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4] 이튿날에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거기에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오늘은 사사기를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사사기 내내 우리는 사사기가 성경의 어떤 내용보다 암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암울함이 마지막 장까지 계속됩니다. 이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사사기는 본문 마지막 절인 25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의 내용과 결론이 암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인간의 삶이 어떤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대로, 원하는 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 결론이 어떤지는 사사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인간은 결국은 우상숭배를 하게 되고, 자기에게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비참한 결론을 맞게 된다는 것을 사사기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21장의 암울한 결론은 앞서 있던 전쟁의 여파로 벌어졌습니다. 이 전쟁은 시작부터 엽기적이었습니다. 이 전쟁에 대해 사사기 20장 46절부터 48절은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하나요?
20:46-48 [46] 이 날에 베냐민 사람이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 명이니 … [47] 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였고 … [48]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레위인의 첩을 강간한 불량배 몇 십 명을 심판하겠다고 모였다가 결국에는 서로의 완악한 죄악으로 전쟁이 확대된 나머지 이스라엘에서 4만 명, 베냐민에서 2만 5천 명이 죽었고 베냐민에 속한 노인, 여자, 아이들까지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처참한 결국은 결국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행하던 하나님이 통치가 없는 인생들이 행한 만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전쟁 중에 피를 보고 동료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엄청난 흥분에 사로잡힙니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되는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이 다 죽여 버렸는데 나중에 보니 남자 600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특히 여자들마저 다 죽여 버리면서 본문 6절과 7절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6]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 [7]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
흥분해서 다 죽여 놓고 나중에 후회하면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좋아 보이는 결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면서 더 참혹한 결론이 벌어지게 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인간적인 방법은 무엇인가요?
1.원망과 책임 회피입니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을 위한 인간적인 방법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로 원망과 책임 회피입니다. 문제가 발생하게 된 이유가 이들이 전쟁을 하며 너무 흥분했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와 절대로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왜 전쟁 중에 이런 맹세를 했나요? 생각해 보십시오. 큰일도 아니었는데 전쟁으로 확대되고 의도치 않게 4만 명이나 죽임을 당하며 친인척과 지인들이 많이 죽고 다치게 되자 악에 받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전쟁에서 살아남더라도 저들과 절대 관계하지 않겠다는 분노가 강해서 맹세를 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셨나요? 아닙니다. 자기들의 분노에 사로잡힌 결론이었습니다. 그래놓고는 2절과 3절에서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하나요?
[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하나님이 한 지파를 없애라고 하셨나요? 아닙니다. 그런데 이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깁니다. 사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한 나쁜 결과에 대해 책임지기를 싫어합니다. 이것은 전형적 자기 방어 시스템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죄를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 자기 잘못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즉 누군가 죄를 깨닫고 회개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성숙한 것이 아니라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뒷면을 스스로 볼 수 없듯 자신의 죄를 볼 수 없고 남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어 합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사람들도 있고 성도들 중에는 대학 진학이나 승진 등에서 실패한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거나 혹은 마귀 탓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외부적인 것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없이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증거입니다.
이런 종교적 경향이 얼마나 강력한지 모든 것이 마귀 탓이라고 주장하던 한 교회가 몇 만 명까지 커졌던 적이 있습니다. 감기만 들려도 감기 귀신, 배 아프면 복통귀신, 입덧하면 입덧 귀신 등 모든 것을 마귀 탓으로 돌렸습니다. 이 교회에 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을까요?
내게 일어나는 나쁜 일을 누군가 강력한 사람이 쫓아주면 질병과 가난과 운명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기복주의와 귀신 신앙이 합쳐지니까 엄청나게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모순적인 것이 모든 마귀를 쫓을 수 있다고 주장한 김기동 목사 자신은 평생 당뇨병을 앓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람을 믿었습니다. 결국 나중에 엄청 많은 비리로 TV 등에 방영되면서 성도들이 많이 떠나갔고 재작년에 돌아가시면서 교회 규모는 줄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영적 경향성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 없이 자기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원하는 대로 사는데 잘 안 풀리고 문제가 생기니까 하나님 탓, 마귀 탓하면서 자기 문제가 아니라고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탓이 아니라고 회피하면 원인을 다른 데서 찾게 됩니다. 그래서 22절에 이들이 어떻게 책임 회피를 하나요?
[22] 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꾀를 내서 예배하러 가는 여자들을 납치하라고 베냐민 자손에게 사주합니다. 부모들이 항의하면 ‘우리 딸들을 안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베냐민 지파가 실질적으로 아내가 필요하지 않냐, 너희가 직접 준 것은 아니니 너희는 약속을 깨뜨린 것은 아니다, 베냐민 입장을 생각해 달라’라고 설득하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모순된 행동인가요? 납치되는 딸들도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자발적으로’ 아내를 주면 원칙을 어기는 것이고 ‘납치당하는 것’은 괜찮다고 둘러댐으로 책임지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왜 이런 이야기가 있나요?
우리 인생에 남 탓, 하나님 탓, 마귀 탓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입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안에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왜 문제를 허락하실까요? 물론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다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 자신에게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이 기회를 통해 자기의 문제를 발견합니다.
우리 인생을 우리가 결정하고 판단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모순과 책임 회피로 비참한 결론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간구함으로 우리가 만들어내는 비참한 결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인도하는 결론이 나타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인간적인 방법은 무엇인가요?
