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2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9]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들에게로 나아갈 때에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게 붙이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본문은 성경에서 아주 어려운 본문 중 하나입니다. 입다는 전쟁에서 이기면 자신을 영접하러 나온 첫 것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약속했고, 실제 처음으로 나온 딸을 번제로 드립니다.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가 왜 성경에 기록되었나요? 이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과 구원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지난주 본문에는 입다가 구원자의 모형이었는데, 오늘 본문에 입다는 구원이 필요한 우상숭배자입니다. 이것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같은 한 사람이 어떤 때는 예수님의 모습을, 어떤 때는 구원이 필요한 죄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본문을 통해 입다가 어떤 우상숭배적 모습을 가지고 있고, 또한 우상 숭배자는 어떻게 구원받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상숭배자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나요?
1. 하나님과 거래하는 신앙입니다. vv.29-30
우상숭배자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나요? 첫 번째로 하나님과 거래하는 신앙입니다. 30절과 31절 말씀입니다.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지금 입다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전쟁의 승리이기에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해야 그가 길르앗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9절입니다.
[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동족에게서 버림을 당하고 비참하게 살던 입다에게 전쟁은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놀라운 기회이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입다도 부랑자들을 모아 나름의 군락을 이루고 있었을 뿐 큰 나라의 왕은 아닙니다. 암몬과 싸우기에는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에 승리가 간절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태도는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마음에 간절히 열망하는 것을 내 힘으로 이루지 못할 때 신의 힘을 비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빠지는 이유는 인간의 한계와 욕망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욕망이 있고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나, 문제는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욕망을 다 이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도 한국의 사람들은 기복적인 정신으로 신에게 정성을 보이고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에게 바치는 것은 사실 얻고자 하는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닙니다. 입다도 승리를 준다면 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을 바치겠다고 했지만 원문에는 이것이 사람인지 물건인지 짐승인지 표현이 모호합니다. 입다는 종이나 짐승을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입다가 하나님께 이런 거래를 제안한 것이 발생한 시점입니다. 29절에 의하면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나요?
[29]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신이 임한 상황에서 입다가 우상 숭배적 반응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임하면 어떤 것을 잘하게 만든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맞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성령은 연약한 인간에게 강한 힘을 주시고 하나님의 권능을 임하게 하십니다. 이곳에서도 입다의 능력으로는 승리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그의 능력을 뛰어넘는 은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때 입다가 하나님께 거래를 제안한 우상 숭배의 행위를 하게 된 것이 성령의 또 다른 역할입니다. 성령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의 죄악을 폭로하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에만 열광하지 죄악이 폭로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인간 내면에 숨은 우상숭배적인 죄를 드러내십니다. 바로 인간에게 진짜 구원이 필요한 영역은 외부의 전쟁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입다가 지금 강렬하게 열망하는 것이 전쟁의 승리이지만, 승리를 원한 더 근원적 이유는 이전에 받았던 상처를 뛰어넘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전쟁에서 한 번 승리했다고 모든 열망이 다 채워지나요?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좋은 것을 하나 가지면 더 좋은 것을 원하게 되고, 욕망을 위해 달려가다 보면 결국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입다에게 전쟁에 대한 승리뿐 아니라 입다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이 일이 바로 우리 인생에도 나타납니다.
자녀를 키워본 부모님은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자녀가 원하는 대로 돈을 주시나요? 참 부모라면 그 아이의 능력에 맞지 않게 과한 것은 제한하며 훈육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그런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우상 숭배적 욕구는 하나님이 한두 번 채워주신다고 해서 만족되지 않습니다. 본질이 변화되지 않고는 하나님과도 이웃과도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기에 성령은 평소에 드러나지 않던 잠재된 죄악들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할 중 하나에 대해 요한복음 16장 8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평소에 없던 능력이 나타나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이전에는 죄라거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영역에서 더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죄에 대해 민감하지 않다면 우리는 영혼이 이끄는 어떤 힘에 의해 선택하게 됩니다. 모든 선택에 끊임없이 욕망과 두려움이 영향을 미칩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또 두려운 것을 피하기 위해 선택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세상의 영향력에 따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이 성령을 강하게 보내셔서 본질에서 진짜 해결해야 될 문제들을 드러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를 고난이라고 여깁니다.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평소에 있던 내 생각과 지혜보다 뛰어난 것을 주셔서 모든 일이 잘 해결되는 것이 은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떤 상황을 통해 평소에 깨닫지 못하던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더 큰 은혜일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사는 동안 온 가족이 한국에 온 적이 딱 한 번 있습니다. 아이들 여권을 만들러 다른 주의 영사관에 갔어야 되는데 마침 그 지역에서 출장 영사 서비스가 그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류를 만들고 몇 시간을 기다려서 차례가 되었는데 집에서 출력한 사진은 규정에 맞지 않다고 거부를 당했습니다.
