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4]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사사기의 클라이막스는 삼손이라는 독특한 사사 이야기입니다. 삼손은 모순된 면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출생은 신비롭지만 죽음은 불명예스러웠습니다. 어떤 사사보다 가장 성령 충만했으면서도 누구보다 깊은 목마름으로 자주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을 구원했지만 자신은 스스로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블레셋을 정복했으면서도 블레셋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사사들 가운데 가장 강력했지만 또한 가장 약해진 모습으로 맷돌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모순된 사사가 사사기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이유는 바로 삼손이 어떤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보여주며, 동시에 구원이 필요한 죄인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또한 신비롭게 태어나셔서, 성령 충만히 사역하시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며, 세상을 이기시고, 강하고 뛰어난 사사이셨습니다. 즉 강력한 사사 삼손을 통해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손은 동시에 죄인을 모형합니다. 죄의 삯인 수치스러운 죽음을 죽어야 하는 자들, 인생 내내 끊임없는 목마름으로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며 사는 자들, 그 결과 멸망으로 향한 길에 노예되어 살아가는 누구보다 약한 자들인 우리입니다. 삼손 한 사람 안에 구원이 필요한 우리들의 모습과 또한 우리를 구원하는 예수의 모습이 동시에 들어 있기에 사사기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이 강력한 사사를 이스라엘에 보내신 시기가 1절에 나옵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사사기에 이 똑같은 구절이 벌써 7번째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7은 완전수로, 인간은 항상 우상숭배를 하다 그 결과로 고통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 중요한 숫자가 40년입니다. 40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낸 기간입니다. 이것은 인생 전체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죄에 노예되어 살아가는 인생 전체의 시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에 40년간 노예된 고통에 비유한 것입니다.
40년은 당시에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은 어떤 때보다 어두움이 깊었던 시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깊은 어둠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가장 특별하고 강한 사사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민족적 상황만 어두웠던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 가운데 있던 한 가족에게도 깊은 어둠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마노아는 단 지파 출신으로 블레셋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동쪽 지역과 요단강 너머에 살고 있던 다른 지파들은 블레셋의 영향이 크지 않았겠지만 단 지파는 블레셋과 이웃하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약탈과 횡포가 심했을 것입니다. 민족적으로 이렇게 힘든데다 개인적으로도 아이를 낳지 못해 개인적으로도 깊은 어두움의 상황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깊은 어둠 속의 소망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무엇이 깊은 어두움 속의 소망인가요?
1.구원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vv.3-5
첫 번째로 구원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깊은 어둠 속의 소망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아이를 낳지 못하던 가정에 하나님의 사람이 찾아와 아이를 낳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이 아이가 바로 삼손입니다. 삼손의 뜻은 태양, 빛입니다. 즉 삼손은 어둠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민족과 마노와 부부에게 태양처럼 빛을 선사할 자입니다. 어두움에 빛이 비추이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구원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아이를 낳게 될 것이라는 예언만 주신 것이 아니라 4절과 5절 상반절에서 특별한 지시를 하십니다.
[4]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5a]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
이 세 가지 규정은 다 나실인의 규정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께 헌신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특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이 세 가지를 지켰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은 것은 지금과 같은 소주나 맥주를 마시는 개념이 아니고, 물이 워낙 나빴기 때문에 물을 희석해서 포도주와 섞어 살균하는 용도로 자주 마셨습니다. 또한 포도가 풍성한 지역이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거의 일상이었습니다.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포도주를 끊는 것은,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것으로 인생의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나의 기쁨을 삼겠다는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부정한 것에 손을 대거나 먹지 말라고 한 이유는 부정한 것이 죽음, 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더러운 것과 함께하면 안 된다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이 규정들은 삼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삼손의 어머니도 지켜야 했습니다. 삼손은 모태에서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어머니가 먹는 것이 삼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긴 머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셔서가 아닙니다. 나실인들은 6개월이나 1년과 같이 정한 기간 동안 헌신의 표시로 머리를 기르고, 그 기간이 끝나면 머리를 자른 뒤에 불에 태워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내 존재가 하나님께 소속되었으며,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나실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구별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5절 하반절에
[5b] …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되고 헌신된 자를 통해 목적한 일을 이루고자 삼손을 선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실인의 규정 가운데 민수기 6장 2절을 보시면
민 6:2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평생 부정한 것을 먹지 않고, 만지지 않고 하나님만 위해 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또 평생 머리를 기르지 못하니까 특정 기간 동안 머리를 길렀다 잘라 하나님께 바치며 ‘내 전부가 제물이 되어야 하지만 일부를 드립니다’라는 마음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6장 18절에 이 규정이 있습니다.
민 6:18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이렇게 나실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인생은 이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5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5c] …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이것이 삼손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된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온전한 나실인이며 사사 중의 사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예수님 또한 태어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천사가 와서 고지를 하는 장면이 누가복음 1장 30절과 31절입니다.
눅 1:30-31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의 뜻이 구원자입니다. 왜 천사가 고지를 했나요? 마리아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라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누가복음 1장 33절과 35절에 질문합니다.
