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7일 주일예배
요 1:19-28
정말 좋은 것을 경험했다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요즘처럼 즉각적으로 알릴 수 있는 세상에서는 쉽고 빠르게 알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변화를 경험했다면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증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모두 증인으로 부름 받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증인이라는 단어와 증언이라는 단어는 좋은 것을 전하는 것을 원래 칭하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 사용되는 법정용어입니다. 법정에서 증언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법정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면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서 증언의 내용과 증인은 확실한 것이어야 했으며 그래서 성경 시대에는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증언한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해서만 증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증언을 한다고 하는 이유는 확실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 증인으로 부름을 받고 증언을 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증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나요?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지금 증언을 하는 요한에게 물어보는 레위인들이 등장합니다. 종교인들, 제사장, 레위인, 사두개인과 같은 사람들은 원래 증인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종교인들이 아니라 아무런 배경이 없는 한 사람을 택해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을 삼으십니다. 이 종교인들과 이 세례요한은 기본적인 정체성에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에게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 3:5-6)
이스라엘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평판과 명예를 잃어버릴까봐 안달이 났었습니다. 종교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종교인으로 사는 것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배경이 없는 사람이 나타나 종교적 관심을 다 가져가자 긴장했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평가에 정체성은 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 (마 23:5)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평판과 인정을 위해 모든 것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판에 자신의 정체성을 둔 종교인들과 하나님에게 정체성을 둔 요한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근거를 두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증인을 맡기실 수 없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에게 평판을 근거를 두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우리가 모두 연약한 존재이고 죄인이라 예수 없이는 죽은 자와 같으며 예수 없이는 헛된 것이라는 것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이런 것을 사람들이 듣기 싫어합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 이것을 사람들의 평판에 기대는 사람들은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마 10:22)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평판을 두는 사람은 증인으로서 부적절합니다.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모든 사람들이 다 궁금해서 당신이 그리스도예요? 라고 할 때,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세례 요한을 그리스도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눅 3:15)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엄청난 유혹입니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아니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대해줬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장 큰 욕구 중 하나는 나의 본질과는 달리 멋진 사람으로 보이기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기르는 엄마라면 자녀들을 잘 기르는 엄마로 보여지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멋진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는 멋지지 않아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확실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맞춰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요즘 학폭으로 유명해진 연예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때 단순하게 때리고 돈을 뺏은 학폭이 아니라 정말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예인의 학폭사실이 드러나기 전에 매체와 인터뷰한 기사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기자가 당신의 장점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연예인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순수하다고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순수한 것이 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더럽고 나쁜 짓을 했다는 것에 대해 자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순수한 것 같아요, 멋져요라고 이야기하자 그것을 그냥 받아들여 자신도 순수한 것이 장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이 칭찬하면 우리는 그런 사람이야 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기가 너무 쉽습니다. 누군가 나의 본질을 알게 되면 그 본질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인 척, 남편을 존경하는 아내인 척,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인 척 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 본질적 모습이 더 강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날수록 그 사람과 주변이 붕괴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정체성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 이야기하는지 시선을 맞추고 몸부림칠 때마다 우리는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관심에 맞춰 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은 엘리야냐고 물어봅니다.
[21a]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
왜 엘리야로 생각하냐면 메시야가 다시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임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5)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역할로 온 것이 맞을까요? 맞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 11:14)
예수님도 엘리야가 맞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엘리야가 아니라고 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엘리야와 세례요한이 하는 엘리야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정치적 안정과 풍요와 강력한 변화를 가져오는 능력 많은 엘리야를 원했습니다. 로마에 압제되어 사는 그들의 상황 가운데 큰 변화를 가져올 능력 많은 사람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어떤 엘리야의 역할을 수행했나요?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눅 1:17)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엘리야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자식들에게 가는 것이 정상인데 이것이 틀어졌다는 것입니다. 틀어진 것이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인데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엘리야가 왔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상황이 변화면 괜찮아지겠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 상황, 정치적 상황이 변화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돈을 200만원만 더 벌면 괜찮아질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외적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돈의 문제가 죄의 모든 파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좋은 시장이 세워지면 나라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문제의 본질 안에는 상황이 아니라 죄가 만들어 낸 파괴, 그 본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만이 답입니다. 어떤 상황이 바뀌더라도 본질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문제는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착각한 것입니다. 로마만 없어지면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마 전에는 이스라엘이 어땠나요? 그들은 우상숭배하며 우상숭배가 가져오는 결과를 맛봤습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 마음속에 무엇이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는 틀어진 것인가, 하나님과 왜 관계를 맺지 못하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유일하게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한 번 들으면 사람이 변화할까요? 저는 솔직히 그런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역사에 보면 대각성 운동이 설교를 통해 일어난 적이 많았습니다. 100년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저를 통해서도 대각성 운동이 설교를 통해 일어나면 좋겠다고 기도를 많이 했었습니다. 설교하는데 엄청나게 사람들이 회개하고 변화하고 얼마나 멋지겠습니끼? 그런데 그런 변화를 더 큰 관점에서 기록한 책들을 보면서 관점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가장 유명한 대각성 운동 목사 중 한 명이었는데, 대각성이 일어난 몇 년 이후에 교회에서 성도들에 의해 쫒겨났습니다. 그리고 시골에 가서 목회를 하면서 책을 썼고, 그것이 우리가 읽고 있는 것입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의 힘과 과학의 힘을 믿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대각성 운동을 주셨고 그때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 중 어떤 소수의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사업을 하다, 의사를 하고 있다가 어두운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두 세달을 배를 타고 복음을 전하러 왔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기대를 하든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러 와서 자신의 아이들을 땅에 묻으며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놀랍게 부어주실 때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본질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똑같은 모습으로 삶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만이 변화의 주인이시며 그분에게 유일한 소망이 있는 것임을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그 앞에 나가는 것이 증인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세 번째로 선지자냐고 묻습니다.