마음이 급했지만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근처 사진관으로 가서 사진을 찍고 4살과 8개월 된 아이들과 다시 몇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같은 영사에게 제출했는데 이번에는 얼굴이 너무 크다고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여권 찍는 사진관에서 찍었다고 해도 막무가내여서 실랑이를 하다 다음날 오전까지 영사 업무를 본다는 이야기에 다시 사진관으로 향했습니다.
항의를 했더니 자신이 취직한 첫 날이라 미안하다며 다시 찍어 주었습니다. 아까보다 얼굴이 작게 나왔고 자로 재어 봤는데 맞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도 부랴부랴 준비하는데 아이들 채비가 너무 더디고 마음은 급했습니다. 겨우 준비해서 모두 차에 태우고 급히 후진을 하는데 하필 그 시간에 들어오던 차를 박아버렸습니다.
원래 차가 다니는 곳이 아닌데 하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 트럭은 멀쩡하고 제 차만 찌그러졌습니다. 급하게 보험사에 연락해서 처리하고는 얼릉 영사 업무를 보는 곳에 갔습니다. 긴 줄 끝에 겨우 섰고 저희 뒤 몇 팀 뒤로 문을 닫았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 이제 원서를 내고 나오면 끝인데 어제의 그 영사가 이번에는 얼굴이 너무 작아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습니다. 어제도 두 번이나 거부해서 해서 찍어 왔고, 자로 재기까지 했는데 정확하게 어떤 이유로 안 되냐고 물었는데도 정확히 말은 못 해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폭발 직전이어서 그랬는지 한참 후에, 정밀하게 규정이랑 맞춰보고 조금이라도 오차가 있으면 반환하겠다는 조건부로 받아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못 견딜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기도를 했습니다. 수백 명이 멀쩡하게 지나가는 일이 왜 나한테만 걸림이 되는지, ‘왜 나만’이라고 생각을 하다가 과정들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왜 화가 나고, 왜 급해서 사고가 났을까. 그런데 과거에 비슷한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거나 누군가 가로막으면 마음이 격동하고 문제가 일어날 뻔한 순간들, 내가 원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을 향한 분노가 저를 사로잡아서 미칠 것 같이 만들던 것을 기억하게 됐습니다. 결국 내 마음대로 하려던 저의 근본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화나고 마음이 급해서 못 견디는 부끄러운 모습들이 하나하나 기억났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제가 인생 중 가장 성령 충만했던 때였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고, 성경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보면서도 영혼 안에서는 여전히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무서운 분노와 미움이 튀어나오는 본질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 비슷한 많은 일들을 겪으며 저를 격동케 하던 무서운 힘이 한풀 꺾이며 그 이후로 그런 분노와 미움의 힘이 정말 약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 그 이후로도 여전히 마음대로 안 되는 일 때문에 과거처럼 요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는 분이 어디 있나요. 지금은 마음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도, 기다리자, 때가 있겠지, 하나님이 일하시겠지라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노력해서 나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지배하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아 회개하고 인생을 드렸더니 옛날처럼 죄악이 저를 지배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나요?
2. 불완전한 신학에 바탕을 둔 신앙입니다. vv.34-40
두 번째로 우상숭배자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나요? 불완전한 신학에 바탕을 둔 신앙입니다.
입다는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암몬과 협상을 할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역사 신학에는 정통했지만 다른 영역의 신학은 불완전했습니다. 31절입니다.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인간을 번제로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해서 원하는 것을 주는 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인신 제사를 싫어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레위기 18장 21절입니다.
레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몰렉은 당시 바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행하던 신이었습니다. 지역에 따라 몰록, 그모스로도 불리는 이 신은 손을 앞으로 벌리고 있고 배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그 구멍에 장작을 피워 불을 뜨겁게 태우면 사람들이 자기 아이를 그 신의 손 위에 놓아 굴려서 배 안으로 떨어뜨려서 태워 죽이는 것이 바로 몰렉 숭배입니다.
