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2]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3]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4]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5]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
조선시대에 허균이 지은 유명한 소설 [홍길동전]이 있습니다. 홍판서라는 사람이 종에게서 낳은 홍길동은 어려서부터 아주 비범해서 홍판서의 본 부인과 그의 아들들이 홍길동을 시기하고 미워하다 결국 자객을 보내 죽이려 합니다. 홍길동은 집에서 도망쳐 방랑을 하다가 도적의 소굴에 들어가 두목이 됩니다. 그가 할빈당이라는 무리를 만들어 전국 수령들의 재물을 탈취하자 그의 신출귀몰을 감당하지 못한 조선의 왕은 홍길동을 병조판서로 삼겠다고 합니다. 물론 타이틀만 준 뒤 죽이려고 했으나 홍길동은 도술을 써서 도망을 갔고 최종적으로 율도국이라는 남해의 한 섬을 발견해 정착하고, 많은 백성을 데려다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홍길동전은 무슨 목적으로 쓰여진 것일까요? 이 책 안에는 당시의 사회 문화가 다 담겨 있습니다. 우선 탁월한 서자들이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입니다. 저자인 허균부터가 서자였습니다. 자신과 같은 탁월한 사람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불합리한 사회의 부조리를 빗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지방 수령들의 악행을 고발하고,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며, 또한 백성들이 다 함께 잘 사는 이상향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 홍길동전과 아주 유사한 이야기가 바로 입다의 이야기입니다. 차이점이라면 홍길동전은 소설이고 입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기록된 사실, 역사라는 점입니다. 입다는 우리에게 앞으로 구원자가 어떠한 모습으로 오실지를 가르쳐 줍니다.
입다는 어떻게 구원자의 모형이 될 수 있나요?
1.형제들로부터 버림받은 창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vv.1-3
그렇다면 입다는 어떻게 구원자의 모형이 될 수 있나요? 첫 번째로 형제들로부터 버림받은 창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1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a]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
큰 용사, 전사인 입다는 우리를 모든 싸움에서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큰 용사인 입다의 과거 출신은 어떠했나요? 1절 하반절을 보시면
[1b] …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옛날 번역이라 기생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이는 창녀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과 관계를 하는 창녀가 낳은 입다가 길르앗의 아들임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마 길르앗은 이 창녀를 자기의 전용 성적 대상으로 삼을 만큼 영향력과 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길르앗이 속한 지파 이름이 길르앗 지파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지파의 이름으로 쓰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창녀를 독점하고 자식까지 낳았지만 그 이후를 책임지지 않아서 2절에 가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2]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앞서 홍길동이 쫓겨난 것은 어려서부터 탁월함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입다도 시키는 일만 하고, 형들이 놀려고 웃기만 했다면 일꾼처럼 그 집에 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동력이 되는 성인 남자를 내쫓았다는 것은 능력, 힘, 통솔력 등 어느 면에서 본처의 아들들은 갖지 못한 탁월함을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쫓겨난 입다는 어떻게 되었나요? 3절입니다.
[3]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홍길동은 도적의 두목과 대결하여 두목의 자리를 따냈지만 입다는 돕 땅에 거주하자 잡류들이 모여들었고 그들과 생활하다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잡류’의 원어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입니다. 돈, 힘, 지위, 영향력을 갖지 못한, 아무도 신경 안 쓰는 무리, 요즘으로 치면 노숙자들이나 부랑자들입니다.
입다 입장에서는, 능력은 탁월하나 집에서 쫓겨나고 질투를 받고 결국 부랑자들과 사는 인생이 불행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아시다시피 요셉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왜 애굽에 팔렸나요? 사도행전 7장 9절입니다.
행 7: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
요셉도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팔려갑니다.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해서 자신들보다 뛰어나지 못하도록 팔아버린 것인데 결국 요셉이 무엇이 되나요? 그 형들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됩니다. 요셉만이 아닙니다. 다윗도 똑같은 과정을 겪습니다. 사무엘상 22장 2절입니다.
삼상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은 형제들이 아닌 장인어른의 미움을 받아 쫓겨납니다. 그러나 과정은 같습니다. 잘난 사위를 못 견딘 장인이 시기하고 죽이려 하자 다윗이 도망쳐서 아둘람이라는 곳에 머무는데 환란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 등 입다에게 모여든 잡류와 같이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아니고 의지할 것 없는 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역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됩니다.
