알은 지역마다 다른 이름을 붙여서 그 지역에 토착화된 신앙입니다. 바알이라는 신에 지명 브릿을 붙여서 세겜 지역 사람들이 기던 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신전에서 은을 가져다 고용한 용병들은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방탕하다’는 ‘폭력적이다’를 번역한 것이고 ‘경박하다’는 ‘머리가 텅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합쳐보면 무엇인가요? 굉장히 폭력적인데 머리에 든 것은 없는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돈만 주면 얼마든지 폭력적인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동원해 무엇을 했나요? 5절 말씀입니다.
[5]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요? 기드온이 낳은 70명 아들 가운데 한 명 빼고 다 죽여 버립니다. 이들이 얼마나 큰 공포를 경험했을까요? 절반의 피만 섞이긴 했어도 사실 형제입니다. 같은 아버지의 자식들입니다. 왜 아비멜렉이 이렇게 형제들을 집단 살해하는 무서운 일을 저지른 것일까요? 사실 내면적으로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의 70명의 아들들은 아마 왕자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힘과 재력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첩의 아들이라 그럴 수 없었습니다. 고대에는 개인의 능력보다 혈통이 중요했기 때문에 아비멜렉에게는 넘을 수 없는 산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늘 형제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이 커졌을 것이고, 질투와 미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질투와 미움이 가득한 채로 끝난 게 아니라 그 안에 왕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강렬했다는 점입니다. 상처를 받아서 혼자 상처받고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상처가 욕망과 결부되면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 성향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보다 나는 나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고 상대방이 나보다 나은 평가를 받으면 그를 질투하다 죽이고 싶어하는 근원적 욕망은 사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뒤 처음부터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질투하여 죽인 사건 또한 이러한 연유였던 것입니다. 창세기 3장 4절과 5절을 보시면
창 3:4-5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나님께 똑같이 재물을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습니다. 이때 가인은 분노합니다. 하나님이 당연히 자기의 제물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가인을 낳고 그 아이가 자신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얻었다’라는 뜻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가인의 뜻 자체가 ‘구원자를 얻다’입니다. 어려서부터 엄마의 기대를 잔뜩 받았을 것입니다. 괜찮은 존재가 되어야 하고, 강한 존재여야 했습니다. 그러면 가인이 구원자가 되었나요?
하와는 깊이 실망한 나머지 둘째의 이름을 아벨 즉 공허, 헛됨이라고 지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일 것입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나를 귀하게 여기셔야 된다고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자 동생을 향한 분노와 미움이 표출되어 결국 동생을 들판으로 유인해 죽여 버립니다. 이와 똑같은 일을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행합니다. 사무엘하 13장 28절을 보시면
삼하 13:28 압살롬이 그의 종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그를 죽이라 …
암논은 압살롬의 형입니다. 암논만 없으면 자기가 왕이 될 수 있자 형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물론 암논은 압살롬의 여동생을 강간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오빠로서의 감정적 분노로 인해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압살롬이 암논에 대해 분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못할 때까지 몇 년 동안을 계획해서 집으로 초대해 형을 죽여 버렸습니다.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하는데 형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런 극단적인 사례는 인간의 본질 안에 있는 무서운 죄성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만드는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다 이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만 제거되어 내가 그 자리에 갈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를 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아비멜렉은 아버지의 욕망이 집약된 존재입니다. 그의 이름 아비멜렉 자체가 왕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는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럿 등장합니다. 다 가나안의 왕들로, ‘내 아버지가 왕’이기 때문에 곧 ‘내가 왕’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현재에 최고 지도자를 대통령이라고 통칭하듯, 가나안의 왕을 아비멜렉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비멜렉이 태어나서부터 ‘너는 왕이야, 너는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될 거야’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아비멜렉의 내면에 깊은 열망을 만들어냈습니다. 아버지의 숨겨진 열망이 아비멜렉 안에 계속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경쟁자가 70명이나 됩니다. 아니 자신은 경쟁에 뛰어들 수도 없는 한계를 가진 첩의 자식이니 경쟁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이 내면으로 삐뚤어지고 잘못된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만든 직접 원인이 기드온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의 하나님 되고자 한 열망 때문에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내면에 자기가 하나님처럼 왕처럼 되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지금은 왕이라는 제도는 사라졌지만 이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 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다 무엇이 되고 싶어 하나요? 부자 중에서도 엄청난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너는 엄청난 힘을 가져야만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에 대한 꿈을 꿉니다. 성공해서 남들이 나를 부러워하고 내가 그 성공으로 남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는 소원조차 그 근원은 왕이 되고 싶은 인간의 열망입니다. 자신이 왕이 못 된다면 사람은 자식을 왕처럼 만들고자 열망합니다.
