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19]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
[20] 이스라엘 사람이 나가 베냐민과 싸우려고 전열을 갖추고 기브아에서 그들과 싸우고자 하매
[21]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22]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니라
기도를 하다 보면 도대체 하나님이 듣고 계시는지 답답할 때가 많이 있으실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야 될지를 알려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성경에서처럼 하나님이 음성으로 말씀 하신다면 신앙이 쑥쑥 성장하고 우리는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확한 답을 듣고 어떤 일을 행했는데 그것으로 오히려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이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은 그때마다 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전쟁을 했는데 그들이 기대하던 것과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기대와 다르게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나요?
1.자기의 죄악을 깨닫도록 응답하십니다. vv.18-27
첫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나요? 자기의 죄악을 깨닫도록 응답하십니다. 18절 말씀입니다.
[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전쟁이 합당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수십 명의 불량배들이 레위인의 첩을 강간하여 죽였으니 불량배만 처단하겠다고 했는데 베냐민 지파가 제안을 거부하고 전쟁을 하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너무 세속화되어서 불량배들이 한 여성을 집단 강간하고 죽인 것이 그렇게까지 나쁜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지금 정당한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응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40만의 군대가 한꺼번에 진격할 수는 없기에 이들은 과거에도 선봉에 설 사람을 기도로 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곤 했습니다. 사사기 1장 1절과 2절을 보시면
삿 1:1-2 [1] …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유다 지파가 앞서라고 말씀하셨고 말씀을 따른 이들은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지금도 똑같은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전쟁이 악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여기고 있고, 하나님은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으니, 전쟁의 결과는 당연히 승리일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21절입니다.
[21]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객관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결과입니다.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뒷내용을 유추해 볼 때 베냐민 사람은 거의 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겨우 2만 6천인 베냐민 지파에게 40만 군대의 선봉이 완전히 패배한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는데 왜 최악의 결과가 나타났나요?
우리는 결혼, 이직, 이사 등 큰 일들을 앞두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종종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일을 행합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결정한 일들에 늘 행복만 있고 어려움이 하나도 없나요?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답을 알려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종종 낙심합니다.
본문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는데 실패가 뒤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22, 23절입니다.
[22]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니라 [23]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낙심을 딛고 다시 전열을 갖추었지만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왜인가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이 올라가라고 하셨고, 과거에 같은 상황에는 큰 승리를 거두어 가나안 땅을 얻었는데, 지금 어떻게 된 일인지 답답해서 운 것입니다. 그리고 여쭈었는데 또 올라가서 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번에는 이기겠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25절처럼 나타납니다.
[25] … 다시 이스라엘 자손 만 팔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베냐민 자손들은 멀쩡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또 1만 8천이 죽게 됩니다. 앞의 2만 2천과 합하면 4만 명입니다. 40만 군대가 2만 6천과 전쟁을 했는데 4만 명이 죽은 것입니다. 4만은 우연이 아닌 40만 명의 딱 십분의 일입니다. 십분의 일은 전체를 대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십일조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왜 10의 2조나 5조가 아닌가요? 20분의 1은 왜 아닌가요? 10의 1조라는 것은 1이 10을 대표합니다. 다 내 돈인데 9는 마음대로 쓰고 하나님께 1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인데 우리가 그 대표성으로 하나님께 반응하는지를 보시기 위해 10의 1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4만 명이 죽었지만 이것은 40만과 같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40만 명이 다 죽었어야 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한 불량배들과 그 지파인 베냐민을 징벌하러 온 선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시각입니다.
사사기 내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하며, 심지어 제사장 레위인까지 다 타락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악한 무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사실 심판당해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한 사건이 벌어지니까 자신들이 정당한 하나님의 대행자인 척, 불량배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판단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요? ‘너도 네가 정죄하는 그들과 똑같다. 나의 기준대로라면 너희는 모두 죽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무도 깨닫기 못했습니다. 즉 그들이 자기 죄를 깨닫도록 기도의 응답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근원적 차이입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이루기 어려운 것을 얻고자 혹은 미래가 불안해서 확답을 받고자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식으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자녀를 키워본 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실 것입니다.