우상 숭배는 자기 자녀를 태워 죽일 만큼 강렬한 뒤틀린 욕망입니다. 물론 자식도 귀하지만 그 귀한 것을 하나 바치고 신에게 더 좋은 것을 얻어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장자를 자주 바쳤습니다. 입다는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가나안 가운데 흐르던 요단강의 왼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오른쪽에 입다가 속한 길르앗이 사는 곳은 바로 모압과 암몬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몰렉 숭배에 가장 열심인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모아 왕이 아들을 제사로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열왕기하 3장 26절과 27절을 보시면
왕하 3:26-27 [26] 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 [27] 이에 자기 왕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
왕이 전쟁에 질까봐 모두가 보는 곳에서 왕세자를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어설프게 알던 입다는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받아 몰렉 숭배를 마치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을 다 자기 나름의 신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며 우리가 죄인이라는 큰 틀은 비슷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살아왔는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어떤 영향력을 받았는가에 따라 신학이 달라집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분, 666을 받으면 지옥 간다고 외치는 분, 드럼은 악마의 악기이며 하나님께는 찬송가로만 찬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 모두 자기의 생각을 신학으로 믿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두려움을 주는 책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번성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심을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가르치시는 위로의 책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의 필터로 세상을 보다가 잘못된 신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찬송가만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기가 어려서 은혜 받은 것이 찬송가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30세 이전에 들어서 좋다고 생각한 음악 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취향인데 그것을 하나님께도 반영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신학이 어떤 때는 나라를 망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부부입니다. 니콜라이 2세는 딸 셋을 낳고 겨우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혈우병에 걸렸습니다. 몸 내부에서 피가 나면 멈추지 않는 병을 쉬쉬 하다 보니 더욱 치료가 어려워졌습니다. 한 번은 피가 너무 오랫동안 멈추지 않아서 아이가 거의 죽게 되어 임종 미사까지 드렸는데 황제 부부는 라스푸틴이라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수도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라스푸틴은 오자마자 자기가 기도해서 치유하겠으니 모든 의학적 수단을 멈추라고 합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당시 아이에게 아스피린을 먹이고 있었는데 아스피린의 특징은 피를 응고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혈우병 아이가 아스피린을 먹으니까 피가 더 멈추지 않았는데 아스피린만 끊어도 상황이 호전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황제 부부는 라스푸틴을 절대적으로 의존했고 라스푸틴은 특히 황후를 조종해서, 아이의 병은 너의 죄 때문에 일어났으니 죄를 사하려면 내 말을 들어야 된다는 논리로 러시아의 모든 정치 결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든 장관을 갈아치우고, 황제를 전쟁터에 보내고, 결국 라스푸틴을 신봉했던 황제 부부의 잘못된 결정으로 1917년 러시아는 볼세비키 혁명으로 멸망당했고, 그 가을, 가택 연금되어 있던 황제와 가족들은 혁명군에 의해 총살되었습니다.
신학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내가 받은 영향력으로 신도 이럴 것이라는 착각이 개인과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던 입다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움직이시며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32절과 33절입니다.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번제를 드려서 승리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승리케 하셨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상숭배하며 하나님과 거래하고 자식까지 불태워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하는 우상숭배자는 원래 죽어 마땅합니다. 레위기 20장 5절을 보시면
레 20:5 내가 그 사람과 그의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하나님이 우상처럼 생각했다는 것,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가족을 파괴한 것이 죄입니다. 이렇게 우상 숭배한 입다는 구원받지 못하고 악하다고 성경이 이야기할 될 것 같은데 성경에 반전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2절에 입다는 믿음의 사람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다윗과 사무엘과 같은 반열에 있습니다. 우상숭배자가 무슨 믿음을 발휘했나요? 입다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죽어 마땅한 입다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다른 제물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34절입니다.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하인이나 짐승이라면 기꺼이 번제로 드렸을 텐데 하필이면 하나밖에 없는 딸이 가장 먼저 뛰어나왔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왜 기록하나요? 무남독녀라는 단어는 헬라어 모노게네스입니다. 이 단어가 나오는 다른 본문은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곳의 ‘독생자’가 바로 모노게네스입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 마땅한 우상 숭배자를 대신하여 죽어야 구원받을 수 있음을 구약에서부터 우리에게 그림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모노게네스, 독생자가 36절에서 아빠와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합니다.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만약 반항하고 도망갔다면 아빠가 쫓아가서 죽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딸이 죽겠다고 순종합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순종을 보여주고자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입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순종하며 죽음을 받아들여 십자가로 가실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37절과 38절에서 아버지에게 한 가지를 요청하고 두 달간 애곡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37]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처녀로 죽는 것이 뭐가 그렇게 슬프고 중요해서 처녀로 죽는 것 때문에 두 달을 울어야 하나요? ‘처녀’는 다른 뜻으로 ‘순결한 자’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우상 숭배자는 더러운 자입니다. 자기 욕망이 너무 강해 나밖에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죽어 마땅한데, 더러운 입다를 대신하여 순결한 자가 죽임을 당함을 보여주고자 성경은 계속해서 이 여인을 처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결국 두 달 후 39절과 40절에서 입다의 딸이 죽임을 당합니다.
[39]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즉 본문의 주인공은 입다가 아니라 사실 처녀 딸입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공도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입다입니다. 모든 사람이 우상숭배적 경향 때문에 자기도 고통하고 주변 사람들도 고통하게 합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더러운 우상 숭배자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과 6절입니다.
사 53:5-6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와 같은 죄인, 우상숭배자, 더러운 자를 대신하여 순결한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자는 이 땅에서 더러운 것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더라도 결국 입다처럼 믿음의 사람, 구원받은 자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 모든 우상 숭배적 경향을 회개하고 순결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구원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