세상에서 왕처럼 살 수 없는 사람들은 가정에서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가족들에게 여러 가지 규칙을 세우고, 원칙을 깨뜨릴 때마다 폭력을 행함으로 자신 말을 듣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규칙을 지키나 안지키나를 끊임없이 관찰하다가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게 분노와 폭력을 행사함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나요? 가정을 파괴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돈이 최고야, 반드시 성공해서 부자되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중 일부는 부자가 될 만한 아이도 있겠지만 이는 소수이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강요받던 부를 갖지 못하게 될 때 열등감과 분노와 질투가 싹트는 아비멜렉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어떤 원칙을 너무 강요해서 그것을 깨뜨릴 때마다 자녀를 벌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자녀는 부모가 있을 때는 두려워하며 말을 들으려고 하지만 내면은 깊이 상처를 받고 부모가 보인 폭력보다 더 무서운 폭력적 경향을 나타내게 됩니다.
너무 좁은 틀로 아이들을 몰아넣는 경우나 아무 틀이 없이 아이들을 방임하는 경우나 똑같이 나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맨날 간섭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 아이들이 조금만 틀에서 어긋나도 불안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이들은 강박장애에 시달리게 됩니다.
고등학교 때 그런 친구가 있었습니다. 교문에서 교실이 있는 건물까지 항상 걸음 수를 세는데 늘 자기가 정해놓은 숫자에 맞춰서 들어가야 합니다. 숫자가 못 미친 날은 멀리서 멀리 뛰기를 하고 숫자가 남는 날은 다시 돌아가서 현관 교문부터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또 복도에 있는 금도 절대 밟지 않습니다. 매사에 그런 틀로 자신을 옥죄면 옆에 있는 사람도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또 반대로 부모가 아무 틀을 제시하지 않고 항상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도 똑같이 문제입니다. 어릴 때부터 중요한 틀은 반드시 지키도록 훈육해야 합니다. 아무 틀이 없다면 왕이 되고자 하는 무서운 심성이 절제되지 않은 채 아이를 지배하여 어떤 규칙도 지키지 않는 아이가 되어버립니다. 부모 말뿐 아니라 사회적 규칙도 안 지키고, 누군가 규칙을 상기시키면 분노하고 폭력적으로 행동합니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그래도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건강한 틀을 만들어줘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부모가 왕 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다양한 방식으로 자녀에게 표출하면 자녀는 아비멜렉과 같은 존재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죄성은 가정을 파괴하게 됩니다.
은밀한 욕망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2. 공동체가 파괴됩니다. vv.6-21
두 번째로 은밀한 욕망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공동체가 파괴됩니다. 6절 말씀입니다.
[6]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아비멜렉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것은 아닙니다. 세겜과 밀로 족속은 가나안 지역에 살던 이방 민족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세를 확장해서 아버지의 집과 모든 지역에 영향을 미치려고 일단 여기서 시작을 한 것입니다. 세겜과 밀로 사람들은 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을까요?
아비멜렉은 원래 왕이 되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내면에 상처가 많고 욕망이 강한 사람은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상처는 반드시 보복과 폭력성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고, 욕망은 절대 꺾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남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자기 형제들을 잔인하게 죽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같은 민족이니 우대하고 잘 살게 해줄 것이라는 열망으로 그를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기드온의 아들이 이방 사람들의 왕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기드온의 열망이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세속적이었는지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때 아비멜렉의 살해를 피해 도망갔던 요담이 산꼭대기에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7]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요담은 이들이 당장 추격할 수 없는 산꼭대기에 가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외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8절부터 15절의 비유에는 여러 나무들이 감람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감람나무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는 기름을 내야 한다고 거절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 포도나무는 포도주를 내는 일이 있어서 이 왕이 되면 좋을 법한 유익한 나무들은 모두 거절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가시나무에게 요청합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14]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5]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가시나무의 용도는 기름도 열매도 포도주도 아닌 불태워 쓰는 불쏘시개일 뿐입니다. 지금 성경은 이 비유를 넣어 가시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심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네가 전체를 태우는 심판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무슨 비유인지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16]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의 손이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이스라엘은 물론 가나안에 있는 세겜과 밀로 사람들도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얻어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혜택을 베풀어준 기드온의 자식들을 다 죽여버리는 것이 선대하는 것인가, 너희는 복을 받을 못할 것이다’라고 요담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결국 20절에 이들이 행한 일로 하나님이 이들을 심판하실 것을 요담이 선포합니다.
[20]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악인들이 서로 불태워서 심판당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요담의 예언이 9장 하반부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보면 요담이 인간적인 한을 풀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선포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아비멜렉도 나중에 죽임을 당하고, 아비멜렉이 부족 사람들을 다 죽이고, 서로서로 죽이면서 난장판이 되어 버립니다. 한 마을과 지역 전체가 초토화가 되고 결국 공동체가 완전히 다 사라져버리는 비참한 결국을 맞이합니다. 성경은 왕 되고자 하는 인간의 무서운 열망이 가정 뿐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을 파괴하는 비참한 결국을 만들어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이상한 한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교회 안에도, 사회에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죄성은 늘 참혹한 결과를 수반합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내 말을 듣게 하기 위해 무서운 행위를 하고 계시지는 않나요? 이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다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은 기드온처럼 편안하게 살다 끝날 수 있지만 그 결과로 자손 대대로 가정과 공동체가 파괴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욕망보다 왕 되고자 하는 욕망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것을 벗어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가족과 여러분이 속한 모든 공동체에게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