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9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살면서 욕망 때문에 고민을 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물론 욕망이 전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먹고 싶은 것, 만나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것이 전혀 없는 상태를 우울증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대부분 인생에서는 욕망이 과도해져서 문제를 훨씬 많이 경험합니다.
우리는 욕망을 잘 조절할 수 없습니다. 욕망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며 욕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고민하고 계시다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사로잡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욕망으로 자꾸 문제가 발생하는데도 인지하지 못하면 그 결과가 파괴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과도한 욕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나요?
파멸을 가져옵니다. vv.1-6
과도한 욕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나요? 첫 번째로 파멸을 가져옵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암몬과의 전쟁이 끝난 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왜 일찍 부르지 않았냐고 화를 내며 입다와 그 집을 불태워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합니다. 이것은 가벼운 불평이 아니라 승리자를 향한 심각한 모욕이며 비난입니다. 분노가 너무 커서 상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하며 입다를 공격합니다. 에브라임의 이런 행위는 처음이 아닙니다. 사사기 8장 1절에 보시면
8: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8장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나고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비난을 하다니 습관적입니다. 사실 이들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두려워서 일찍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전리품 때문에 욕심이 난 것입니다. 즉 에브라임은 두려움과 욕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승리할 줄 알았으면 미리 참여할 걸 하면서 나중에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전쟁 소식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a]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
거대한 암몬 앞에 입다도 두려워서 하나님께 서원까지 하며 거래를 한 상황이기에 당연히 모든 이스라엘의 힘이 필요했고 에브라임도 불렀습니다. 에브라임이 안 온 것입니다. 그래놓고 왜 지금 오히려 큰 소리를 내고 있나요? 과도한 욕망이 그들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뿐 아니라 모든 사람은 다 욕망으로 힘들어하고 욕망으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도한 욕망이 지배하면 어떤 파괴적인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가르치시고자 에브라임 지파의 이야기를 기록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과도한 욕망으로 자꾸 문제가 생기고 있다면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이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혔음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과도한 욕망이 있는 사람은 자주 분노합니다.
사람은 모두 화를 내지만 특별히 과도하게 화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욕망이 큰 것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 자기를 지배하는데 그것이 좌절될 때 분노 또한 커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고 특별히 어떤 특질과 기질이 합쳐져서 나타납니다.
에브라임 지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 보니 거기서 욕심 내지 않으면 살 수 없고 그러다 보니까 집단적으로 이런 형태를 가지게 된 셈입니다. 이전에는 이런 우격다짐이 먹힐 때도 있었습니다. 기드온에게 왜 우리를 미리 부르지 않았냐고 따지며 대들었을 때는 기드온은 뭐라고 대답했나요? 사사기 8장 2절입니다.
8:2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너희들이 나중에 참여해서 마무리한 일이 대단한 일이야.’ 하며 기드온이 이들을 추켜세웠습니다. 왜 그랬나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디안의 왕과 잔당들이 도망치는 상황에서 기드온이 에브라임과 싸우면 미디안과의 전쟁을 끝낼 수가 없기에 에브라임을 달랜 것입니다. 그들은 욕망이 채워지자 감정이 가라앉아서 돌아갔고 기드온은 미디안의 왕을 사로잡고 전쟁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입다는 승리가 너무 필요했는데 자기 힘이 약하니까 두려워서 하나님과 거래를 했고, 잘못된 서원으로 인해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입다는 지금 승리의 기쁨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입니다. 분노와 죄책감과 억울함으로 가득한 입다에게 에브라임이 시비를 걸자 입다가 뭐라고 답하나요? 3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3b] …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하나님이 행하셨다고 먼저 밝힙니다. 숫자나 전력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된 전투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이 너무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너희 도움이 꼭 필요했던 것처럼 욕심을 주장하냐’는 논지로 이야기하며 결국 전쟁이 일어납니다. 4절 상반절입니다.
[4a]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
사실 입다는 내전을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암몬과 싸우면서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총과 포탄의 싸움이 아니라 육탄전이었을테니 몸도 지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4절 하반절을 보시면 에브라임 사람들이 선을 넘습니다.