자녀가 원하는 것을 모두 해 주는 부모는 사실 무책임한 부모입니다. 자녀는 욕망은 크고 인격은 미숙해서 당장 만족받기를 늘 요구합니다. 사탕 달라, 장난감 달라, 칼을 달라. 그러나 바운더리가 없이 욕망을 이루던 아이는 그것이 좌절되는 순간 괴물로 변해버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픈 사람은 건강을 기도하고, 돈이 필요한 사람은 돈을 기도하고, 불안한 사람은 불안을 해소할 확실한 단서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인가요? 아닙니다. 한 치 앞도 알지 못하고 정욕대로 구하는 우리는 궁극적 선을 알지 못합니다. 기도하는데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미궁으로 빠지는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자기를 돌아보게 됩니다. 26절입니다.
[26]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앞에서는 울기만 했습니다. 왜 울었나요? 너무 화가 나고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낙심해서 울었습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장난감 안 사 준다고 떼쓰고 우는 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울 뿐 아니라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번제는 죄를 사해달라고 희생물을 바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제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들을 징벌하고 악을 제하기 전에 우리에게 문제가 있구나, 문제 해결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구나’ 생각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수록 죄를 깨닫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고 기도 많이 하면 자기 죄에 대해 민감해집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죄에 대해 민감하지 않은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은 다 자기중심적어서 남의 문제만 커 보이고 자신에게는 방어기제를 사용합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성경이 아니어도 ‘똥 묻는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한국 속담도 있습니다.
이 시각의 변화는 노력이나 애쓰는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사업 성공하고 취업 잘 되고 안 아프고 자녀들은 좋은 학교 가기를 사람들은 원합니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간증이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도한다고 인생이 늘 망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존재를 온전하게 만들어가시는 과정에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죄를 깨달아야 하나요? 왜냐하면 죄를 깨닫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는 구원이 얼마나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죄의 기준은 도적질하지 않고 사기 치지 않는 사회적 규범을 지키는 수준입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죄의 기준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적 시각으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인간의 근원이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먼저 깨닫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 20여 년 전입니다. 그 때는 도저히 유학을 갈 수 없는 형편이어서 생각조차 안 했는데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조언해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전해주고, 원서를 출력해 주고, 토플 원서를 아예 대신 넣어주는 등 모든 일이 진행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중 입학 허가서에 ‘1년 학비 8만불 정도를 인증해 보내라’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런 큰 돈이 없으니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한 번도 통화해 본 적 없는 한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근황을 나누다 유학을 고려했다가 포기해야할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일단 한 걸음을 내딛어야 홍해가 갈라진다면서, 본인이 사랑의 교회를 나와 개척하실 때 옥 목사님이 5억 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던 간증을 해 주셨습니다. 옥 목사님의 기반이 아닌 하나님의 기반으로 개척하겠다던 포부에 주변의 모든 사람이 놀라거나 비웃었는데 남의 교회를 빌려서 드린 개척 창립 예배에서 5억원의 헌금이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상의를 드렸는데 마침 동생이 이사의 과정에서 집에 물이 새면서 전세자금 1억 5천을 잠시 가지고 있게 된 상황인 것을 알게 되어 그것으로 잔고 증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비행기 값, 이사 비용에 보태 쓰라며 많은 분들이 조금씩 도와주셨습니다.
여기까지 진행될 때도 제 안에 깊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상황은 맞지만 하나님이 확실히 말씀하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때 본당 2층에서 새벽 기도를 드렸는데 그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다 나가고 저 혼자 기도하는데 성령이 임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나며 마음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일승아 먼 여행을 떠나게 될 텐데, 떠날 준비가 되었니?’
그 음성을 듣는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잠시 공부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먼 여행이라니 공부가 길어지나? 그러나 한 편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돈 주시겠지, 문제가 없겠지 하는 안도감이 밀려 와서 가벼운 마음으로 남은 준비를 마치고 미국에 가게 된 것입니다.
