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삿 36: 하나님의 통치를 떠난 자의 삶(삿 19:1-30)
[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2]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3] 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
[4]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 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5] 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의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고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 하니라
본문은 성경을 통틀어 가장 엽기적인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본문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한 레위인이 들인 첩이 바람을 핀 뒤 친정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몇 개월 후 레위인은 첩을 찾으러 가서 장인에게 융숭하게 대접을 받고 며칠을 머물다 장인이 간곡하게 붙드는 바람에 늦게 길을 떠나서 어둠을 뚫고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마을로 갑니다.
마침 마을에 이방인으로 살고 있던 어떤 노인이 레위인을 대접했는데 문제가 생깁니다. 마을의 불량배들이 찾아와 손님과 성관계를 맺고 싶으니 내놓으라고 노인을 협박합니다. 실랑이 끝에 결국 레위인의 첩을 내어주고 불량배들은 그 여자를 밤새 집단 성폭행합니다.
레위인은 죽은 여인의 시체를 싣고 집으로 돌아가 시체를 12조각으로 토막 내어 이스라엘 12지파에 보낸다는 것이 사사기 19장 1절부터 30절의 내용입니다. 성경에 왜 동성애, 집단 성폭행, 시체 훼손 등의 엽기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었나요? 그 답이 1절 상반절에 나옵니다.
[1a]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
사사기에 왕이 없었다는 것은 단순한 정치체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음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얼마나 추하고 더러워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인간은 욕망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욕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중요한 동력입니다. 문제는 이 욕망은 건강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선을 넘어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강과 바다처럼, 있어야 할 장소에 있을 때는 아주 유용하고 필요하지만 물이 넘쳐버리면 홍수와 쓰나미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없는 상태가 바로 통제되지 않는 욕망의 상태입니다. 본문은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떠난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떠난 자의 삶은 어떠한가요?
1. 욕망에 사로잡혀 선을 넘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떠난 자는 어떻게 살아가나요? 첫 번째 욕망에 사로잡혀 선을 넘습니다. 1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1b] …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레위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중 특별히 거룩하게 지정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세우신 사람들로, 지금으로 치면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이 첩을 취합니다. 한글 성경은 ‘여자’라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어린 여자’로 아마도 10대의 소녀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가 욕망이 충천하여 성적 욕망을 위해 어린 여자를 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기쁨을 삼고 그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를 알라고 레위인에게는 땅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이며 기업이 되심을 삶으로 보여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레위인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쾌락에 흠뻑 빠져있었고 그것은 쾌락의 가장 큰 부분이 성적인 것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을 성경은 ‘선’ 혹은 ‘의’라고 하는데 욕망이 충천하면 하나님의 뜻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선의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 레위인은 또 어떤 선을 넘나요? 28절과 29절입니다.
[28] …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29]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레위인은 하나님이 거룩한 자로 지정하셨기 때문에 시체를 만지지 못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시체를 만지는 그 존재도 더럽혀진다고 여겨졌는데, 하나님은 레위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거룩한 자는 세상의 죽음과 관계없는 자들임을 보여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고대에는 시체가 훼손되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여겨져 시체 훼손을 터부시 했습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은 가차 없이 그것을 12조각으로 쪼개버립니다. 보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욕망입니다. 화가 나서 보복하고 싶은데 힘이 약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사람들을 동원하고자 율법과 상식을 어기고 시체를 조각내어 사방으로 보내버립니다. 이 레위인만큼 욕망에 충천했던 무리가 있습니다. 22절입니다.
[22] …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관계한다’는 ‘성관계를 하다’입니다. 낯선 남자와 성관계를 맺으려 했다는 것은 불량배들이 얼마나 욕망에 깊이 사로잡혀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이 첩을 성폭행한 것을 보면, 남자와만 관계하는 완전한 동성애자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남자를 내놓으라고 했나요?