왜 성경에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일까요? 성경은 바로 이들을 통해 형제들에게 미움받고 시기를 받아 쫓겨난 창녀의 아들과 같은 아무것도 아닌 자가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로 오실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분이 누구신가요? 우리가 매주 듣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무엇이라 부르나요? 마가복음 12장 10절을 보시면
막 12: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요즘은 콘크리트로 집을 짓지만 옛날에는 기초를 다지기 위해 돌을 사용했고 그중 제일 중요한 돌이 바로 모퉁이에 놓는 돌입니다. 모퉁이에는 큰 반석으로 기둥을 세울 수 있게 만들어야 집이 견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부릅니다. 불필요한 것 같아서 버렸는데 알고 보니 그 위에 건물이 세워져야 하는 중요한 돌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이렇게 버렸나요?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나중에는 자기 민족에게 버림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인간의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얻어야 할 영광과 권세를 예수가 가져가는 것이 못마땅해서 그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마가복음 2장 15절을 보시면
막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예수님 당시에 세리와 창기들은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도 아는 척도,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던 이들과 예수님이 어울리시자 사람들이 비난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잡류와 어울린 입다와, 환난 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과 어울린 다윗처럼, 죄인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구원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입다가 창녀의 아들인 것과 예수님이 무슨 관계가 있나요? 이사야 57장 3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사 57:3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아 너희는 가까이 오라
성경에서 말하는 음행이나 더러운 행위는 사실 남녀 사이에 벌어지는 일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1대 1로 맺어진 혼인관계로 여기시는데 인간들은 늘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사랑합니다. 구약 성경 내내 바알이 수백 번 넘게 나오는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섬긴 시절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주시는 게 너무 많아서 늘 바알이나 아세라나 몰렉을 함께 섬겼습니다. 성도 가운데도 기도 오래 했는데 하나님이 안 주시는 게 많아서 실망하고 그런 것들을 줄 만한 대상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음행, 창녀짓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창녀입니다. 하나님하고만 온전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의존하는 창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아들, 즉 창녀의 아들로 오셔서 입다와 똑같은 자리에 서셨습니다. 심지어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예수님을 이렇게까지 표현합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처럼, 죄와 비슷하게, 죄인의 몸만 입고’가 아닙니다. 죄가 되셨습니다. 우리처럼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죽어야 할 십자가에 달리셔야 우리가 그의 의를 덧입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약에서 계속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대신해 내가 구원자를 보내겠다. 출생으로는 구원자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로 인해 실족할 것이다. 그를 미워하고 심지어 죽일 것이다. 내가 눈을 열어준 사람 외에는 그를 구원자로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입다 이야기는 한 영웅이 살았다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구원자 예수를 믿으라는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여러분은 사람, 힘, 돈, 자기를 의존하지는 않나요? 인간의 위기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입다 이야기는, 입다처럼 오신 예수만을 믿어야 할 하나님 백성이 다른 것을 의존해서 발생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입다는 어떻게 구원자의 모형이 될 수 있나요?
2. 위기로부터 구원할 유일한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vv.4-11
두 번째로 입다는 어떻게 구원자의 모형이 될 수 있나요? 위기로부터 구원할 유일한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4]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이제까지의 위협과 다르게 실제 전쟁이 벌어지려고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5절과 6절에 급하게 입다를 찾아갑니다.
[5]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장관’은 싸움을 대신해 싸우는 전사입니다. 이들은 사실 이전에 입다를 쫓아냈습니다. 가문의 제일 힘있는 길르앗이 아들들 사이의 반목과 질시에 아무 개입도 하지 않고 묵인했다가 이제 와서 급하니까 와서 장관이 되라고 요청하기가 싫었을까요? 가장 불러오기 싫은 사람을 왜 부르러 왔나요? 다른 구원의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언제 예수님을 믿게 되나요? 다른 구원의 수단이 아무것도 없을 때입니다. 물론 믿음에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이 알게 되는 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사람처럼 살 수 없습니다. 찬송가도 몇 곡 알게 되고 공예배에 빠지지 않는다고 믿음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한 가지만 요구합니다. 예수 믿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모르면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제 믿음이 커진 중요한 근거가 성경을 통해서였습니다. 창세기에도 예수, 출애굽기에도 예수, 성경 전체에 몇천 년 전부터 예수를 통해 구원한다는 이야기를 차곡차곡 한 치의 오차 없이 써놓으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모든 말씀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경험하며 예수님을 점점 믿게 된 것입니다. 그것 외에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가 10장 9절에 나와 있습니다.
10:9 …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곤고’라는 히브리어 ‘야차르’는 사방에서 눌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이 몸이 끼어 자유를 잃어버린 것 같은 상황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곤고의 때에 낙심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에게는 곤고가 왜 필요한가요? 다른 것 붙들지 않고 창녀짓을 내려놓고 예수를 향해 구원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찾아오자 입다가 7절에 무엇이라 답하나요?
[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
이전에 쫓아내놓고 필요할 때 도와달라니 거절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장로들은 장로들대로 절박하여 자존심도 내려놓고 입다가 받아들일 만한 조건을 내놓습니다. 8절입니다.
