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아비멜렉의 후에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하여
[2]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지 이십삼 년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
[3]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4] 그에게 아들 삼십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두었었는데 그 성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칭하더라
[5] 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
사사기에는 유명한 대사사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소사사들도 존재합니다. 한두 줄로 묘사된 사람들이라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본문에도 두 명의 소사사인 돌라와 야일이 언급됩니다. 그 외에도 사사기에는 삼갈, 입산, 엘론, 압돈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역할이나 중요도가 떨어져서 소사사라고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대사사와 소사사의 결정적 차이는 큰 전쟁의 유무입니다. 대사사들은 큰 전쟁에서 승리를 했고 그 전쟁의 과정과 결과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된 것입니다. 소사사들은 전쟁이 없는 시기에 통치했던 사사들로 그들을 다른 말로 재판 사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대사사보다는 소사사의 시기가 훨씬 살기 좋았을 것입니다. 전쟁사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을 이끈 중요한 장군, 전쟁이 시작하게 된 계기, 상대의 수, 전략 등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그러나 전쟁사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가요? 소사사들은 평화의 시기가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영향력을 미쳤을 것입니다.
이 소사사들이 다스린 시기가 상당히 깁니다. 돌라는 23년, 야일은 22년으로 합치면 45년이나 됩니다. 농사를 짓고 추수 때에 곡물을 뺏길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압제로 누군가가 죽거나 노예로 끌려갈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45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기가 오래 지속되었더니 어떤 문제가 발생하나요? 6절입니다.
[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사사기에서 가장 많은 신들이 나오는 구절입니다. 평소에는 바알과 아세라만 주로 섬겼는데 이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람, 시돈, 모압, 암몬, 블레셋의 신들까지 섬길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평화의 시기가 길게 주어졌더니 이들의 우상숭배 또한 강력해지고 다양해진 것입니다. 왜 평화의 시기에 우상숭배가 더 다양해지고 깊어지는 것일까요?
우상 숭배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유지됩니다. 수능을 앞두고, 아이를 갖기 위해, 또 여러 원하는 것들을 빌며 우상에게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에게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능성이 있으니 열심을 부려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시기에는 어떤가요? 고난은 나의 능력이나 평소 살아가던 방식으로 해결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우상을 의지해도 해결이 되지 않으니 그것이 고난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이 인생에서 고난을 당했다고 하면 돈으로 해결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시기에는 우상을 더 깊이 의존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내가 믿는 우상이 나를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화의 시기는 다릅니다. 평화의 시기에 우상을 의지하면 내가 욕망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평화의 시간들을 지나갈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물론 평화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평화만으로는 하나님 백성의 인생은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평화를 통해 유혹을 받고 우상 숭배적 경향성이 튀어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9절입니다.
[9]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하나님이 때마다 다양한 족속들로 이스라엘에 개입하십니다. 이번에는 이전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암몬이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이것으로 이스라엘은 곤고해집니다. ‘곤고’라는 히브리어 ‘야차르’는 좁은 틈 안에 누군가를 밀어놓고 압력을 가해서 힘들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현대에도 ‘야차르’와 거의 유사하게 사용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좁은 곳에서 사방으로 눌려 견딜 수 없이 압박 받는 상태입니다. 인생의 모든 곤고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남보다 유달리 소심하거나 실제적 잘못을 했을 때도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인생에 곤고를 주시면 우리 안에서 특별한 영적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그 때 하나님이 특별히 개입하여 곤고를 허락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곤고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우상 숭배를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vv.10-14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생을 곤고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첫 번째로 우상숭배를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평화의 시기에는 절대 고백하지 않았을 자신들의 죄악의 고백입니다. 계속 우상숭배에 대한 유혹을 받았고 다양한 우상들을 섬겼는데 곤고가 임하기 전에는 그것이 죄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자기도 자기가 무엇을 우상으로 섬기는지 모르는 성도에게 어느 날 이런 때가 옵니다.
차라리 이스라엘 백성처럼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면 쉽게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도 사실 사람들 내면에 보이지 않는 우상을 겉으로 만든 모형입니다. 사람들이 왜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나요? 풍요에 대한 열망 때문입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비를 내려주면 남보다 더 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가장 열망하는 우상은 풍요입니다. 풍요에 대한 열망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공허해진 영혼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힘으로 풍요하기를 열망하는데 이것이 우상숭배라고 고백하게 되기에는 반드시 곤고가 필요합니다.
평화의 시기에는 우리가 어떤 우상을 의존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으나 곤고가 찾아오면 우리가 영혼 깊이 의존했던 본질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하고 섬기고 의존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싫어하시는 이유가 11절과 12절에 나옵니다.