2.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두 번째로 문제 해결을 위한 인간적인 방법은 무엇인가요?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베냐민에 여자가 없다고 이방인과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들이 꾀를 냅니다. 8절입니다.
[8] 또 이르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영에 이르러 총회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스라엘 안에서 해결할 방법을 찾다 보니 한 부족이 모임에 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베스 길르앗은 올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요단강 동쪽에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모압과 암몬이 있는 이곳 지역에 정착해서 지금 전쟁이 벌어진 곳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자들입니다.
희생양을 삼기 위해서 지금 규칙을 정한 것입니다. 그 규칙에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희생을 강요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10] 회중이 큰 용사 만 이천 명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조금 멀리 떨어져 살지만 같은 민족입니다. 마치 서울에서 모임이 있는데 강원도에서 안 왔다고 강원도에 가서 대한민국 사람을 죽이는 상황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인가요? 12절입니다.
[12]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주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동침한 일이 없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을 실로 진영으로 데려오니 …
처녀를 얻어서 베냐민 지파 결혼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얼마나 모순된 결정인가요? 동족을 죽이다가 흥분해서 규칙을 정한 뒤 이 규칙을 지키고자 또 다른 동족을 죽이고 여자들을 납치합니다.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날 동족들이 와서 가족을 포함해 그 여자가 알고 있는 모든 동네 사람을 죽이고, 처녀임을 확인한 뒤 납치하여 모르는 남자와 살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했는데도 여자가 모자라자 남은 200명을 더 얻고자 이들은 19절에서 21절에 꾀를 냅니다.
[19] 또 이르되 보라 …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 [20] 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21]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실로는 전쟁이 벌어졌던 곳에서 약간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 땅입니다. 실로는 여호와의 궤가 있어서 큰 예배당처럼 이스라엘이 모이던 곳인데 1년에 날짜를 정해두고 그 지역의 여자들이 예배를 드리러 와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하나님께 경배하곤 했습니다. 전쟁에 참여까지 했던 실로의 여자들을 납치해서 가지라고 아이디어를 준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시작은 한 레위인의 첩이 강간당하고 죽임당한 보복이었습니다. 그 참혹한 정황은 끔찍하게 확대됩니다. 여러분이 만약 실로 여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전쟁을 벌이고, 다 죽고 살아남은 600명을 돕겠다고 내놓은 꾀는 더 비참하고 더 악한 결론을 낳고 맙니다.
성경에 왜 이렇게 엽기적이고 의문투성이인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다고 했나요?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인생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은 이렇게 계속 꼬이고 악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결백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도소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본질입니다. 악할수록 자기 죄는 더욱 부인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죄가 없다고 생각할수록 인간은 주변을 심판하고 싶어 합니다.
그 기준이란 내가 잘하거나 괜찮은 영역입니다. 내가 깔끔하면 지저분한 사람을 판단하고, 내가 옷을 입는 센스가 있으면 매번 같은 옷을 입는 사람을 판단하고, 내가 좋은 학교를 나왔으면 학력으로 판단합니다. 우리도 늘 남을 심판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미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베냐민을 다 죽였나요? ‘나는 괜찮은 존재인데 저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기준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우리 딸들을 저들에게 줄 수 없다’ ‘이 모임에 오지 않은 자들은 죽는다’는 규칙을 만들고 규칙에 위배되는 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듯 우리도 자꾸 규칙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 말로는 파괴와 멸망입니다.
집에서나 공동체에서 물론 규칙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규칙은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함께 7시에 밥을 먹겠다고 했다가도 누군가 그 규칙을 깨트리면 건강한 부모는 상황에 따라 규칙을 변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찬송가만이, 오르간과 피아노만이 하나님 것이고 나머지는 세상 악기라고 생각했더라도 사랑을 위해 움직일 줄 알아야 합니다.
저도 가끔 규칙을 만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11시 넘어 오는 분들은 색깔을 달리한 빨간 주보 나눠드릴까 했습니다.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규칙은 서로를 분리하고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늦게 오시는 분은 사정이 다 있을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원래 규칙의 사람이었는데 사랑을 배우며 규칙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규칙으로 사람을 통제할 수는 있지만 규칙을 강요하면 강요할수록 이스라엘 백성처럼 됩니다. 사랑이 아니라 정죄하고 파괴할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그러면 미워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서로 인사하실 때 가슴에 빨간 주보를 달고 있다면 미워하기 아주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규칙을 잘 지키느냐가 아닙니다. 복음은 규칙을 내려놓고 서로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으로 판단하지 않고 예수로 받아들여 사랑하셨듯 우리도 내가 가진 규칙들을 내려놓고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여전히 자기 규칙으로 남을 보시는 분이 계신가요? 저 사람은 세련됐다, 저 사람은 똑똑하다, 저 사람은 어떻다, 그래서 여러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갈라놓고 계신다면 지금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제일 중요한 목적은 좁은 마음을 점점 내려놓고, 객관적으로는 도대체 잘 지낼 수 없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꾸 ‘나’와 ‘남’을 만들어냅니다. 마음에 안 들면 미워하고 정죄합니다. 심판할 힘이 없으면 나쁜 소문을 만들어 내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죄악이고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이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 마음을 다스려 주세요.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만 잘 지내고 싶은 죄악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도록 내 좁은 틀을 벗어나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라고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에 찾아오셔서, 악한 자들 또한 품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치시는 복이 임하시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