[4b] …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단순히 입다만 도발한 것이 아니라 요단강 동편에 살고 있는 모든 길르앗 사람을 모욕합니다. 심지어 이들이 도망자라는 것은 사실도 아닙니다. 이들은 모세로부터 강 동편에 땅을 받아 정당히 살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12장 6절을 보시면
수 12:6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고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 땅을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더라
이들이 길르앗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요단강 동편을 정착지로 주셔서 거기에 머물게 되었는데 에브라임 사람들이 화가 나니까 선을 넘고 거짓을 사실처럼 말하며 모욕합니다. 사람은 분노에 사로잡히면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감정을 컨트롤하고 해야 될 말만 한다면 분노도 유익할 수 있습니다. 화를 전혀 내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노라는 감정 때문에 하지 말아야 될 말로 남을 파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다 과도한 욕망이 만드는 결과입니다.
모든 시작은 에브라임의 욕심입니다. 전리품을 얻지 못할까봐 생긴 초조함과 분노가 성공한 적도 있었기에 다시 욕심내어 시도해 본 것입니다. 이들이 알지 못했던 것이 있는데 바로 입다가 폭발 직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가 5절과 6절 상반절에 나옵니다.
[5]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6a]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
요단강에는 유속이 빠르다가 느려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그곳을 통해 도망가려고 하자 길르앗 사람들이 그 나루턱을 지킨 것입니다. 그리고는 ‘쉬’와 ‘시’의 사투리 확인법으로 에브라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6절 하반절을 보시면
[6b] …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남자 군인만의 숫자입니다. 사사기가 시작되기 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했을 때 에브라임 지파의 수가 민수기 26장 37절에 나와 있습니다.
민 26:37 이는 에브라임 자손의 종족들이니 계수된 자가 삼만 이천오백 명이라 …
시간이 흘렀으니 사람이 늘어난 것을 감안하더라도 3만 2천 5백명에서 4만 2천 명이 죽었다면 거의 다 죽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근데 이 원인이 무엇인가요? 과도한 욕망이 부른 파멸입니다. 이는 야고보서 1장 15절 말씀의 전형적 예일 것입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뭐 그렇게 큰 죄야? 누구나 욕심 있잖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욕심은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예가 많이 나옵니다. 단순히 ‘죄’라고 하면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가 만들어내는 욕심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다양한 예를 통해 보여줍니다. 대표적인 예가 라헬입니다.
라헬은 살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라헬이 몸도 아름답고 얼굴도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암양’이라는 뜻의 이름을 받을 정도로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존재였고 특히 예쁘지 않고 ‘피곤한’이라는 뜻의 언니 레아와 비교하여 항상 관심의 중심에 선 존재였습니다. 평균 1년 치의 몸값이면 되던 일반 처녀들에 비해 남편이 7년 치의 몸값을 내겠다고 했으니 그 매력과 값어치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어느 시점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 어려서 좌절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엄청난 분노를 경험합니다. 라헬이 분노하고 남편을 향해 아들을 만들어내라고 소리치자 야곱도 내가 하나님이냐며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아들이 생겼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얼마나 감사할까요? 그런데 라헬의 반응이 창세기 30장 23절과 24절에 있습니다.
창 30:23-24 [23] 라헬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감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아들 하나 낳았으니 아들 하나 더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름의 뜻이 ‘아들 하나 더’입니다. 요셉으로 만족하고 감사했어야 하는데, 끝이 없는 인간의 욕망으로 아들을 하나 더 달라고 했고 그의 바람대로 아들 하나가 더 주어졌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요? 창세기 35장 16절부터 18절입니다.
창 35:16-18 [16] …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렇게 원하던 아들을 하나 더 얻었는데 죽음이 찾아오자 아들을 ‘베노니,’ 슬픔의 자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야곱이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바꾼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라헬이 강렬히 원했던 욕망으로 라헬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욕망은 늘 죄악된 결과를 가져오고 그 죄악의 결과가 인간을 파괴로 이끕니다. 죄는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본질적인 것이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죄가 얼마나 나를 지배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드러난 욕망을 통해서입니다. 그 욕망이 과도해지면 파괴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예수를 통해 죄를 사함을 받아 이제는 남을 회복시키고 축복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를 믿으면서도 에브라임처럼 자주 분노하고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싸우고 선을 넘고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상태입니다. 에브라임의 이야기는 욕망으로 죽을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자유케 된 것이 복임을 깨달으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과도한 욕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나요?
2. 세속화와 영적 타락을 가져옵니다. vv.7-15
두 번째로 과도한 욕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나요? 세속화와 영적 타락을 가져옵니다. 입다는 전쟁 이후 6년을 통치하고 죽습니다. 그 후로도 평화가 오래 유지되었고 이 시기에 소사사들이 등장합니다. 평화는 대사사들이 자기 희생을 치르며 큰 전쟁을 해서 주변 강국들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의 시기에는 항상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평화롭다는 것은 다른 말로 풍요로운 시기입니다. 일상을 사는데 문제가 없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쾌락을 추구합니다. 소사사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첫 번째 소사사는 입산입니다. 8절과 9절 상반절입니다.