많이 들어 다 아시겠지만 미국의 8년은 제 50여년 인생에 매일 울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기간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36개 들이 두루마리 휴지를 매주 샀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울었습니다. 아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프고, 공부는 안 되고, 아내는 가렵고, 차는 고장나고, 하는 일마나 망하고, 너무 화가 나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많이 울다 보니 나중에는 점점 제 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제가 큰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기도도 많이 하고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울다울다 제 영혼 안에 이기심과 욕망과 죄악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 관계가 틀어졌던 사람들이 하나씩 생각나고, 그들이 나쁘다고 생각해서 미워했었는데 기도하다 보니 제 마음에 있는 악이 사람들을 미워하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울며 죄를 깊이 회개했습니다.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미워하는데 소심해서 말은 못 하면서 저는 20대 내내 과민성 대장 증상으로 음식을 도저히 소화시키지를 못하고 설사하고 체하기를 반복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 영혼을 요동케 하던 죄악을 하나씩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상황이 힘들어서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쓰레기 같은 존재로 살 수 밖에 없는 악한 영향력으로부터 저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만약 이 과정이 유학이고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절대로 유학을 선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몰랐으니까 갔습니다. 그러면 그 선택이 잘못이었나요? 아닙니다. 그 기간을 통해 제가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되고, 말씀을 깨닫게 되고, 무엇보다 저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던 죄악의 영향력에서 자유와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뜻과 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선택한 일에 어려움이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 모든 일이 기도의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하나님이 모든 것들을 주도하고 계시며 죄로부터 벗어나는 구원의 은혜를 지금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리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구원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나요?
2. 불의한 부분을 제거하기 위해 응답하십니다. vv.27-48
두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 기대와 다르게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나요? 불의한 부분을 제거하기 위해 응답하십니다. 28절 말씀입니다.
[28]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이제 질문도 바뀝니다. ‘누가 먼저 올라갈까요?’에서 이제는 ‘올라갈까요 말까요?’ 즉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남을 파괴하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시면 가지 않겠다는 복종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올라가면 넘겨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악한 베냐민을 처단하는 선한 이스라엘을 대립 구도가 아닙니다. 베냐민 자손이 있어야 12지파로 온전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런데 온전한 교회에 마치 곰팡이처럼 베냐민이 썩기 시작했기에 이 부분을 놔 둘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베냐민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회개는 기도뿐 아니라 잘라내야 할 부분을 잘라내는 행위까지를 포함합니다. 어떤 사람이 불륜을 저지르다가 회개를 하고 나서, 회개를 한 번 했으니 불륜은 계속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잘못인 것을 알았다면 잘못 자체가 잘라져 나가야 온전한 회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회개는 했지만 베냐민은 이미 썩어버렸기 때문에 놔두면 안 되고 도려내야 합니다. ‘너희는 정당하고 베냐민만 나쁜 것은 아니다. 너희는 이제 회개하고 정결케 되었으니 불의하고 악한 부분은 잘라져 나가야 한다’라고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입니다. 35절입니다.
[3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백 명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심판이 임해서 600명 남고 다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전쟁 이야기를 읽어도 그러려니 넘어갈 때가 있지만 이것은 처참하고 잔인한 내전입니다. 만일 서울에서 내전이 일어나서 서로를 죽여서 몇만 몇십만이 죽는다고 가정한다면 얼마나 비참한 상황일까요!
본문이 너무 길어 읽지는 않았지만 베냐민 모든 성읍까지 공격당해 여자와 아이들까지 다 죽게 됩니다. 이 비참한 일이 왜 일어났나요? 가나안 사람이 행하던 악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들어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분 못하며, 악행이 악이 아니라고 감싸던 부패된 부분을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악을 가장 볼 수 있는 부분이 13절과 14절입니다.
[13]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14] 도리어 …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라
수십 명이 행한 악을 마치 자기들 것으로 여기고 내놓지 않자 다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도 비슷한 일을 행해 나가십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했으면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죄가 만들어낸 행위들이 잘라져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우상숭배를 그냥 놔둘 수는 없습니다. 죄는 관계의 파괴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고 계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죄를 인정하고 죄의 결과가 인생에서 잘라져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과정이 없이 자식이 좋은 대학 가고 사업이 성공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하나님의 관심은 딱 한 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건 내가 의존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자인데 예수님만 믿고 끝까지 가길 원합니다’라는 마음을 가진 자들의 인생에 하나님은 개입해 오십니다. 기도 할수록 하나님은 우리 안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과 같은 모습만 남게 하십니다.
지금 기도를 안 하고 계시다면 아마 이런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아서 무슨 죄를 자꾸 깨닫고 무슨 죄가 잘라지나? 생각하실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영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입니다. 요즘 기도를 많이 하신다면 왜 평소에 되던 일도 잘 안 되지?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를 안 한다면 죄의 영향력은 여러분을 점점 지배해 더 고통스러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안 한다고 하나님이 그냥 두시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개입하시고 반드시 구원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