[8] 그러므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매
앞에서는 장관이 되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한 단계 높여 머리가 되게 해주겠다고 합니다. 장관과 머리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장관은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전쟁을 해야 되니 전쟁 장관으로 세워주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장관에 대한 보상과 예우가 있겠습니다만 목적을 성취하고 나면 장관은 해임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머리는 최고 지도자입니다. 문제를 해결한 후에도 계속 그들을 통치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입다는 9절에서 약속을 재확인합니다.
[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입다는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자기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쫓아냈고 지금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려고 하자 약속을 얻어내고자 합니다. 다른 수단이 없던 길르앗 장로들은 10절에서 약속합니다.
[10]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이 약속이 아니고는 입다를 데려올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서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하고는 11절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식을 통해 입다를 머리로 세우기로 합니다.
[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
결국 쫓겨났던 입다가 머리가 되고 또 문제를 해결할 장관이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왜 기록되었나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지를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우리도 언제 예수님을 찾아와 간절히 간구하게 되나요? 곤고와 환란을 통해서입니다.
곤고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젊으면 젊은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곤고를 겪습니다. 물론 인생 내내 곤고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집중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곤고가 왜 필요한가요? 그제서야 이전에는 멀리 밀어놨던 예수님께 찾아와 도와달라고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곤고가 영적으로 본질을 뚫고 들어와 우리를 뒤흔들지 않으면 우리는 마치 길르앗 장로들처럼 머리를 내놓기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어도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는 본질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변하지 않고 우상숭배도 변하지 않아서 하나님께 장관 자리를 하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문제만 해결하라는 요구에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자리는 머리입니다. 인생의 모든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벼운 호칭이 아닙니다. 고대에 노예가 주인을 향해 부르던 호칭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는 ‘저는 노예입니다. 주인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여 주세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게 할 수 있나요? 결국 환란과 곤고를 통해서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머리로 섬기는 것을 배우는 자리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부부 관계를 머리와 몸의 관계로 설명하십니다. 에베소서 5장 23절입니다.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예수님이 머리이고 교회가 몸, 더 나아가 남편이 머리이고 아내가 몸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하나요? 안 지키면 혼나거나 불행이 닥칠까봐 복종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그렇게 관계 맺은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온전한 사랑을 받은 자는 그분에게 복종하여 ‘내가 가진 생명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의 뜻에 따라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복종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왜 아내에게 이런 복종을 요구하나요? 사실 남편에게도 동일한 요구를 한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권위의 관계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관계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거나 전근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종은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이고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사랑으로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고 예수님은 거기에 온전히 복종하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다해 교회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에 대한 반응이 바로 교회의 복종입니다. 이것을 왜 부부 사이에 명령으로 주신 것일까요?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삶에서 적용하기 얼마나 어려운가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죄가 만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창세기 3장 1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 구절은 생략법이 사용된 구절로 원 뜻은 이렇습니다. ‘너는 남편을 다스리기를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리기를 원할지니다.’ 즉 죄가 가져온 결과는 서로 다스리기 원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생명을 다해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사랑의 관계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이 관계가 깨져버립니다.
힘든 결혼과정을 지나며 훈련받는 것이 바로 구원의 과정이고 도구입니다. 인간이 원래 가야 될 온전한 모습의 끝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 죽기까지 사랑하고 온전하게 복종하는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과 복종으로 연합된 관계가 온전한 관계입니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유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또 복종한다는 것은 내 욕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사랑과 복종을 할 수 있는가를 삶에서 매일 경험케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25절에서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하나님과 영원히 맺기 전에 이 땅에서 특히 가정에서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축복된 자리입니다. 다른 사람을 통제하여 내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무서운 이기적 자아를 죽이며 복종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영적으로 얼마나 자랐는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더 복종하는가 아내를 더 사랑하는가는 지난주와 이번주를 비교하기 쉽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종하고 모든 사람을 목숨바쳐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그 한 사람에게는 해야 합니다. 배우자가 주면 나도 주겠다고 생각하면 평생 서로 줄 수 없습니다. 먼저 은혜받은 자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하고 복종하면 반드시 열매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복종하지 않고 창녀처럼 살면 인생이 쉬운 것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만두시지 않고 계속 개입하십니다. 지금 사사기에서 벌써 몇 번째 곤고, 환란, 결핍, 침략 돌아가며 당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요? 복종하는 자리에 오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이 평화의 시기를 주실 때가 있지만 본질 안에서 우상숭배로 살아가면 우리도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한 사람이 복종을 배우면 진짜 연합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상대방이 뭔가 나에게 해주니까 나도 해주는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으로 반응하는 복종입니다.
입다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내셔서 이스라엘의 머리로 삼으신 모형처럼, 예수님만을 머리로 섬기고 큰 은혜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