[8] 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9a]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
다른 얘기는 하나도 없고 아들 삼십 딸 삼십을 낳았습니다. 아내 한 명에게서 이런 숫자의 아이들을 낳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내를 많이 거느린다는 것은 그만큼의 재력과 능력이 있어야 되는 일입니다. 즉 입산은 평화의 시기에 자기 욕망을 충족하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쁜 여자 찾아서 결혼하고 애 낳고 또 예쁜 여자 찾아서 결혼하고 애 낳고 그러다 죽은 것입니다. 평화의 시기에 나타난 소사사들은 대부분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사사기 10장 3절과 4절 상반절입니다.
삿 10:3-4a [3]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4a]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
소사사들은 평화의 시기에 한 일이 결혼하고 애 낳고 결혼하고 애 낳고 가족을 불리는 일이었습니다. 두 명이면 우연인가 싶을 텐데 본문 13절에 압돈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13] 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14a]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
얼마나 일찍 결혼해서 애를 많이 낳았는지 손자 30명을 다 볼 때까지 대가족을 거느렸습니다. 하나님이 아이 낳으라고 사사로 세우셨나요? 사사의 역할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지도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고 이스라엘이 온전한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재판해야 하는데 그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사사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높은 자리이고, 그만큼의 재력과 영향력이 있었으니까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 상황 가운데 왕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이들이 아들만 많이 낳은 것이 아닙니다. 평화롭고 돈이 많고 평화롭고 자식이 많으면 결국 자기가 가진 모든 것으로 자녀들을 풍요롭게 하는 데 쓰게 되어 있습니다. 야엘이 그 아들들에게 한 일이 10장 4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10:4b …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
애들마다 자가용 한 대씩 사주고 지금으로 치면 빌딩도 하나씩 증여한 것입니다. 단순히 살 집이 아닙니다. 성읍을 주었다는 것은 성읍에 딸린 논과 밭과 사람들까지 주어 대대로 먹고 살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야일뿐만이 아닙니다. 14절 하반절에 압돈을 보시면
[14b] …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은 아들 40명 손자 30명에게 나귀를 주었습니다. 재벌집 회장님이 손자까지 자가용을 챙겨준 내용입니다. 그러다 점점 선을 넘기 시작합니다. 9절 하반절에 보시면
[9b] …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
자녀가 60명인데 이스라엘 내에서 결혼시킨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과 결혼을 시킵니다. 딸들은 이방인에게 시집보내고 이방인 며느리도 들여왔습니다. 자기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힘이 크고 능력이 많자 이스라엘에는 눈에 차는, 수준 맞는 가정이 없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더 잘나 보인 것입니다. 즉 평화 시기에 사사들이 절제되지 않는 욕망으로 자녀를 낳고, 돈이 많으니 자녀들을 풍요롭게 살게 하려다가 선을 넘어버린 것입니다. 과도한 욕망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물질이 영적 빈곤을 가져옵니다. 인간이란 고귀하고 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힘들면 인간은 자기의 연약함을 벗어날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영적이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약하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물질적으로 풍요해지면 하나님께 의지해야겠다는 근원적인 갈망이 우리 안에서 사라집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는 풍요해졌는데 영적으로는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사라고 하는 이스라엘 전체의 통치자가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는 모든 시대와 교회마다 나타나는 일입니다. 한국교회도 물질적 풍요의 시기에 들어섰습니다. 7,80년대 한국은 가난하고 위기도 많고 정치도 경제도 불안정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라가 부자가 되었습니다. 해외여행도 쉽고 생활수준도 나라 복지도 너무나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무슨 대가를 치렀나요? 사람들의 영적 관심이 사라져버리고 있습니다.
지금 20대 중 종교적 관심을 가진 사람이 20% 밖에 되지 않습니다. 10년 20년 지날수록 점점 줄어들다 결국 교회가 사라질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가 가져오는 반대급부적인 문제는 이 풍요한 세대의 모습에 우리도 똑같이 유혹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여러분의 욕망은 지금 어떻게 드러나고 있나요? 여러분을 지배하고 관계를 깨뜨리며 분노하게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기 마음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욕망으로 드러난 죄악에서 저를 구원하셔서, 제가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아름다운 영향력을 확장하는 인생으로 사용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하여 은혜의 통로로 만드실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