모든 욕망은 한계 효용의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 끼니 먹다 보면 질리게 됩니다. 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감각이 집약되어 쾌락을 주는 행위인데 이들은 이제껏 원하는 대로 성을 즐겨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재미없어지자 새롭고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동성애에 대해 로마서 1장 26절, 27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롬 1:26-27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
로마 시대에는 동성애가 흔했습니다. 전쟁터에 아내가 애인을 데려갈 수가 없으니, 군영에서 많은 동성애가 이루어졌고 그런 문화가 사회 전반에까지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문화’라고 포장했지만 바울은 그것을 ‘순리’가 ‘역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고, 여자가 남자에게 끌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스러운 질서가 깨지고 뒤집어져서, 즉 ‘natural’이 ‘unnatural’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욕망을 증폭시켜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 늘 새로운 것을 탐닉합니다. 그중 제일 극단이 동성애인데 이에 더해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통이나 약물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현재 미국의 10대부터 30대까지의 사망률 1위의 원인이 되는 마약은 예전처럼 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특히 중국에서 싼 가격에 제조되는 펜타닐이라는 신종 마약은 몇 천원에 살 수 있어서 지금 미국을 뒤흔들고 있고 심지어 초등생, 중학생도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모든 쾌락은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마약을 통해 자극적 쾌락을 경험하면 평생 쓸 도파민을 한 순간에 다 분비해버립니다. 배고플 때 맛있는 것 먹으면 만족하고, 아이들이 웃는 것을 보면 미소가 나오던 사소한 일상으로는 더 이상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도파민이 한 번에 터지는 순간에는 강렬하게 기쁨을 경험했지만 그 후 모든 일상은 흑백처럼 변해버려서 다시 마약에 의존하는 악순환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짓밟으며 쾌락을 찾던 불량배들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창세기 19장 4절부터 5절의 소돔 사람들과 같습니다.
창 19:4-5 [4] …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천사 둘이 롯의 집을 방문하자 멀리서, 가까이서, 젊은이, 늙은이가 모여들어 이들을 성폭행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들을 뭐라고 부르나요? 창세기 13장 13절입니다.
창 13: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악’은 하나님의 ‘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다른 존재를 온전히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욕망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 되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욕망이 지배하기 시작하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죄인’이 되어 심판받고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세상에서 아주 흔하게 벌어집니다. 지난 주에 중국에서 어떤 사람이 1살, 2살 되는 자기 아이들을 아파트에서 집어던져서 죽였습니다. 불륜녀와 살고 싶은데 나중에 친자들이 거슬릴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바로 다음 날 한국에서도 40일 된 아기들이 운다는 이유로 쌍둥이를 질식사시킨 친모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내 뜻에 안 맞으면 자식도 죽이는 무서운 세상, 이것이 바로 욕망에 지배당해 자기도 알지 못하는 채 선을 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나요? 구약처럼 안식일을 지키거나 양을 잡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이자 선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지킬 수도 없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욕망에 지배당하는 인간은 본문의 등장인물들이나 뉴스에 나오는 엽기적인 소수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실행은 못 하지만 생각으로는 내게 유익이 되지 않는 존재를 어떻게 재단하고 있나요?
저 사람 없었으면 좋겠다, 귀찮고 지겨워서 내 눈에 안 보였으면 좋겠다, 너무너무 밉다, 라고 생각하셨다면 살인이라는 행위를 했건 안 했건 하나님은 똑같이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눈에는 본문의 등장 인물, 뉴스에 나오는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 그리고 우리가 똑같이 욕망에 사로잡히고 더럽고 추한 존재로 보인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까봐 성경이 극단적인 그림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악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떠난 자의 삶은 어떠한가요?
2. 자기 욕망을 위해 타인을 파괴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는 자의 삶은 어떠한가요? 자기 욕망을 위해 타인을 파괴합니다. 25절 하반절입니다.
[25b] …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나쁜 인간들입니다. 새로운 자극을 경험하겠다고 레위인을 찾았는데 실패하자 대신 나온 어린 여자를 밤새 성폭행했습니다. 아마 인원이 많았는지 여자는 밤새 시달리다 죽어버렸습니다. 이번 주 신문에도 자기 딸을 이천 번이나 성폭행한 남자 이야기가 실렸는데 판사 앞에서 한다는 말이 자기 딸도 원해서 했다는 것입다. 이런 미친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 참담한 일입니다.