[21b] …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신 18:15)
여기서 선지자는 구속사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애매하게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는 아닌데 선지자냐는 질문에는 답하기 쉬웠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마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정체성을 두고 사나요?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두고 삽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이라고 하면 자신도 그것을 가지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어떻게 하나요?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여기는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에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더 심합니다. 과거에는 가족, 친척에게만 증명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불특정다수에게 증명을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저의 페이스북 친구가 1천 명입니다. 제가 어떤 것을 하면 1천 명이 알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 젊은이들은 sns에 어제 무엇을 했는지 올립니다. 어찌보면 무서운 것 아닌가요? 그런데 사람들이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최근 읽은 책의 제목이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입니다. 구글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쓴 책입니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에 사진과 글을 계속해서 올립니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글을 적습니다. 아이에게 소리를 질러서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올리는 부모는 없습니다. 페이스북을 조사했더니 페이스북은 얼마나 수준 있는 책을 읽는가, 가족들은 얼마나 화목한가, 친구들은 얼마나 많은가, 수준 있는 그림, 수준있는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고, 기부도 얼마나 많이 하는지를 올린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데이터로 분석해서 실제 삶과 조사했더니 너무 차이가 컸습니다. 기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기부의 실제 수준을 조사했더니 2배 이상 차이가 났고, 수준 있는 책과 수준 낮은 책의 퍼센트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당연히 자신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1천장 찍은 다음에 가장 잘 나온 사진을 올리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인 이것인데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정체성이 있어선 안됩니다. 그래서 인스타, 페이스북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불행해집니다.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선지자도 아니면 누구라고 대답하나요?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소리라고 합니다. 소리가 눈에 보이나요? 지금처럼 녹음기가 있으면 소리를 잡아낼 수 있지만 소리는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목적이 있는 소리라고 합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땅에 홈이 파여 있으면 평평하게 만들고 주님이 오시는 길을 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타인의 관심에 정체성을 두는 사람일 수록 타인의 시선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사랑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기까지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능력이 많고 예뻐서가 아니라 나는 악인이고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주셨구나라는 이 명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소리처럼 외치고 사라지는 존재일지라도 의미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타인의 시선에 근거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은혜가 필요하며,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가 우리를 절대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도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키만 크면 완벽하다라고 이야기했는데 키가 안 커버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세상에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을 도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욕구들이 사라졌을까요? 그러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때 선생님은 음악을 잘한다고 칭찬했었습니다. 그래서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지휘하라고 했었습니다. 당시 학생이 아주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많이 바라보는 가운데 올라가는 것이 정말 긴장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익숙해지니까 괜찮았습니다. 매주 하다보니 익숙해졌습니다. 나중에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3천 명 정도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하면 느낌이 다릅니다. 그 이후 어쩌다가 대형교회에서만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큰 교회의 어른 교회 설교를 하게 되면 느낌이 다릅니다. 담당 부서도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200명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어른 설교를 하면 준비도 정말 더 열심히 했었습니다.
미국 갔을 때 설교할 기회가 없어졌습니다. 무명의 시절이 나를 너무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사람들에게 나를 증명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으니까 불안, 초조가 지배하며 죽을 것 같았습니다. 무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눈물을 흘리면서 지냈었습니다. 그러다 새벽기도에 설교를 위해 갔는데, 조용한 중에 기도하는데 무명의 서러움, 존재의 허망함에 기도하는데, 창세기 구절을 하나 떠올리게 하셨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너는 왜 두려워하냐. 너는 도대체 무엇을 얻기 원하느냐’ 잘 아는 말씀이었는데 마음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잘한다 잘한다 이야기를 해주기를 너무 원해서 이렇게 불안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성공하게 만들어줄 줄만 알았지, 하나님이 나의 상급이라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자 이제는 소리처럼 사라질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땅에서 소리처럼 예수님이 누구신가 소개하는 자로 사라질지라도 괜찮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정말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네가 뭔데 사람들을 가르치고 네가 뭔데 이런 인생을 살아?”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요동하지 않아보입니다.
[26a]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참 중요한 것과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표면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구분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막 1:8)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한다고 사람이 변화되나요?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알겠습니다. 말씀을 전하는데 하나님이 성령으로 임하면 변화하는구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나도 뭔가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때문에 인생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사람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26b]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자기 정체성이 사람들에게 있지 않아야 예수만을 높이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에만 우리의 근거를 두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정체성을 두고 예수님의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