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3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16]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17]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18]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19]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죄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알기도 어려운 영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그러나 영적이라고 해서 인간과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 존재에 영향을 미칩니다. 죄의 영향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독가스처럼 인간의 삶에 치명적 영향을 미쳐서 개인과 모든 관계들을 파괴해 버립니다.
보이지도 않는 죄가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죄의 영향력이 가장 강력한 모습은 인간의 자기중심성입니다. 죄는 영적으로 공허를 만들기 때문에 이 공허를 채우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이기성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이기성으로 자기도 파괴되고 남도 파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중심적 죄인은 어떤 태도를 보이나요?
자기 중심적 죄인은 어떤 태도를 보이나요?
1.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립니다. vv.14-17
첫 번째로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립니다. 지금 삼손은 동족인 유다 사람 3천 명이 삼손을 묶어서 블레셋에게 데려다 주는 위기 상황입니다. 본문 앞 절인 13절을 보시면
[13] 그들이 …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동족에게조차 도움을 받지 못하는 고립된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삼손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삼손은 원래 힘이 센 사람입니다. 수십 명은 때려 죽일 수 있지만 유다 사람 삼천을 피한다고 해도 수많은 블레셋 군대가 삼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절 상반절을 보시면
[14a]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
삼손이 줄에 묶여 끌려 나오자 블레셋 군대가 기다리고 있다가 소리 지르며 달려옵니다. 이들의 분노와 억울함도 이해되는 바입니다. 삼손이 먼저 내기를 제안했다가, 지니까 화나서 관계 없는 사람 30명을 때려죽여 옷값을 지불하고,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갔다고 화나서 여우 300마리를 풀어 블레셋 농작물들을 태우고, 화가 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 아내를 죽이자 이제는 정당하게 화를 내겠다며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습니다.
살인과 약탈과 무분별한 피해의 모든 원인이 삼손이었습니다. 억울한 블레셋 인들이 지금 삼손이 잡힌 것을 보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배후에 무엇이 있음을 알지 못했나요? 14장 4절을 쉬운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14:4 [쉬운성경] 삼손의 부모는 여호와께서 이 일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칠 기회를 찾고 계셨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동안 블레셋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구원을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삼손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14장 하반절입니다.
[14b] …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조차 예측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십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을 주셔서 새 밧줄이 불탄 삼처럼 끊어져 버렸습니다. 15절에 보시면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블레셋 사람들의 목적은 삼손을 죽이려는 것이었기에 군대가 내려왔습니다. 싸움이라는 것도 한 명씩 줄을 서서 일대일 대결을 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칼과 창과 몽둥이를 들고 앞뒤사방에서 삼손을 에워싸 공격을 했을 텐데 그런 적군을 삼손이 나귀 턱뼈로 무너뜨린 것입니다.
‘새 턱뼈’라는 단어에서도 삼손이 하나님과 관계없는 존재임이 드러납니다. 풍화되지도 않고 수분이 빠져 약해지지 않은 새 뼈라는 것은 시체의 일부입니다. 삼손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며,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머리를 자르지 말라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채 본능에 따라 살았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승리를 거두고 나면 무엇을 깨달아야 하나요? 평소 아무리 힘이 세도 몇십 명 정도일 텐데 천 명을 죽였다니,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16절입니다.
[16]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삼손은 자기 찬양의 노래를 지어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나귀’와 ‘더미’는 동음이의어라 시상이 떠올랐는지 자기를 찬양한 것입니다. 이 일은 삼손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를 죽음에서 구원하신 것인데, 삼손은 여전히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온 모든 찬양은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대부분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5장 1절에 모세의 찬양입니다.
출 15: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를 두고 죽음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 길로 인도하시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애굽 군대를 미리 막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모든 상황들을 허용하신 뒤에 거기서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보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만이 구원을 베푸십니다’라고 찬양하게 만드십니다. 위급 상황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똑같은 노래를 부릅니다. 사사기 5장 1절과 3절을 보시면
삿 5:1, 3 [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3] 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에 감동하고 그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인데 삼손은 ‘내가 두 더미를 쌓았어. 나는 대단해’라고 노래합니다. 심지어 너무 자랑스러운 나머지 그곳 이름도 바꾸어 부릅니다. 17절입니다.
[17]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레히’는 산이라는 뜻이고 ‘라맛 레히’는 턱뼈가 쌓인 산입니다. ‘내가 천 명을 죽여서 사람의 산을 쌓았다. 내가 놀라운 일을 했어’라고 자기 업적을 자랑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업적을 자랑하고 싶어 못 견디던 사람들이 성경에 몇몇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2절의 사울입니다.
삼상 15:12 …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
사무엘상 15장은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장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람을 세우시겠다’는 선고를 받은 장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에게 어떤 선고가 내려졌는지도 알지 못한채로 자기가 한 일이 자랑스러워서 기념비를 세웁니다. 이뿐 아니라 사무엘상 18장 18절에는 사울과 똑같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삼하 18:18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
압살롬도 자기 이름을 내고자 기념비를 세웁니다. 이것이 사울과 압살롬처럼 나쁜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경고인가요? 아닙니다. 이들은 인간 안에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옛사람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사울과 압살롬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다윗이 있는 것입니다.