물론 집단 성폭행 한 자들은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사악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들보다 더 나쁘다고 조명하는 인물은 바로 레위인입니다. 그가 오후 늦게라도 출발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인식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목사가 설교하려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과는 접촉하지 않으려 하는 등 율법을 잘 지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어떤 율법만 잘 지키나요? 자기 욕망을 저해하지 않는 율법만 잘 지킵니다. 첩을 들이고, 시체를 토막내는 등 욕망대로 움직이는 영역에서는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레위인의 첩이 성폭행 당해 죽었습니다. 25절 상반절입니다.
[25a]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
여자가 무리에게 우연히 잡힌 것이 아닙니다. 집 안에서 첩을 밖으로 밀어낸 것입니다. 욕망이 무서운 점은 사람을 도구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레위인에게 있어서 이 첩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쾌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니 자기 생명이 위협받을 때 희생양으로 삼은 것입니다. 아마도 이 여자는 성폭행보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배신감으로 절망해서 죽었을 것입니다. 이 레위인의 사이코패스적인 자기중심성이 27절 상반절에 나옵니다.
[27a]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밤새 잤다는 것입니다. 집 밖에서 첩이 수십, 수백 명한테 성폭행당할 때 집 안에서 잠을 잔 것도 기가 찬데 더 놀라운 점은 다음 절입니다. 27절 하반절을 보시면
[27b] …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28]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
사람이 엎드러져 있으면 일으켜 세우고 돌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일어나라 가자’라고 합니다. 바로 전 절까지 불량배들을 죽여버리고 싶은 분노가 치밀었는데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레위인의 무정함과 자기중심성은 이들보다 훨씬 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이 땅에 보여주라고 하나님이 특별히 세우신 레위인이 가장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되었음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욕망 때문에 선을 넘고, 사람을 도구로 사용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잘 읽으려면 레위인을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 레위인은 누구를 보여주나요? 우리 자신입니다. 모든 사사들이 우리의 다양한 약점을 보여주었듯 레위인 또한 욕망을 다스릴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는 레위인만큼 성욕에 시달리지 않을 수는 있지만 인간은 성별, 나이, 기질에 따라 다양한 욕망이 있어서 마치 두더지 잡기처럼 하나의 욕망을 다스렸나 싶으면 다른 욕망이 치솟아 오릅니다.
인간 안에 통제되지 않는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그 욕망이 관계를 파괴한다는 것을 알고 통제하고 싶어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욕망은 교묘하고 깊은 곳에서부터 인간을 끌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요? 1절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왕과 신하의 관계는 철저한 복종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과 주님이라고 부를 때는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셔서 내가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내 인생과 뜻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을 보시면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길은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술 취하지 말라고 하나요? 술에 취하면 사람은 어떤 힘에 사로잡혀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 뒤 술이 깨면 그 일을 기억 못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를 사로잡으시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만드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입니다.
갈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이 다스리시면 금지할 수 없이 자연스러운 열매가 나타납니다. 먼저 사랑입니다. 주변에 미운 사람이 없고 다 품을 수 있습니다. 기쁨입니다. 객관적으로는 절망할 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기에 노래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화평입니다. 상황으로 보면 바다처럼 요동하고 상대와 원수가 되어야 마땅한데 하나님이 다스리시기에 불안하지 않습니다.
오래 참음으로 남을 한없이 기다릴 수 있고, 자비로 상대방이 받아야 할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베풀 수 있고, 양선으로 좋은 것을 나누어 하나님의 선을 이루고, 충성으로 자기 말을 통제하고, 온유로 분노를 다스리고, 절제로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은 힘으로 여러분을 억지로 사로잡아 변화시키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욕망에 사로잡힌 추하고 더러운 존재임을 회개하며 자발적으로 내려놓을 때에야 하나님은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여러분 인생에 이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어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며 영광일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본문의 레위인처럼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지는 않겠지만 욕망이 다스리는 인생은 결국 주변 사람을 고통하게 하고 파괴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의 삶을 보여주심으로 우리가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본질 안에서 성령의 다스림을 받기를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영접하여 그분의 온전한 다스림 안에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