[1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12]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많은 족속들은 모든 인간을 노예로 삼고 괴롭히는 마귀와 세상의 영향력을 비유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더라면 마귀와 세상의 노예로 매일을 곤고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사람답게 살게 하며, 마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말고 다른 구원의 수단을 찾습니다.
고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는 지금도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오히려 더 교묘해졌습니다. 안정, 힘, 쾌락에 대한 열망 등에 대해 우상들은 무엇을 약속하나요? 그 욕망을 채워준다는 약속합니다. 물론 모두에게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상은 자기가 힘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세상의 소수를 택해 그들에게 안정, 힘, 쾌락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그 소수가 되고 싶어 하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 소수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질적 풍요가 주어지는 순간 모든 영적 갈망이 다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영적인 것을 잘 보지 못합니다. 항상 흐릿합니다. 가끔씩 은혜가 우리 인생을 뚫고 들어올 때만 가끔씩 맛볼 뿐입니다. 그때 우리가 찬양하며 은혜에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잘 안 보입니다. 우리는 늘 눈을 뜨고 살아가며 세상에서 더 좋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 큽니다. 그 물질이 많이 주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영적 갈망은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욕망을 물질적인 것으로 채워주시지 않습니다. 채워주신다고 해도 그것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죄가 가져온 공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만 만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의 공허에다가 물질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만족이란 생길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보이는 무엇인가로 인생을 바꾸기 원합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상에 빠져 있는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번이 처음인가요? 아닙니다. 그렇게 고통하고 힘들고 곤고에 처해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도 협박을 하십니다. 13절, 14절입니다.
[13]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14]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진짜 다시는 구원하시지 않나요? 아닙니다. 부모 자식 간으로 비유해 본다면 이해하기 쉬우실 것입니다. 조건을 걸고 협박한다는 것은 자식이 위험에 처하지 않고 바른 길을 가기 원하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유혹받을 수밖에 없는 우상숭배를 드러내고 고백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곤고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겸손히 하나님의 처분을 간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vv.15-18
두 번째로 하나님이 인생을 곤고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겸손히 하나님의 처분을 간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협박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15절에서 이렇게 반응합니다.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이것은 자기의 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처분을 구하는 자들의 고백입니다. 언제 이런 고백을 하게 되나요? 우리의 옛 사람이 꺾일 때입니다. 우리가 우상 숭배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풍요와 힘을 삼고자 하는 옛 사람이 너무 강력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옛사람이 꺾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순간 각자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개입해 오시면 그때 이 고백이 우리 안에서 튀어나오게 됩니다.
이 고백을 하게 되면 인생의 길이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하나님 백성으로 잘 살고 싶어도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곤고를 통해 꺾임을 경험하면 마음 속에 희미했던 음성이 어느새 내가 순종할 수 있는 큰 음성이 됩니다.
물론 한 번 꺾였다고 항상 온전한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또 우상숭배하고 또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또 구원해주십니다. 꺾임의 과정을 통해 옛사람의 힘이 약해지는 것이 바로 구원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주도권을 원하십니다.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일은 횟수로도 반복이 되고, 인생의 다양한 영역에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납니다. 특히 자기가 자신 있어 하는 영역일수록 그 고백이 늦게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중요한 영역에서 결국 고백해야 합니다. ‘우상숭배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어떤 처분도 받아들일 테니 구원하여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포기의 태도가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나요? 16절 상반절입니다.
[16a]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
내적으로 포기했더니 이방신들을 다 없애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이 꺾이는 순간 그 영역에 대해 하나님께 이전보다 빨리 나아가고 죄를 인정합니다. 옛날에는 자주 화내던 사람이 내 힘으로 내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꺾이면 하나님께 내어드리게 됩니다. 이후에 화가 안 나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가 지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16절 하반절입니다.
[16b]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끊임없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존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근심하시며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생각하시자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17절과 18절입니다.
[17] 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을 치고 [18]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
하나님이 곤고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마지막 단계는, ‘누구라도 나서서 우리를 구원한다면 그가 우리의 머리가 될 것이다’는 고백입니다. 지금 자기들 안에는 구원자가 없습니다. 백전백패입니다. 그래서 다음 장에서 그들이 멸시하여 멀리 떠났던 구원자인 입다를 불러옵니다. 누구를 모형하나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모통이 돌을 모셔다 그분을 구원자로 열망하게 만드는 과정이 바로 곤고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인생 가운데 평화나 곤고 모두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물론 평화가 45년이나 길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의 시기를 거치며 우리 안에서 점점 커지는 우상숭배를 하나님께서 곤고를 통해 드러내실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복종하여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상숭배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처분만을 온전히 열망하고, 나를 구원하시는 분을 나의 리더이며 하나님으로 제가 믿겠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예수만 온전히 의존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