눅 1:34-35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예수를 특별한 방법으로 보내심으로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겠다고 보여주십니다. 사실 삼손은 마노아 가정에 단순히 아기가 없기 때문에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불임 부부에게 아기가 생겼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어떤 상황인가요? 블레셋의 통치 아래에 고통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한 가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다고 모든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아무리 문제를 해결하려 해도 나라가 망하고 전쟁이 나고 전염병이 돌면 피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죄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실인이신 적이 없는데 왜 삼손의 모형인가요? 예수님은 나실인이라고 불린 적은 없지만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입니다. ‘나실인’은 나자르에서 유래된 단어이고, ‘나사렛’ 역시 나자르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나사렛’의 원 뜻은 ‘분리된 곳’입니다. 아마 지리적으로 워낙 외진 곳이라 그렇게 이름지어졌는지 모르나 이것 역시 하나님이 특별히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는 그 존재가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성경에서 주로 뭐라고 부르는지 요한복음 19장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요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이 패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예수가 어떤 역할을 하실 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이름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된 나실인으로 오신 구원자가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우리를 죄와 어둠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삼손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무엇을 주나요? 바로 소망입니다.
마노아는 구원자의 모형인 삼손을 보며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삼손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했나요? 강력하던 삼손이 힘을 다 잃고 비참한 모습이 되었을 때 얼마나 근심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삼손처럼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 온전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기에 인생의 어둠으로부터 자유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가 어둠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누가복음 1장 77절부터 79절입니다.
눅 1:77-79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돋는 해가 무엇인가요? 어두움이 짙은데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며 어둠을 다 물러가게 하는 놀라운 영향력. 이 단어가 헬라어로 ‘아나톨레’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고 성경 연구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 학교에 아나톨레라는 서클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목사, 전도사님들과 모여 성경 연구의 기초를 배웠습니다. 세미나도 따라다니고 좋은 선배들을 만났습니다. 그 때의 돋는 해의 도움으로 성경을 보는 기초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어두움에 빛이 비추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여전히 어두운 가운데 고통합니다. 단순히 한두 가지 문제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죽음과 죄의 영향력, 세상의 노예된 상태 자체가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심으로 어두움 가운데 예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무엇이 깊은 어두움 속의 소망인가요?
2.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vv.6-14
두 번째로 무엇이 깊은 어두움 속의 소망인가요?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마노아가 아닌 그의 아내에게만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6절과 7절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이야기합니다.
[6]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의 남편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오셨는데 그의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7]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하니라
부부 가운데 한 사람만 신비한 일을 겪었다면 배우자는 여러 생각이 들 것입니다. 진짜일까? 정확히 모든 이야기를 다 전달했을까? 의심과 혼란이 있을 수 있는 상황 가운데 그래도 마노아가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노아가 8절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8]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많은 가정 가운데 왜 마노아의 가정에 삼손을 태어나게 하신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상숭배가 너무 팽배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있는 상황 가운데 마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혼란한 가운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것이 사실인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10개월 뒷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9절 말씀입니다.
[9]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하나님이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믿음이 없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시지 않아서 그렇지 항상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는 내가 당장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은 여러 복잡한 상황들이 얽혀 있습니다. 마노아도 단순히 아기가 없어서 고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은혜와 능력을 베풀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이 가정 안에 얽혀 있었는데 마노아는 알지 못합니다. 이제 때가 되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개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아기를 달라고 기도했다면 오랫동안 응답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때와 우리 때의 차이입니다.
지금은 마노아에게도 이 아이가 하나님이 보내신 아이이며 특별한 방식으로 아이를 키워야 됨을 보여주실 필요가 있었기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10]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의 남편에게 알리어 이르되 보소서 전일에 내게 오셨던 그 사람이 내게 나타났나이다 하매 [11] 마노아가 일어나 아내를 따라가서 그 사람에게 이르러 그에게 묻되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사람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내가 그로다 하니라
부부가 함께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마노아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물어보나요? 12절입니다.
[12]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는 고백과 또 아이를 어떻게 가르칠지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입니다. 아내가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또 물어본 것일까요? 혹시 아내가 빠뜨린 것이 있는지, 주의해야 할 것이 더 있는지 물어보고자 한 것이죠. 그 대답이 13절과 14절입니다.
[13]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14]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하니라
하나님은 삼손을 태어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만드시길 원하셨습니다. 물론 삼손의 인생의 수없이 많은 굴곡도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나실인으로 태어나서 세례요한처럼 순결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살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사사 중의 사사인 예수를 보여주시고자 했을 뿐 아니라 또한 구원이 필요한 우리의 모습을 담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마노아에게 하나님이 왜 이렇게 나타나신 것일까요? 어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기도를 통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거는 열심이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이슬람 사람들은 모든 기독교인들보다 가장 규칙적이고 가장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빠져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소망의 빛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어두움이 자주 찾아옵니다. 그런데 무엇이 소망인가요?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신 것이 소망입니다.
믿음이 있고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결국에 응답하십니다. 지금 기도해도 내일 응답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계속 기다리면 마치 하나님이 마노아의 기도에 응답하여 구원을 보여 주셨듯 우리 인생에도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약 성경에 기도의 비유를 통해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3절을 보시면
눅 18:1-3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기도하다 낙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예수님은 기도하다 낙심하지 말라고 아예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재판장이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하는데, 반대로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에게 어떤 과부가 집요하게 매달립니다. 불의하고 나쁜 재판장인데도 불구하고 끈질김이 지겨워서 문제를 해결해 준 것입니다. 7절입니다.
눅 18:7-8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왜 ‘하물며’가 붙었나요? 의로우신 하나님과 가장 대비되는 나쁜 인간을 보여준 뒤, 이렇게 나쁜 인간도 응답하는데 그와 반대이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잘 응답하시겠는가?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이 이 비유의 핵심 구절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다 낙심하고 포기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개인적, 가족적, 전 세계적 어둠을 반드시 지나갑니다. 그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이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