샌드위치에서 중요한 것은 빵이 아니라 빵 사이의 고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사울과 압살롬 사이의 다윗입니다. 다윗이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자기 영광만 추구하는 겉사람에게 쌓여 있는 속사람은 오직 하나님이 만들어내셔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의 절반 이상을 쓸 정도로 평생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고난 가운데 구원하신 하나님을 갈망하며 은혜를 열망하는 노래들이 가득합니다. 어려서부터 제자 훈련받고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로 만들어내신 새 사람만이 자기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할 수 있으며, 그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사울과 압살롬, 삼손처럼 자기 영광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다 자기를 드러 내고 싶어합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무시당하거나 드러나지 못하면 화가 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보면 정상이 아닙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졌습니다. 영광은 우리가 어떤 능력을 발휘하거나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세상에서 높은 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고, 능력과 업적으로 내가 얼마나 괜찮은 존재인지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일들이 많아질수록 삼손은 더 추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더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삼손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영이 임하시지 않았으면 삼손은 죽었을 몸입니다. 사자를 만났을 때도, 삼십 명과 싸울 때도, 천 명과 싸울 때도, 이 이기적인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구원해 주셨지만 삼손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또한 그런 때가 얼마나 많나요? 인생을 돌아보면 많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시선을 돌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존재할 수도 없는 자였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 이것이 은혜의 결과입니다.
돈이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만약 돈이 없어지면 인생 전체가 무효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의 성공이 인생의 전부이고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자식이 원하는 대로 성공하지 못하면 그 인생 또한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그것을 우리가 갖지 못했더라도 먼지와 같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충만히 베푸셔서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는 모습만 남는다면 그것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특별히 사울과 압살롬은 당시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멋진 존재들로 일부러 묘사합니다. 사울은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고 하고 압살롬은 또한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잘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멋진 겉사람의 내면은 추하고 더러운 채로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우리의 참된 영광은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 영광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치 삼손처럼 불쌍하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열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바라보며 그 영광을 찬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자기 중심적 죄인은 어떤 태도를 보이나요?
2. 하나님을 자기 욕구 충족의 도구로 여깁니다. vv.18-19
두 번째로 자기중심적 죄인은 하나님을 자기 욕구 충족의 도구로 여깁니다. 18절 상반절입니다.
[18a]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
나실인으로 태어나 지금 나이가 꽤 든 상황인데 성경에서 삼손이 하나님을 찾은 처음 있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삼손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았습니다. 지금은 왜 하나님을 찾았나요? 심히 목이 마른데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목 말라요. 물 주세요’가 아니라 ‘나를 통해 놀라운 구원을 베푸셨는데 저 목말라 죽으라는 거예요?’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 있습니다. ‘이거 안 도와주시면 하나님 손해 아니에요?’
기도라는 것 자체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이니 하나님의 은혜에 의거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라는 태도입니다. 내가 대단한 존재이니 나를 당연히 도우라는 것은 협박입니다. 뒷부분은 더 가관입니다. 18절 하반절을 보시면
[18b] …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삼손은 사실 하나님의 율법인 할례와 관계없이 살았던 인생입니다. 삼손에게 할례가 중요하고 할례 받은 사람끼리만 교제해야 했다면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거나, 16장에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창기를 찾아갈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의 율법과 관계가 없이 살다가 죽게 된 순간에 율법을 들먹거리고 있습니다. ‘할례 받지 못한 저들에게 죽으라는 겁니까?’ 소리치는 삼손은 자기중심성이 큰 나머지 하나님마저 자기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성경이 삼손의 이런 모습을 이렇게 자세하고 깊이 기록하는 이유는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대조하고자 함입니다. 욕망으로 가득 차고, 자기 영광, 자기 찬양, 자기 예배밖에 없는 사람이 도움을 요청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떤 사람인데 날 안 도와줘?’ 라고 뻔뻔하게 나온다면 도와주려던 마음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삼손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보여줍니다. 19절입니다.
[19]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하나님이 우물을 터뜨려 물을 마시게 해 주십니다. 이렇게 물을 마셨다면 이제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생수를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또 무엇이라 이름 붙였나요?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부르짖었더니 샘이 터졌다’ 끝까지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삼손을 극화해서 우리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손처럼 힘이 강하지 않기에 구원 또한 극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잘한 영역들에서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삼손처럼 큰 산을 쌓은 뒤 엄청난 업적을 자랑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 우리의 욕구를 위한 간구만 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나요?
사실 우리 인생에는 우리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호흡을 가져가시면 무엇이 남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삶 전체가 은혜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존재를 향해 계속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았으면 삼손은 천 명과 싸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몇 십 명쯤 죽이다 칼에 찔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고, 목이 너무 말라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물이 터지지 않았으면 힘이 약해져서 블레셋 군대 지원군에게 발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이 계속 임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여정입니다.
여전히 이기적이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데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향해 계속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영을 부으시고 참된 생명을 충족할 수 있는 성령의 생수로 채워주십니다. 이 은혜를 깨달아 신앙의 여정이 길어갈수록 감사하고 찬양하셔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인생을 잘 꾸려왔다고 만족하고 계신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다 이기적 존재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삼손과 같이 살다가도 은혜가 임해 과거의 추함을 깨달아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것이 바로 성장이고, 은혜 받은 사람이 마땅히 보여야 할 태도입니다. 삼손과 같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은혜를 베푸시며 구원해 나가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